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빙설협곡 (1)
냉동고 속 붉은 구슬을 만지자 메시지가 떴다.
자연스럽게 구슬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파천황의 혈액이 응고되어 동그랗게 뭉쳐진 것이었다.
[르팔타커스 시온의 유해 일부를 되찾았습니다.]
[당신을 가호하고 있는 파천황의 권능이 한층 두터워집니다.]
[권능 ‘반갑다, 친구야’가 한 단계 진화합니다. 당신은 이제 친구의 곁으로 순간이동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위치로 친구를 소환할 수 있습니다. 소환은 친구가 동의해야만 가능하며 횟수 제한은 역시 하루 3회입니다.]
푸르가토리움에서 여러 번 큰 도움을 줬던 권능인 순간이동의 권능.
그것이 역방향으로도 가능하게 되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친구를 내 곁으로 불러올 수 있게 된 것이다.
교도관의 시련을 돌파할 때 중요한 요소가 될 것 같다. 흩어져서 싸워야 할 경우 내가 작전의 중심을 지키는 것도, 그 반대도 가능해진다. 자유도가 확 넓어지는 것이다.
“좋아, 그럼 출발해볼까.”
레나스의 어깨를 만져 다시 인벤토리에 넣은 뒤 우리는 일렬로 2층 복도에 섰다.
[5층 빙설협곡으로 이어지는 포탈입니다.]
다음 층의 이름을 알게 된 순간 나도 모르게 폭렬마왕 제르비어스의 얼굴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왜?”
“다음 층이 빙설협곡이라는데? 딱 봐도 무진장 추운 곳이라는 느낌이 오잖아.”
제르비어스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녀석은 마그마가 일렁거리는 화룡도의 층장 출신이다. 마왕군의 대장답게 화염면역이라는 뛰어난 내성도 갖고 있다.
하지만 한쪽에 내성이 있으면 반대쪽에 취약해지는 게 자연의 이치.
“제기랄. 결국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군.”
“그 망토에 방한 기능 같은 건 없어?”
“그딴 건 없다. 쳇. 냉기 따위 펄펄 끓는 피의 온도로 이겨내는 수밖에.”
다행히 구미호 소년은 추위를 전혀 겁내지 않고 있었다.
“나는 여우로 변신할 때 추위나 더위를 느끼지 않으니까 괜찮아! 그런데 빙설이 뭐야, 형아?”
“얼음과 눈이란 뜻이야.”
열대지역인 대수림에서 자라난 캉이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본 적이 없다. 이야기를 들려주니 다음 층에 대한 기대감이 충만해진 모양이다.
“아스티나, 넌 어때?”
“나는 마녀의 딸이야. 기압과 온도를 조절하는 건 큰 마력을 소모하지 않고서도 가능해.”
그런데 대답의 내용과 달리 아스티나의 표정은 평소와 달리 어두웠다.
포탈을 눈앞에 두고 넌지시 그 이유를 묻자,
“추위 때문이 아니라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어. 슈바인 너를 도와주고 있는 두 존재에 대해서 말야.”
“교도관장과 르팔타커스를 말하는 거야?”
아스티나는 나와 세 개의 층을 함께 등반하면서 내 상황에 대해 적지 않은 사실을 공유하고 있었다.
“교도관장은 너에게 인벤토리라는 아공간 접속 권한을 주었고 퀘스트로 힘을 키워주고 있어. 르팔타커스라는 죄수의 영령은 네게 세 가지 권능을 줘서 동료들을 늘리라고 했고.”
그것은 다른 죄수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특혜였다.
“여지껏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두 절대자의 축복이 널 따르고 있는 거잖아? 하지만 나는 연금술사 사니릭투스의 말마따나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른다고 생각해.”
“공짜는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거군.”
“맞아. 교도관장은 널 감옥에 가둔 진짜 이유를 아직 말해주지 않았어. 그리고 르팔타커스 역시 층간 구역에 기원검의 파편을 숨겨둔 걸 네게 드러낸 적이 없고.”
그것은 나도 줄곧 생각해온 부분이다.
교도관장과 파천황 둘 모두 어떤 꿍꿍이가 있어 나를 탈옥시키려 하는 것일진대, 내 쪽에선 둘의 진의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
“그 둘이 바라는 것은 동일하지. 등반죄수인 너의 탈옥. 하지만 형태만 비슷할 뿐 궁극적으로 바라는 건 다를 수도 있잖아? 최후의 순간에 널 두고 그 둘의 의지가 서로 반목한다면 어쩔 셈이야?”
내가 파천황의 유해에 접촉했을 때 눈앞에 떴던 메시지는 무엇이었나.
[파천황의 유해가 교도관장의 관리 시스템에 침투하고 있습니다.]
[대응합니다.]
[대응 실패.]
교도관장의 의지가 푸르가토리움의 운영체제라면 마치 파천황의 권능은 그것에 침투한 바이러스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한쪽은 감옥의 관리자.
한쪽은 탈옥에 가장 가까웠던 죄수.
태생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사이인 것이다.
“언젠가 너는 그 둘 사이에 서서 한쪽을 선택해야 할지도 몰라. 네가 지하실에 홀로 내려가 있는 동안 나는 그런 직감이 들었어.”
“……마녀의 딸이 해주는 조언이니만큼 새겨듣겠어.”
아스티나의 얼굴이 내게 성큼 다가왔다.
“농담하는 게 아니야. 제르비어스는 물론이고 나와 캉이가 죄수가 아님에도 네 등반에 함께 할 수 있는 건 우리가 인과의 끈으로 묶여 있기 때문이잖아. 네 선택은 결국 너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을 거야.”
우리는 운명공동체다.
그것을 잊지 말라는 이야기를 아스티나는 하고 있었다. 나는 웃음기를 없앤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 그 어느 쪽도 완전히 신뢰하지 않을 테니까.”
퉁수를 얻어맞기 전에 먼저 통수를 치겠다.
나는 그 다짐을 보여준 뒤 포탈로 뛰어들었다.
*
하지만 5층 포탈을 벗어나자마자 나는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에 휩싸여야만 했다.
압도적인 추위는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하지만 전혀 대비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아스티나?”
휘이이이이잉!
강렬한 눈보라가 얼굴을 때리는 와중에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봤다.
“제르비어스! 캉이야! ……다들 어디 있는 거야?”
사위가 온통 새하얀 순백의 설원.
어느 곳에서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이곳에 홀로 떨어진 것이다.
‘출발지점이 서로 다르다고?’
지금까지 네 개의 포탈을 통과하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2층에서 제르비어스와 나는 함께 삼월초원의 풀밭에 떨어졌고, 3층 대수림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4층 만철도시에서도 우리 넷은 자연스럽게 모여있었다.
사실은 결코 자연스럽지 않은 일인데도 불구하고.
출발 지점에 모두 모여서 시작한단 규칙 따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거라면 말이 된다.
[5층의 교도관 ‘저울추를 속이는 바늘’이 등반죄수를 주시합니다.]
이 혹한의 설원을 내려다보고 있는 또 하나의 교도관이 등장했다.
이전의 교도관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적의가 내려꽂히는 기분이었다.
[5층의 교도관이 등반죄수와 그 동료들에게 일행을 떨어트려 놓은 것은 자신의 소행이라고 고합니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교도관장은 분명히 이전 층에서 내게 경고한 바 있다.
‘지금까지 교도관들이 당신에게 갖고 있는 태도는 흥미나 관심, 기껏해야 눈엣가시 정도로 표현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 말을 흘려넘겨서는 안 됐다.
‘교도관들은 죄수들을 그 정도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개미가 살인을 저지를 수 있을 정도의 이빨을 가졌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살충제를 준비할 수도 있다는 거죠.’
이제부터 만날 교도관들은 얼마든지 내 등반을 막아서기 위해 치사한 짓을 할 수 있다는 암시였던 것이다.
“첫인상부터 아주 재수 없는 교도관이군. 치졸하기 짝이 없어.”
[5층의 교도관이 자신은 결코 방심하지도, 등반죄수를 상대로 유희를 즐기려다 반격당하지도 않을 것이라 선포합니다.]
[5층의 교도관이 자신은 취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취해 등반죄수에게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형태의 죽음을 선사할 것이라 으름장을 놓습니다.]
나는 얼굴을 뒤덮는 눈송이들을 와이퍼처럼 쓸어내리며 대꾸했다.
“어디 두고 보자고. 내가 이 층의 시련을 통과해 층장의 열쇠를 거머쥐면 너도 어쩔 수 없이 화신체로 강림해야겠지? 그때도 그렇게 젠체할 수 있는지 말야.”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인벤토리에서 레나스를 해방시키는 일이었다.
“부르셨습니까, 관객님.”
“영하 20도는 될 것 같은 곳이야. 뼛속까지 추위가 파고는데, 넌 움직이는 데 무리 없어?”
레나스는 아랫배까지 차올라 있는 눈밭을 한 번 내려다보더니 신체의 무언가를 조작했다. 레나스의 허리춤이 붉게 달아오르더니 주변의 눈을 일거에 녹여버렸다.
“마정석의 출력으로 제 체온을 열기구 수준으로 올릴 수 있습니다. 저는 생물이 아니며 혈액도 없습니다. 혹한에 거동이 불편해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오토마타는 움직이는 인간형 난로도 될 수 있구나.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상황을 설명했다.
“다른 동료들이 주변에 있는지 알아봐 주겠어?”
눈을 감은 레나스가 몇 초의 시간 동안 탐지했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제 탐지 능력은 반경 3킬로미터까지 정확하게 잡아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근처에는 관객님 동료분의 신체반응이 포착되지 않는군요.”
눈보라 때문에 시야가 극도로 제한되고 있었다.
동서남북 어느 곳을 보더라도 흰색 천지. 우뚝 서 있는 레나스가 아니었다면 방향감각마저 상실되었을 것이다.
“괜찮아. 난 이번 층부터 친구들을 내 곁으로 소환할 수 있으니까.”
억지로 우릴 떨어트려 놓았다면 파천황의 권능으로 다시 불러들이면 그만이다. 다행히도 떨어진 동료의 숫자는 셋. 하루에 소환할 수 있는 한계도 셋.
[친구 제르비어스 폰타인을 근처로 소환합니다.]
권능을 사용한 뒤 나는 망토를 휘날리며 등장할 마왕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오지 않았고,
[친구가 소환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믿을 수 없는 메시지만이 되돌아왔다.
뭐라고? 어째서?
[친구 아스티나 류를 근처로 소환합니다.]
[친구가 소환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친구 캉이를 근처로 소환합니다.]
[친구가 소환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두 동료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서로 떨어진 이 상황이 생존에 불리하다는 것을 모를 리 없을 텐데 내 소환에 응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소환에 불응하고 있는 이유를 알아야 했다. 단체 텔레파시를 통해 동료들이 무사한지 파악하는 것 역시 급선무였다.
그런데 텔레파시 창이 뜨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메시지를 떠올리기만 하면 발동되는 이 권능이 발현되지 않았던 것이다.
‘무언가가 방해를 펴고 있는 건가?’
나는 황급히 인벤토리를 다시 열어 유용한 검색엔진 단탈리온을 꺼냈다.
아니, 정확히는 꺼내려 했다.
확장된 인벤토리가 눈앞에 보이고 단탈리온을 포착하는 데까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속으로 단탈리온을 ‘꺼내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마도서는 내게 이 사태의 전말을 알려줄 것이다.
그런데,
단탈리온을 꺼내고 싶지가 않았다.
‘뭐야, 이게?’
처음에는 마비독이나 봉쇄 마법 같은 것을 떠올렸으나 숨을 쉬는 것,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내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레나스, 내 옆으로 한 걸음만 와 줄래?”
“알겠습니다.”
내 말을 들은 레나스가 곁으로 바싹 다가왔다. 이제 추위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말을 하는 데에도 어떤 제약이나 금제는 느껴지지 않았다.
몇 번의 이런저런 시도 끝에 나는 내가 무엇에 당한 건지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레나스, 나를 데리고…….”
“네. 말씀하십시오.”
“아니야, 아무것도.”
원래 나는 ‘나를 데리고 이곳에서 벗어나 줘’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서술어를 완성하기 전에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다는 강력한 거부감에 사로잡혔다.
마치 가위에 눌린 기분이다.
일어나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가슴이 그걸 원하지 않는 상황. 생각과 의지가 따로 분리된 것 같은 기묘한 상태.
친구들이 내 소환에 응하지 않았던 것도,
단탈리온을 꺼내고 싶지 않아진 것도,
레나스에게 탈출을 명하고 싶지 않아진 것도 모두 한 가지 사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달아나고 싶지가 않아.’
쿠우우우우웅.
순간 지표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저 눈보라 너머에서 무언가 불온한 것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게 나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든 주박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 거란 기대를 할 수가 없었다.
저 무언가는 분명 나를 향해 다가올 것이다.
최악의 상황이다.
여기서 떠나지 않으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드는데도,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5층의 교도관 ‘저울추를 속이는 바늘’이 만족스럽게 웃습니다.]
[5층의 교도관이 다시 한 번 전합니다. 말했듯이 등반죄수는 끔찍하게 죽을 것이며…… 심지어 그것을 거부하겠다는 마음조차 먹지 못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