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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153화 (153/300)

#153. 빙설협곡 (3)

마법사에게 있어서 마법진이란 지문(指紋)과도 같다.

그 누구도 완벽하게 동일한 지문을 갖고 태어나지 않듯이 마법진에도 시전자가 걸어온 삶이 그대로 담겨 있기에 독자적 형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참월의 마녀로부터 물려받은 마력 회로를 몸 속에 지닌 아스티나. 그녀의 마법진은 그래서 유독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 고귀함에 취해 있을 수 없었으니.

“제발. 돌아가라, 응?”

아스티나는 자신의 눈 앞에 구현돼 있는 마법진에게 애타는 심정으로 빌었다.

술식이 전개되기 위해선 마법진의 중앙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개의 원(圓)이 회전해야 한다. 하지만 아스티나의 마법진은 못 박힌 것처럼 꿈쩍도 하질 않고 있었다.

“대체 왜 안 되는 거지?”

아주 간단한 마력만으로도 아스티나는 눈앞의 조악한 잠금장치를 우그러트릴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7서클 중력마법사인 아스티나를 절망케 만들고 있었다.

검사가 칼을 휘두르기 위해선 당연하게도 그의 뇌가 ‘휘두른다’는 명령을 관절과 근육에 보내야 한다.

그처럼 마법진이 회전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스티나가 술식을 전개할 의지가 없다고밖에 해석할 수 없다.

통!

커다란 손가락이 나무통의 옆면을 건드렸다.

“야, 소인. 허튼짓에 힘 빼지 마. 외로워서 그런 거라면 곧 네 친구들도 만나게 될 테니까.”

아스티나를 채집해 가고 있는 거인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한 번 이 통에 집어넣은 소인이 탈출할 수 있을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는 태연한 말투였다.

“아, 말하자마자 저기 오는군.”

통 속에 갇혀 있었기에 거인이 말하는 ‘저기’가 어딘지 아스티나는 알기 어려웠다. 그래서 미어캣처럼 창살에 고개를 내민 채 사방을 살폈다.

또 다른 거인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허리춤에 찬 나무통에는 비유적으로도, 실질적으로 뿔이 난 마왕이 갇혀 있었다.

“제르비어스?”

“아스티나, 너도?”

길게 대화를 나누지 않았는데도 둘은 동일한 문제에 부딪혔음을 알 수 있었다.

제르비어스는 난처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너도 반항할 수 없었다는 건 내가 마법에 걸린 게 아니라는 건가?”

“실망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제르비어스. 내가 탐지하지 못한 엄청난 고위 마법일 수도 있지. 나한테 정신지배 마법을 걸 순 없어? 여기를 탈출하도록 컨트롤하는 거지.”

아스티나의 파격적인 발상에 제르비어스의 눈동자가 잠시 커졌으나 이내 여의치 않다는 답이 돌아왔다.

“힘들 거다. 단순한 체계를 가진 동물도 아니고 너처럼 뛰어난 마법사를 정신지배하는 건 위험하기 짝이 없어. 자칫하면 네가 광인이 되어버릴 수도 있고.”

제르비어스는 나무통의 볼품 없는 창살을 손으로 가리켰다.

“무엇보다 대상과 접촉해야 하는데, 그것부터가 불가능하군.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동일한 높이에 매달린 나무통 안에서 대화를 나누던 둘의 귀에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누나아! 아저씨이!”

여우의 귀를 가진 땅딸막한 꼬마가 거인에게 붙잡혀 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캉이야, 괜찮아?”

“응! 나는 멀쩡해. 이 거인의 말이 맞았어. 가만히 있으면 누나들이랑 만날 수 있을 거라 했거든.”

캉이의 목소리엔 아무런 위기감이나 당혹스러움이 존재하질 않았다.

정체불명의 거인들이 자신들을 잡아가는 것보다 ‘모두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어린 구미호를 안심시키는 모양이다.

“우릴 어디론가 데려가고 있어.”

뿔뿔이 흩어져 있던 거인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은 한 방향으로 걷고 있었는데 처음엔 거센 눈보라 때문에 무엇을 이정표로 삼고 있는지 아스티나로선 알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곧 눈보라는 사그라들었고,

저 멀리 압도적인 규모의 협곡이 드러났다.

협곡이 끝나는 지점에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 있는 기암거성의 끄트머리가 보였다.

“저곳에 이 층의 층장이 살고 있는 모양이다. 내가 있던 마왕성보다 수백 배는 크겠군.”

제르비어스는 원근법을 무시하는 거성의 크기에 질린 얼굴을 했다.

아스티나 또한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삼월초원의 백묘탑도, 그보다 더욱 높은 곳까지 솟아 있었던 만철도시의 검궁도 저렇게 무식할 정도로 커다랗진 않았다.

그때, 한 거인이 호통을 쳤다.

“잠깐만! 이 멍청아, 잘못 잡아왔잖아.”

그 거인은 다른 거인과 달리 머리에 녹슨 투구를 걸치고 있었다. 그것이 그자의 지위를 상징하기라도 하는 듯 다른 거인들이 옆으로 비켜섰다.

투구의 거인이 성큼성큼 다가가 멈춰선 곳은 캉이를 허리에 매달고 있는 거인이었다.

“나, 나인가? 어째서!”

“람카트. 크로톤 님의 말씀을 허투루 들었군. 소인이라고 다 똑같은 게 아니다. 너무 작은 녀석은 필요가 없다고.”

그렇게 말한 투구의 거인이 람카트라는 거인의 허리춤에서 나무통을 잡아챘다. 그리고 잠금장치를 열더니 캉이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이것 봐라. 손가락 한 마디보다 작잖아. 그러면 제물로 쓸 수 없어.”

“그, 그런가? 난 소인이면 다 똑같아 보이는데.”

“재봤어야지, 멍청아!”

“나 멍청이 아니다!”

“뭘 잘했다고 소리를 지르나, 멍청이가!”

투구의 거인이 람카트의 머리를 주먹으로 쥐어박았다.

꽈르르릉!

성벽 무너지는 소리가 났음에도 람카트는 짜증 나는 표정만 지었을 뿐 상관에게 대들지 못했다.

“이 소인은 버리고 간다.”

투구의 거인은 캉이를 눈밭에 떨군 채 갈 길을 갔다. 다른 거인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눈밭에서 벌떡 일어난 캉이는 당황한 채 소리쳤다.

“누나! 나 어떡해?”

“그냥 거기에 있어. 따라오지 마.”

“나 혼자 여깄으라고? 싫은데.”

“아직 모두가 잡힌 건 아니잖아. 슈바인이 남았어. 캉이 널 찾으러 올 수도 있으니 어디 숨어 있다가…….”

아스티나의 얼굴에 갑자기 큰 그림자가 드리웠다.

콧김을 씩씩 내뿜는 거인 람카트가 내팽개쳐진 캉이에게 다가온 것이다.

“너 때문에 한 대 맞았잖아, 이 쬐끄만 녀석아.”

람카트가 오른쪽 발을 들어 올리더니 말했다.

“어차피 거기서 얼어 죽을 테니 내가 숨통을 끊어주마.”

쿠우우우우웅!

거인의 큼지막한 발이 눈밭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아스티나는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곧 람카트의 발밑에서 익히 보아온 섬광이 터져 나오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츠파아아앗!

거인의 발보다 살짝 큰 여우가 등을 곧추세운 채 버텨내고 있었다.

“냄새나는 발 저리 치워!”

람카트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서더니 아홉 개의 꼬리를 곧추세운 캉이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십병장! 여기 이 녀석 커졌는데?”

그 외침에 뒤를 돌아본 투구의 거인이 화들짝 놀랐다.

“희한하군. 변신하는 소인은 오랜만에 보는데.”

다시 되돌아온 십병장은 으르렁대는 캉이를 유심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도 데리고 간다. 채집통에 들어갈 것 같진 않으니 람카트 네가 잡아서 옮겨라.”

“싫다! 아까 멍청이라고 한 말을 먼저 취소해라!”

“한 대 더 맞을래, 그냥 할래.”

“아, 알았다…….”

람카트는 시무룩한 얼굴로 캉이의 허리춤을 손가락으로 움켜잡았다.

“젠장! 이거 놔, 놓으라고.”

캉이는 발버둥을 쳤으나 거인의 손가락을 깨물거나 발톱으로 할퀴지는 못했다. 살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변신할 순 있었지만 저항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휴우. 그래도 죽지 않았어. 다행이야.”

그때, 안도하는 아스티나의 귓가에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다행일까? 전혀 아닐걸. 차라리 변신하지 않았으면 얘들한테 끌려가진 않았잖아.”

“누구야!”

나비보다 조금 큰 페어리가 아스티나의 눈 앞에서 날고 있었다.

얼굴만 봐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예쁘장한 요정. 앙증맞은 이마에는 두 개의 더듬이가 달려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는 알 거 없고. 넌 수갑도 없어서 아닐 것 같지만 일단 확인은 할게. 손등 좀 보여줄래?”

“내 손등은 왜?”

아스티나는 반사적으로 양손을 등 뒤로 감췄지만 의외로 페어리의 비행 솜씨는 그보다 훨씬 재빨랐다.

아스티나의 등 뒤로 잽싸게 날아가서 손등을 확인한 페어리가 혀를 찼다.

“역시 아니네. 너는 내가 본 인간 중에서 특별히 아름답게 생겨서 더 아깝다.”

“뭐가 아까운 건데?”

“이대로 끌려가서 크로톤의 제물이 될 테니까. 나는 이 통에 담겨 성으로 끌려간 제물이 다시 성 밖으로 나오는 걸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어. 뭔진 몰라도 끔찍한 꼴을 당할걸.”

그렇게 말한 페어리는 제르비어스의 나무통 쪽을 향해 소리쳤다.

“그쪽은 어때? 그림이 있어?”

“아니야! 허탕이야. 근데 이 마족이 나한테 이상한 짓을 하려고 했어.”

아스티나의 눈에 황급히 손사래를 치는 제르비어스의 당황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더듬이가 있길래 혹시나 곤충인가 싶어서 정신지배를 걸어보려고 했던 것뿐이다. 실례를 했다면 미안하군.”

“당연히 실례지! 우리 페어리도 엄연히 지성체거든?”

눈치가 빨랐던 아스티나는 눈앞의 페어리가 어떤 인간을 찾고 있으며, 자신은 그 대상이 아니라고 판정내려졌다는 걸 짐작했다.

“넌 원래 누굴 찾아야 하는데?”

“해방자를 찾고 있어. 이 층에는 어떤 전설이 있는데 페어리 퀸께서는 그 이야기를 철석같이 믿고 계시거든. 거인들의 왕인 크로톤을 유일하게 쓰러트릴 수 있는 죄수. 우린 그를 해방자라고 불러.”

“그 해방자의 손등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어?”

“응. 무섭게 생긴 사자의 그림이…….”

“사자!”

“꺅!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니.”

아스티나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전구처럼 켜졌다.

오른 손등에 사자의 문신을 갖고 있는 그녀의 동료.

자신을 저주받은 타임루프의 굴레에서 탈출시켜 준 등반죄수 슈바인 스트링거의 존재가 떠오른 것이다.

“알고 있어, 그 사자 문신을 새긴 사람.”

“뭐엇? 진짜야?”

“내 친구거든. 나와 함께 이 층에 떨어졌을 거야. 아마 지금쯤…….”

그때, 제르비어스의 나무통에 있다가 뽀르르 날아온 페어리가 상기된 얼굴로 소리쳤다.

“이르미! 느껴져?”

이르미라고 불린 페어리는 아스티나와 대화하다 말고 갑자기 눈을 감았다. 그러자 이마에 달린 더듬이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오오오! 진짜네. 이건 퀸의 호르몬이야. 그분께서 드디어 둥지 바깥으로 나오신 거야.”

“무슨 일인지 좀 설명해 주겠어?”

이르미는 짜증을 억누르고 있는 아스티나에게 대답했다.

“우리 페어리 중에서 누군가가 해방자를 찾았다는 페로몬을 퀸에게 전달한 거야. 정말로 네 친구가 해방자가 맞았나 본데?”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데.”

“그건 모르겠어. 전설로만 전해지는 거라서 우리도 처음 있는 일이란 말이야.”

그렇게 허둥대던 이르미는 다른 페어리를 데리고 나무통을 빠져나갔다.

“우리는 퀸에게 가야 해. 반가웠어, 아름다운 인간아.”

“야야! 잠깐만.”

두 페어리는 그렇게 빠른 속도로 어디론가 날아가버렸다. 황망해 있던 아스티나와 제르비어스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때 거인 람카트의 손에 쥐어진 채 축 늘어져 있던 구미호의 턱이 치켜 올라갔다. 캉이가 코를 킁킁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누나! 형아의 냄새가 나!”

“슈바인 말하는 거야?”

“응. 냄새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 우릴 구하러 오고 있나 봐.”

분명 반가운 소식이었으나 제르비어스는 부정적이었다.

“어쩌면 그 녀석도 붙잡힌 거 아닐까? 다른 거인의 통에 담겨서 이쪽으로 합류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잖나.”

그러나 이번엔 아스티나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아니야. 나한테도 느껴져. 지금 슈바인은 천마어기행공을 쓰고 있어.”

경공술을 쓸 수 있다는 건 나무통의 구속 신세에서 벗어났다는 뜻이었다.

대체 무슨 수로 벗어날 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늘 해왔듯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낸 모양이다.

“온다.”

아스티나의 시선이 거인들의 행렬 뒤쪽에 못 박혔다.

하나의 작은 점이 총탄처럼 빠른 속도로 그녀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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