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빙설협곡 (4)
“당신이 페어리 퀸?”
“그래. 페어리들을 이끌고 있는 토니아라고 해.”
젠타의 부름을 받고 날아온 페어리 퀸 토니아가 내 눈앞에 떠 있었다.
그녀의 용모를 보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일족의 여왕이라기엔 파격적인 차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깨 밑으로 왼쪽 팔이 잘려나가 있었고 그 자리엔 끔찍한 화상 자국이 상체의 절반을 휘감고 있었다.
등에 달려 있는 날개도 성한 건 반쪽뿐이었다. 없어져 버린 한쪽 날개의 자리엔 가죽으로 만들어진 인공 피막을 달아놓아 가까스로 비행이 가능한 모양이었다.
자연히 수갑 또한 오른팔에만 채워져 있었다.
“내가 외팔이 여왕이라서 놀란 거겠지?”
“어, 응. 원래부터 그랬던 거야?”
토니아는 무덤덤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푸르가토리움에 들어온 이후 사고를 당한 거야. 층장 크로톤의 짓이지.”
“…….”
“내가 둥지 바깥으로 나온 건 이백여 년 만이야. 신하의 페로몬을 신뢰하지 못해서야 지도자라 할 수는 없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니, 부디 당신의 손등을 보여줄 수 있겠어?”
사자 문신이 새겨진 오른 손등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토니아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속눈썹을 파르라니 떨었다.
“정말이구나. 진짜였어.”
페어리 퀸의 옆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젠타의 눈가도 촉촉이 젖어들고 있었다.
“감축드립니다, 퀸이시여. 드디어 우리 일족에게도 희망의 불씨가 생겼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 해방자를 찾아낸 너의 공이 크다. 내 나중에 반드시 치하하도록 하겠다, 젠타.”
“저는 그저 현명하신 퀸의 명령을 믿고 따랐을 뿐입니다.”
“잠깐잠깐.”
순식간에 대화에서 배제된 듯한 기분이 그닥 좋지 않아 끼어들었다.
“왜 사자 문신을 새긴 죄수를 찾고 있었는지 말해줄 타이밍이잖아?”
“그 표식이 수왕 르팔타커스 시온의 뜻을 잇는 자라는 걸 내가 알고 있으니까. 내 말이 틀렸나.”
“……맞아. 르팔타커스의 힘이 너한테 필요한 이유는 뭔데?”
“수왕과 연이 있는 자만이 기원검 네메시스의 칼자루를 만질 수 있다고 들었거든. 그 전설적인 무기를 다룰 수 있는 죄수가 등장해야 이 감옥의 5층을 해방시킬 수 있어.”
“더 자세히 설명해 줘.”
“저 거인들이 힘을 쓰는 걸 목격했다면 대충 짐작했을 거야. 이 층 빙설협곡에선 바깥세상에서 쌓아온 용력이나 마력의 크기는 완전히 무용지물이 돼.”
“그렇다면?”
“오직 크기. 죄수의 신장과 부피만이 강함의 척도가 돼.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거인족으로 태어났거나 거인에 필적하는 체고를 가진 죄수들이 층을 장악하게 되었지.”
내 동료들 중 최강의 전력이라 할 수 있는 레나스가 거인에게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날파리 취급을 당했던 이유가 설명되었다.
거대한 자가 층을 지배한다.
작은 자는 짓밟히거나 잡아 먹힌다.
그것이 이 5층의 교도관 ‘가늠자를 속이는 저울’이 죄수들에게 강제하는 규칙인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가장 작은 너희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게 이상하잖아?”
“층장 크로톤은 자신의 휘하에 있는 거인보다 작은 죄수들을 모두 끌고 가서 제물로 바쳐. 하지만 제물에는 기준이 있거든. 너무 작으면 제물의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서 신경 쓰지 않아. 굴욕적이지만 우리는…… 그들의 기준에선 볼품 없을 정도로 작아. 그래서 적대세력으로서의 가치조차 없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어.”
침대에 바퀴벌레가 숨어들면 인간은 때려잡게 돼 있다.
하지만 베개에 달라붙어 있는 진드기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게 된다.
“층장 크로톤은 얼마나 거대하길래?”
“그놈은 보통 괴물이 아니야. 녀석이 이끌고 있는 거인들보다 세 배는 큰 초대형 거인이지. 어쩌면 크로톤은 더 높은 층에 있는 죄수들까지 통틀어서 가장 커다란 육체를 갖고 있을지도 몰라.”
크기가 곧 힘인 세상에서 그것은 내게 결코 희소식이 아니었다.
하지만 불안한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크로톤의 몸은 매년 커지고 있어. 그게 가능한 이유는 이 층에 붙잡혀 들어오거나,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등반죄수들을 제물로 삼아 본인의 덩치를 키우고 있기 때문이야.”
페어리 퀸 토니아는 크로톤이 그토록 힘을 키울 수 있는 원인이 이 층에 존재하는 기원검의 파편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래서 나 같은 죄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군.”
“응. 지금의 크로톤은 대적불가의 폭군이야. 하지만 그에게서 기원검의 파편을 빼앗아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는 다르겠지.”
“본론으로 들어가자. 내가 기원검의 칼자루를 갖고 있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이 층에 떨어지자마자 괴이한 주박에 걸려 있어. 이렇게 대화도 할 수 있고 생각도 할 수 있지만…….”
“벗어나겠다는 의지가 생겨나질 않지? 그게 바로 크로톤의 술법이야. 제물 후보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자신의 숨결을 구름 속에 흘려보내고 있거든.”
토니아가 날개를 슬쩍 움직여 내 코앞으로 날아왔다.
“하지만 나라면 크로톤의 술법을 해제할 수 있어. 너를 자유로운 몸으로 해방시켜줄 수 있지.”
“정말이야?”
내가 묻자 토니아는 눈을 감은 채 수갑이 채워진 오른손을 들어 내 이마를 어루만졌다.
아무런 효과음도, 미미한 불꽃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당장이라도 이 나무통을 부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의식 단계에서 날 구속하던 금제는 완전히 사라졌다.
“좋아하긴 일러. 나와 접촉하지 않은 상태에서 저 눈을 다시 맞으면 또다시 크로톤의 술법에 걸릴 테니까.”
“생각해둔 묘안이 있어?”
“저 눈보라가 절대 닿지 않는 구역에 우리 페어리들만의 둥지가 있어. 너를 그곳에 데려가서 내 힘으로 거인들에 맞설 수 있을 만큼 커다랗게 만들 거야. 그때라면 비로소 제대로 된 전쟁을 걸 수 있겠지.”
토니아가 방금 한 말에서 나는 한 가지 맹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럼 그걸 지금 당장 해주면 되잖아?”
“그건 곤란해.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리는 작업이거든.”
“얼마나 오래 걸리는데?”
“네가 가진 힘에 따라 다르지만 쇼크사하지 않을 속도에 아슬아슬하게 맞춘다면 700일에서 800일 정도?”
뭐? 2년씩이나 걸린다고?
나는 페어리 퀸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며 거부했다.
“그건 안 돼. 나는 이 층에 혼자 올라온 게 아니란 말이야. 세 명의 친구들이 더 있어. 녀석들도 구해야 돼.”
“안타깝지만 친구들의 목숨은 포기해. 그만큼의 제물 후보를 놓쳤다는 보고가 크로톤에게 들어가면 녀석은 광분해서 눈보라를 멈춘 후에 층 전체를 샅샅이 뒤질지도 몰라. 그러면 우리뿐만 아니라 너도 죽게 돼.”
“친구들을 포기하라는 말을 한 게 네가 아니었다면 지금 멱살이 잡혔을 거야. 신체구조상 그럴 수 없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 페어리 퀸.”
“감히 퀸에게 무슨 망발이냐, 인간!”
내 눈에서 불똥이 튀기자 젠타가 황급히 토니아의 앞을 막아서며 날 노려보았지만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
토니아는 젠타를 슬쩍 옆으로 밀며 말했다.
“고집 부리지 마. 내가 말한 것만이 네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네 친구들이 제물로 희생당하는 건 피할 수 없는 운명이야.”
“운명에 순응하는 편이었다면 형량이 2배씩 곱해지는 등반죄수 짓거리를 하고 있을 리 없잖아?”
“꼭 손바닥을 완전히 태워 먹어야 불꽃에서 손을 떼는 성격인가.”
“손을 태워 먹지 않고 불꽃을 만질 수 있을 만큼 요령이 좋다고 생각해줬음 좋겠는데. 그 크로톤이란 녀석이 제물을 처리하기까지 얼마나 걸리지?”
“너를 제외하고 세 명이나 된다고 했지? 그렇다면 이번엔 의식을 준비하는 데 시간이 꽤 필요할 거야. 한 명 당 보통 12시간 정도가 필요했으니 길어야 36시간 정도가 데드라인이라 볼 수 있겠지.”
36시간.
하루하고도 절반.
아스티나와 제르비어스, 캉이를 구해내려면 그 안에 빼내 와야 한다.
“나를 주박에서 풀어준 것은 고마워, 토니아. 하지만 역시 네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겠어. 나는 친구들을 구하러 가야 돼.”
낙담하거나 말릴 줄 알았는데 토니아는 다른 행동을 취했다.
내게 몇 가지 추가 제안을 전달한 것이다.
그건 나로서도 귀가 솔깃한 방안들이었다.
“이상이야, 슈바인 스트링거. 널 다시 만날 때 신체가 절단된 상태만 아니길 빌겠어.”
“내가 실패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거군?”
“크로톤에 맞서려면 너도 나도 목숨을 걸어야 해. 그건 강요할 수 없는 문제거니와 애초에 내게 그런 힘은 없어. 여러모로 칼자루는 네가 쥐고 있는 거니까.”
*
빠각!
잠금장치를 주먹으로 부숴버리는 게 이토록 통쾌한 줄은 몰랐다.
“어어어?”
자신의 허리춤에서 나무통이 박살 나며 터져나가자 거인 니굴라스는 뜨악하며 걸음을 멈췄다.
“어딜 보냐, 이 거인 새끼야!”
녀석이 나무통을 자세히 뒤져보기라도 하면 페어리 퀸 토니아와 젠타를 발견하게 될지 모르기에 나는 사자후를 터트려 내 쪽을 보게 만들었다.
“너, 어떻게 통을 빠져나왔지?”
“어떻게긴. 그러게 좀 튼튼한 재질로 만들지 그랬니.”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오만하게 웃어주자 니굴라스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날 붙잡기 위해 손을 뻗어왔다.
“이 자식이!”
하지만 느린 손동작에는 결코 붙잡힐 내가 아니었다.
경공술로 요리조리 녀석의 주변을 맴돌며 빠져나가자, 곧 앞서 걷고 있던 씨룸이 이상을 발견하고 뛰어오고 있었다.
‘이 정도면 진작에 탈출했겠지?’
여기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다.
나는 현재 진기를 끌어올려 전신의 주변에 얇은 기막을 두른 상태였다. 내공으로 두른 갑옷이랄까.
그 때문에 눈보라를 맞으면서도 눈송이에 접촉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이것은 마력이 계속 깎여나가는 무식한 임시방편이다.
“여기서 빈 통을 붙잡고 백날 기다려보라고! 멍청아!”
“나 멍청이 아니다! 으아!”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는 니굴라스를 팽개쳐둔 채 나는 토니아가 알려준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 옆으로 따라붙는 비행물체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었다.
“알아서 따라왔구나, 레나스.”
“관객님의 반응을 탐지하자마자 온 겁니다. 움직이실 수 없었던 거 아닌가요?”
“운 좋게도 요정의 도움을 받아서 말이야.”
“요정이요?”
자세한 것을 일일이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나는 비행에 집중하면서 레나스에게 몇 가지 짤막한 지시를 내렸다.
“할 수 있겠어?”
“그게 관객님들을 위험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가요?”
“그래. 맞아.”
“그렇다면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
레나스의 날개에 붙은 분사구가 맹렬한 화염을 터트렸다.
곧 그녀는 나보다 한참 앞서서 보이지 않는 점이 되어 날아갔다.
그렇게 몇 분을 더 날아가자 나는 더 이상 눈보라가 내 주변을 뒤덮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기막을 해제할 순 없었다. 토니아의 말에 따르면 단 한 방울만으로도 층장 크로톤의 주박에 다시 걸릴 수 있다고 했으니.
잠시 후 내 시야에 걸린 것은 서른 명이 넘어 보이는 거인들의 행렬이었다.
니굴라스와 씨룸의 체고는 30미터 정도였는데 그보다도 더 덩치가 큰 녀석들도 몇 명 있었다.
정면으로 싸움을 걸면 내 쪽에서 박살이 나겠지?
자연히 오금이 저리는 풍경이다.
최대한 기척을 숨긴 채 달라붙어서 빈틈을 노리는 게 정석일 것이다.
“어라?”
하지만 그 행렬의 끄트머리에서 구미호 상태의 캉이를 한 손에 말아쥐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거인을 발견하자,
순식간에 분노의 게이지가 맥스로 차오르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안 되겠다. 일단 후려치고 본다.
“거기 서, 이 자식들아!”
행렬 뒤편에 서 있던 서너 명의 거인들이 내 외침에 반응해 움찔하는 게 보였다.
인벤토리에서 마검 디아볼릭을 꺼내 오른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해서 검기를 뽑아낸 뒤,
“으랏차아아아!”
캉이를 쥐고 있는 거인의 이마와 강렬하게 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