#155. 빙설협곡 (5)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바로 왔다.
전속력으로 날아와 무방비 상태로 서 있는 거인의 이마와 충돌했는데도 타격감이 전무했다. 탱크에 달라붙어 앞다리로 흠집을 내보려는 사마귀가 된 기분이었다.
“어우, 깜짝이야.”
기습을 당한 거인은 고작 두 걸음을 뒤로 물러났을 뿐이다. 녀석은 벌게진 이마를 쓰다듬다가 나를 발견하고 벌컥 화를 냈다.
“짓눌려서 죽여주마, 소인!”
쫙 펼쳐진 다섯 개의 손가락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워핑으로 거인의 손바닥을 통과한 나는 녀석의 손등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최초의 충돌에서 느껴진 반탄력. 투명한 보호막이 거인의 피부를 감싸고 있는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이었다.
그게 착각이 아니라는 걸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친구 캉이의 스킬을 빌려옵니다.]
[여우트림 Lv. 2]
위기 때마다 잘 써먹은 덕분인지 어느덧 숙련도가 오른 여우트림을 거인의 오른쪽 눈을 향해 토해냈다.
꽝!
“끄아아악!”
이번엔 제법 효과가 있었다. 거인이 쥐고 있던 캉이를 놓치며 눈밭에 드러누운 것이다.
“앞이 안 보여, 젠장.”
여우트림이 거인의 각막에 손상을 주었는지 녀석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 발길질에 걷어차인 캉이가 저 멀리 나동그라졌다.
“캉이야, 괜찮아?”
“형아! 우릴 구하러 온 거구나. 맞지?”
다행히 구미호의 튼튼한 맷집은 거인의 발에 걷어 채이고도 무사할 수 있게 만들어줬다.
“갑자기 몸이 안 움직여서 무서웠지?”
“응. 형아는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 거야?”
“그건 나중에 알려줄게. 지금은 적당한 때가 아니야.”
머리끝까지 화가 난 거인이 다시 땅을 짚고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녀석의 등 뒤로 세 명의 거인이 성큼성큼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그중 두 녀석의 허리춤엔 아스티나와 제르비어스가 매달려 있었다.
“어디 있다가 이제 온 거냐, 망할 용사놈아.”
“방법을 찾은 거야, 슈바인? 혹시 우리도 너처럼 풀려날 수 있어?”
폭렬이라는 이름의 별명을 가진 마왕과 걸출한 무공과 마법을 동시에 구사하는 마검사가 조악한 채집장에 갇혀 있는 꼴은 우스웠으나 나는 웃지 못했다.
“아니. 지금 당장 너희를 여기에서 빼내는 건 힘들 것 같아, 미안해.”
아스티나의 시선은 묻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무모하게 이곳으로 돌진해 온 거냐고.
나는 캉이가 휘말리지 않도록 다시 날아오르며 외쳤다.
“이 층과 거인들이 어떤 수준인지 파악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데이터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나는 거인들의 무리가 모두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포효했다.
“나는 여기 멀쩡히 있다. 자신 있으면 와서 잡아봐라, 빡대가리 거인들아!”
멍청이라는 말에 격분했던 니굴라스의 성격을 미뤄보아 거인들은 지능을 폄하하는 말에 반응하지 않을까 싶어 던져 본 건데,
효과는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다.
“으아아아! 저 소인 놈은 그냥 찢어 죽여버리자!”
“안 돼. 제물을 다치게 하면 크로톤 님이 화내실 거야. 양다리만 뜯어내는 걸로 만족해.”
“소인치고 목청이 좋은 걸 보면 비명소리도 짜릿하겠군!”
곳곳에서 눈밭이 터져나갔다. 거인들이 나를 때려잡기 위해 동시에 발돋움을 한 것이다.
띠링!
[돌발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돌발 퀘스트 #10. ‘밟히면 끝’]
[용사는 빙설협곡을 지배하는 거인들의 무리와 마주쳤습니다. 평균 신장 35미터의 이 육중한 죄수들은 한 명 한 명이 파괴의 화신들입니다. 거인들은 맨손으로도 용사를 압사시킬 수 있으니 단 한 번만 붙잡혀도 탈옥을 향한 여정은 여기에서 끝나게 될 겁니다. 그들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붙잡히지 않도록 하세요.]
[기한: 3분 25초]
[보상: 민첩 +80]
[실패 시: 페널티 없음]
앞서 달려온 거인의 주먹질을 피해 옆구리로 파고들면서 나는 방금 떠오른 퀘스트창을 세심하게 곱씹었다.
어느덧 용사의 몸에 들어와 감옥에 오른 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교도관장은 층에 직접 개입하지 않으므로 내게 퀘스트를 주는 방식으로 말을 걸어온다. 즉, 퀘스트의 여러 부분에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숨기는 습성이 있다.
거인들을 쓰러트리는 것이 아니라 생존이 달성목표.
즉 교도관장은 정면승부로 거인들을 이기는 것은 꿈꾸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싸워서 이길 생각일랑 접으라’고 경고하는 것.
주목해야 할 것은 기한이 ‘3분 25초’로 무척 구체적이라는 점이다.
나는 거기에서 중요한 힌트를 얻었다.
‘레나스가 내게 되돌아오는 시점이 바로 그때이겠군.’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내가 요리조리 비행하며 거인들의 손길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내자 한 거인이 무언가를 집어던졌다.
“이것도 피해 봐라!”
그것은 거인이 손바닥으로 그러모은 눈덩이였다. 상대적인 크기 때문에 내 입장에선 미사일에 치이는 꼴이 될 것이다.
“이크!”
가까스로 눈덩이를 피해냈지만 문제는 거인들에게 최소한의 학습능력이 있다는 점이었다.
“모두 한꺼번에 던져라!”
거인들이 발밑의 눈을 단단하게 뭉치더니 포탄처럼 내게 던지기 시작했다.
몇 개는 피해냈으나 문제는 투구를 쓴 거인 녀석이었다. 그놈은 마치 에이스 투수처럼 다른 거인들과 비교할 수 없는 빠르기로 눈덩이를 던져 왔는데 한 방 한 방이 매서웠다.
써거억!
결국 회피를 포기하고 디아볼릭을 세로로 휘둘러 눈덩이를 잘라냈다.
문제는 두 개로 나뉜 눈덩이가 등 뒤의 거인들과 충돌하면서 주변을 자욱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젠장. 시야가 좋지 않아.’
결국 나는 등에 눈덩이 하나를 얻어맞고 허리가 아작나는 고통과 함께 처박혔다.
“떨어졌다! 잡아!”
순간 동시에 다섯 명의 거인들이 눈밭을 뒹구는 날 붙잡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중에서 두 녀석은 서로를 보지 못하고 머리를 부딪히며 나가떨어졌지만 아직 여섯 개의 손바닥이 남아 있었다.
‘날아서 피하는 건 위험하다.’
나는 본능적으로 전투 시엔 한 번도 쓰지 않았던 캉이의 스킬을 빌려왔다.
[친구 캉이의 스킬을 빌려옵니다.]
[땅굴파기 Lv. 3]
눈밭 밑의 단단한 지면을 파고들어 간신히 붙잡히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보통의 땅과 달리 이 빙설협곡의 지면은 꽁꽁 얼어서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내공을 더 끌어올려야 해.’
디아볼릭의 검신을 언 땅에 밀어 넣고, 검기를 불어넣는 작업을 반복하면서 몇 십 미터를 나아갔다.
우르르릉.
거인들이 무식하게 주먹을 밀어 넣고 있는 모양인지 거듭된 충격이 전신을 강타했다.
포복한 상태로 차근차근 땅을 뚫고 앞을 향해 나아갔다. 그야말로 끈기와의 싸움. 다시 지면을 뚫고 나왔을 때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저쪽이다!”
“멀리서 둘러싸. 놓치면 우린 다 끝장이야.”
처음엔 멀리서 사태를 방관하고 있던 거인들조차 약이 올랐는지 둥그렇게 나를 포위했다. 숫자는 서른 남짓.
거인 세 명만 나를 둘러싸도 숨이 막힐 지경인데 이 정도에 이르면 사방에서 산맥들이 나를 깔아뭉개려고 달려오는 느낌이다.
[MP: 3,204/14,199]
예상보다 마력이 깎여나가는 속도가 가파르다. 몸을 보호하기 위해 두르고 있는 기막을 유지하는 데에 계속 신경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마력이 완전히 바닥을 찍기 전에 내가 기다리던 순간이 찾아왔다.
띠링!
[돌발 퀘스트 #10. ‘밟히면 끝’을 완료했습니다.]
[용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인들을 약 올리며 붙잡히지 않는 데 성공했습니다.]
[민첩이 80 오릅니다.]
멀리서 전투형 오토마타가 날아와 내 옆에 착지했다.
“관객님, 무사하십니까.”
“어, 멀쩡해.”
“지금 전신에 토양을 두르고 계신걸요. 위장책으로서는 적절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만.”
위장이 아니니까 그렇지.
나는 레나스에게 이 꼴이 된 사연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중요한 걸 확인하기로 했다.
“도발은 성공했나?”
“말씀해 주신대로 읊었습니다.”
내가 거인들의 시선을 끌고 있는 동안 레나스는 빙설협곡의 층장인 크로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을 맡았다.
“녀석을 직접 본 소감이 어때?”
“직접 확인하시는 게 빠르실 것 같습니다.”
곧 협곡 끝에 있는 기암거성의 도개교가 내려갔다. 그 안에서 말도 안 되는 덩치를 가진 시커먼 형체가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거인들이 혼비백산 물러나며 비명을 질렀다.
“크로톤 님께서 성을 나오셨다!”
“우리가 늦어서 화가 나신 거야, 도망쳐라!”
“으으으. 나는 화풀이로 죽고 싶지 않아.”
나를 둘러싸고 있던 거인들이 허겁지겁 거리를 벌리자 나는 내게로 돌진해오는 ‘재앙덩어리’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네놈이 그 건방진 입을 나불거렸겠다!”
페어리들의 말에는 조금의 과장도 섞여 있지 않았다.
거인왕 크로톤의 체고는 80미터가 넘었고, 어림짐작으로도 체중은 40톤을 훌쩍 넘어 보였다.
꾸우우우우웅!
협곡을 박살 낼 듯 뛰어온 크로톤이 우리 앞에 착지했다.
잘 다듬어진 흑요석 같은 피부에 근육의 결을 따라 황금색 문신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상반신은 완전 탈의, 하반신에 두른 회색 천은 군용 천막 다섯 개 사이즈로 큼직했으나 무릎 위까지밖에 가려주지 못했다.
붉은색 머리카락과 수염이 바람에 나풀거린다.
“이름을 말하라, 등반죄수.”
“슈바인 스트링거다. 네가 거인들의 우두머리냐?”
“그렇게 반항적인 눈빛으로 날 쳐다보는 죄수는 참으로 오랜만이군. 눈보라의 주박에서 벗어난 건 칭찬해 줄만 하다만…… 굳이 성 바깥으로 날 불러낸 걸 보면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지.”
내가 레나스를 통해 크로톤에게 전달한 말은 이랬다.
‘살집만 키운 모지리 새끼야. 방구석 폐인처럼 성에 처박혀서 부하들만 시키는 걸 보니 태생이 쫄보겠구나.’
프리마돈나인 레나스의 영롱한 목소리로 저런 걸쭉한 욕설을 어떻게 내뱉었는지 직접 관전하지 못해 아쉬웠으나, 크로톤이 풍기는 살기의 밀도를 보아하니 뉘앙스는 제대로 전달된 모양이다.
“오냐. 좀 작아서 안 보일 수도 있겠다만 이 얼굴을 잘 봐둬.”
나는 디아볼릭을 양손으로 잡고 투수에게 신경전을 거는 홈런 타자처럼 내뱉었다.
“내가 너의 숨통을 끊고 저 거성을 먹어치울 새로운 층장 후보이시다.”
꾸드득!
어디선가 거목이 두 조각으로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놀랍게도 그건 크로톤이 어금니를 앙다무는 소리였다.
녀석이 양팔을 좌우로 벌리며 선포했다.
“피하지 않을 테니 자신 있는 공격을 내 몸에 퍼부어봐라.”
“……선공을 양보해 준다고? 자비롭네.”
“만약 네놈이 꺼낸 재주가 시원치 않으면 이 자리에서 밟아 죽일 것이다, 슈바인 스트링거. 그깟 놈은 제물로 바칠 가치도 없다는 뜻이니.”
나는 손짓으로 레나스를 비켜서게 한 후, 무극천마공의 최종 비기에 따르는 기수식을 취했다.
어차피 탐색전은 의미가 없다.
단 한 방으로 놈의 힘을 가늠하려면 강력한 패를 꺼내야 한다.
[천마신교 비전 무극파천공]
[초월식(超越式)]
[아수라대멸겁(阿修羅大滅劫)]
내 등 뒤로 나타난 푸른색 아수라가 악귀 세계의 왕답게 가공할 기운을 터트리며 주변의 눈을 순식간에 녹여 버렸다.
여덟 개의 곡도가 춤을 추더니 매서운 검파를 크로톤에게 내뿜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
표적이 커서 빗나갈 염려 따윈 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수라의 검파가 크로톤의 목과 명치, 팔다리의 급소로 날아가 직격했다.
이마 위에 식은땀이 내려오는 듯 간질거린다.
‘한 발자국도…… 안 움직였어.’
눈을 감은 채 아수라대멸겁을 맨몸으로 버텨낸 크로톤이 히죽 웃었다. 어느덧 분노는 사라지고 만족스러운 탐욕이 엿보였다.
“단순한 떠벌이는 아니었구나. 제물 합격이다.”
녀석이 눈을 뜨더니 야차처럼 공간을 잘라먹으며 달려왔다. 다음 순간 크로톤의 손이 벼락처럼 날아와,
콰악.
아직 현신해 있는 아수라의 목을 움켜잡더니 그대로 터트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