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지하실의 유령 (5)
[부족했기 때문이다.]
“무엇이 말인가요?”
[이 감옥이 탈옥수에게 마지막으로 요구하는 핏값. 그것이 짐에겐 부족했다.]
화룡도에서 올쿠레 켄타는 내게 말해준 적이 있다.
파죽지세로 감옥을 등반하며 그 누구도 밟지 못했던 9층을 최초로 등반했던 르팔타커스 시온. 결국 탈옥에 실패한 그는 다시 한 층 한 층 내려오며 ‘부족했다’는 말을 중얼거렸다고 했다.
그러곤 0층 대기실로 돌아가 자신의 손으로 심장을 꺼내어 으스러뜨리는 방법으로 자결했다.
감옥의 그 어떤 죄수도 9층에서 일어난 일을 알지 못했다.
“핏값이란 단어는 모호합니다, 르팔타커스. 더 자세히 말씀해주실 순 없습니까.”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나 9층에서 짐이 마주한 시련을 상세히 묘사하면 분명 방해가 일어날 터. 예를 들면 ■■■나 ■■ 같은 식으로.]
“……정보가 검열당하는군요.”
그래서 간접적인 단어로만 말해줄 수 있었던 것이다.
[짐은 9층에서 49일 동안 머물렀다. 이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네. 들은 적 있습니다. 그때 저는 생각했죠. 감옥 역사상 가장 강했던 전사가 수십 일을 싸웠음에도 극복하지 못했던 시련은 대체 뭘까 하고.”
[그래. 분명 짐은 그곳에서 시련과 마주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도전조차 하지 못했어. 짐에게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49일이나 걸린 것은 짐이 그것을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탈옥수의 시련에 참가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르팔타커스의 어조에는 지친 기색이 담겨 있었다.
기나긴 토너먼트를 이기고 최후까지 살아남은 생존자에게 주최 측이 우승 트로피를 숨기고 달아나면 비슷한 상황이 될까.
[그대의 종족은 무엇인가. 아마도 나와 같은 인간이거나 마인일 테지.]
“인간입니다.”
[그럴 수밖에. 그것은 짐의 유지를 잇는 죄수가 최하층인 화룡도에서부터 등반을 시작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짐작하겠는가.]
르팔타커스의 질문을 듣고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실은 오래전부터 짐작해온 바가 있었다.
이자가 내게 준 권능은 단순히 전투 능력을 함양시키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텔레파시의 권능으로 다른 죄수와 소통하고,
스킬을 빌려오는 권능으로 그 죄수의 소중함을 알게 하며,
순간이동의 권능으로 그 죄수를 잃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동료가 필요하다. 그것도 단순히 머릿수를 채운 동료가 아니라 고락을 함께 버티고 서로를 아끼는 진정한 친구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당신의 의도라고 생각했습니다.”
르팔타커스의 영체는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감옥 바깥에서도, 안에서도 짐에게는 친구라 할 수 있는 존재가 없었다. 뜻을 함께하는 동료조차 곁에 둔 적이 없었지.]
왜냐하면 필요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원시 인류가 문명을 이뤘던 이유는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늑대보다 강한 이빨도, 독수리의 날개도, 호랑이의 발톱도 없었던 인간이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서로 뭉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앞의 이 사내에겐 그럴 필요가 없었다. 늑대의 이빨과 독수리의 날개와 호랑이의 발톱을 갖고 태어나 버리는 바람에.
[함께 하는 친구의 소중함을 잊지 말도록. 그것이 그대에게 감옥 바깥의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게 해 줄 터이니.]
긴 침묵이 그와 나 사이를 채웠다.
이제 그만 돌아갈 시간인가, 싶었을 때 르팔타커스의 영체는 한 걸음 물러나 화톳불을 가리켰다.
[이 불꽃 안에서 타오르는 조각이 보이는가.]
얼마나 오랫동안 불꽃 안에 있었는지 벌겋게 달아오른 금속 조각이 장작 위에 올려져 있었다. 내 손바닥만 한 마름모꼴의 파편이.
[짐이 마지막까지 품고 있던 기원검의 파편이지. 그대가 다시 이곳에 돌아올 때엔 부디 이 파편을 회수할 수 있을 정도의 수집을 마친 후이길 바라네.]
“지금은 가져갈 수 없다는 말이군요.”
[무력과 지략, 그리고 불굴의 용기. 그대의 자질은 제법 훌륭하나 기원검 네메시스는 아직 판단을 유보하고 있군.]
더 분발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아마도 이 파편을 회수하려면 신체 능력을 더욱 갈고닦은 후, 기원검의 다른 파편들도 챙겨와야 하는 듯하다.
‘레벨이 모자라다는 뜻처럼 들리네.’
최소한 앞으로 3개의 층은 더 올라야 할 것 같다.
천마 설공과 뇌신 지드, 그리고 톱니바퀴의 여신 벨리오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8층.
그들처럼 신격에 오른 죄수들과 대등하게 싸우려면 내게도 강력한 무기가 있어야 한다.
여덟 대륙의 신을 죽인 신살검이라면 해볼 만한 싸움이 되겠지.
“다시 이곳에 올 타이밍은 어떻게 알 수 있죠?”
[그 칼자루가 그대에게 알려줄 것이다. 참고로 짐은 이 파편을 그대에게 맨입으로 넘겨줄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짐과 기원검이 그대를 시험할 것이다. 이 검의 마지막 주인이 이룬 업적. 그것을 넘볼 수 있는 정도의 그릇인지 판단하고…….]
처음으로 르팔타커스가 내게 살기 비슷한 것을 내뿜었다.
[짐을 실망시킨다면 그대로 죽어야겠지.]
나는 숨 쉬는 것을 잠깐 잊었다.
살갗이 녹아내릴 것 같은 압박감 때문이었다.
*
“역시 유령이 있었던 거군! 그렇지 않고서야 용사 네놈의 얼굴이 이렇게 해쓱해질 리가 없다. 못생긴 얼굴이 더 못생겨졌다!”
“맞아. 물기는 없는데 왜 비에 젖은 생쥐 같은 표정을 하고 있어?”
으음.
친구의 소중함을 잊지 말라고?
제르비어스와 아스티나의 반응을 보니 전우애가 쓰윽 사라지려고 하는데.
“캉이는 어디 있어?”
“나 여기 있어! 헤헤.”
구미호 소년은 창가에 등을 댄 채 씨익 웃고 있었다.
처음엔 내 무사귀환을 반겨주는 얼굴인 줄 알았는데 무언가가 더 있었다.
마치 재밌는 장난감을 숨겨두었다가 부모에게 자랑하고 싶어 드릉드릉한 얼굴.
“캉이야, 커텐으로 뭘 가리고 있는 거야?”
“형아를 깜짝 놀래켜주려고 준비한 거지롱. 준비는 됐어?”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캉이는 마술사처럼 엣헴거리더니 등 뒤의 커텐을 활짝 열어젖혔다.
아무리 대단한 것을 보여줘도 나는 놀라지 않을 작정이었다.
파천황 르팔타커스의 유령과 이제 막 독대를 끝낸 용사를 놀라게 할 것은 이 공간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뜨어어억?!”
하지만 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커텐 뒤에 숨겨져 있는 것은 40분의 1 크기 정도로 줄어든…… 변신합체로봇이었다.
“제, 제, 제트카이저어?”
가슴에 황금사자가 달린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이 내게로 철컹철컹 걸어왔다.
“내.주.먹.은.천.만.마.력.으.로.불.타.오.른.다.”
“으, 음성까지?”
입을 쩍 벌리고 놀란 나는 이내 곧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축소된 제트카이저가 이 층간 구역에 존재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것을 흉내 낼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뿐이다.
“레나스? 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거야. 깜짝 놀랬잖아.”
“캉이 관객님의 요청이셨습니다.”
“누나! 그것도 보여줘, 언능!”
곧 제트카이저의 몸통에 달린 사자가 아가리를 쩍하고 벌렸다. 그 안에서 뽑아낸 것은 황금색으로 빛나는 무적의 보검 제트칼리버였다.
변신 중인 레나스는 충실하게 대사를 내뱉었다.
“지구를 위협하는 사악한 괴물들이여. 이 제트칼리버로 그대들을 일.도.양.단. 해 주겠다!”
의욕은 좋았으나, 거기엔 혼이 실려 있지 않았다.
“나의 제트카이저는 그렇지 않아! 더 거칠게 외쳐야지. 자고로 용자물의 본질은 사나이의 가슴을 뜨겁게 불타오르도록 하는 열혈에 있…… 아, 아니다. 말려들면 곤란해.”
나와 레나스를 제외한 모두가 깔깔 웃었다.
“본래 형태로 돌아와, 레나스. 너무 정신 사나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사실 이 구동체의 설계는 무게 배분이 전혀 효율적이지 못하군요. 특히 하체 부분이 직육면체들의 결합이라 기동력을 해치고 있습니다.”
그거야 애들 보는 만화에 등장하는 로봇이니까. 피규어로 출시되었을 때 안정적으로 서 있으려면 하체가 넓적해야지,
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세계관이 혼동되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다들 잘 들어.”
레나스가 본래의 소녀 형태로 돌아오고 들떴던 분위기가 가라앉자 나는 지하실에서 르팔타커스의 영체와 나눈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제르비어스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수왕 르팔타커스 시온. 기연을 무작정 퍼주기만 하는 자는 아니었군. 파편을 미끼로 용사 너를 시험하겠다는 거 아니냐.”
“그래. 통과하지 못하면 죽는다는 표현을 쓴 걸 보면…… 목숨을 걸어야 할 거야.”
“형아, 죽으면 안 되잖아. 지하실에 안 내려가면 안 돼?”
캉이의 걱정스러운 반응에 아스티나가 덧붙였다.
“그래. 나도 캉이의 생각과 비슷해. 기원검이라는 무기가 정확히 어떤 가치를 가졌는지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리스크가 너무 큰 것 같아.”
어떤 지뢰가 숨어 있는지 알 수 없다면 그냥 지나치는 것도 방법이다,
라는 것이 아스티나의 조언이었다.
아스티나는 원래 4층에서 폭류천마검을 갖길 원했으나 그 때문에 내가 위험해지자 ‘검은 포기할 수 있다’고 태도를 바꾸었던 장본인이다.
분명 아스티나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게임 속에서 보물상자와 퀘스트 마크가 뜨면 굶주린 동물처럼 달려들었던 습성이 여전히 내 사고회로를 지배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하면 삼월초원에서 연거푸 동료들을 눈앞에서 잃어야 했던 아스티나의 트라우마가 제대로 된 판단을 못 하도록 눈을 가리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일단 동료들을 안심시키기로 했다.
“당장 닥쳐올 일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다들 잊은 모양인데 나는 삼월초원에서 설공을 쓰러트리고 목숨을 한 개 더 쟁취해낸 몸이잖아. 르팔타커스의 시험에 도전하다가 죽어도 한 번의 기회가 더 있는 거야.”
“그거야 네가 교도관장의 코인을 그 순간까지 사용하지 않고 지켜냈을 때의 이야기겠지.”
“……알았어. 일단 무조건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짓은 안 할 테니까 걱정 마.”
분명 기원검 네메시르를 되찾는 건 내게 중요한 과제가 됐다. 8층에 오르는 순간 벨리오나와 그녀의 세력이 내게 싸움을 걸어올 테니까. 그에 대항하려면 이쪽도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다.
‘벨리오나와 싸우지 않고 넘겨준다는 방법도 있어. 하지만 맞서 싸워서 오히려 벨리오나가 가진 파편을 얻어내야 할 경우엔 이야기가 달라지지.’
전부 내어주거나,
전부 가져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직 찾아오지 않은 먼 미래를 지나치게 걱정하다가는 몸이 둔해진다.
“기원검의 파편을 염두에 두겠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부차적인 문제야. 최우선 목표는 탈옥. 이 푸르가토리움을 벗어나는 거니까.”
우리는 여기까지 이야기를 정리하기로 한 채 층간 구역을 떠날 준비를 마쳤다.
“아참, 이걸 놓칠 뻔했군.”
나는 르팔타커스의 유해가 담겨 있을 냉장고를 향해 걸어갔다.
문을 열자 여러 번 겪었던 냉기가 살갗을 간지럽혔다.
지금까지 냉장고에 있었던 유해들은 손가락, 귀, 발이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번에 냉동고 안에 놓여 있는 건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붉은 구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