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149화 (149/300)

#149. 지하실의 유령 (4)

한적한 동네에 지어진 자그마한 주택.

나는 이 집에서 자그마치 10년을 살았었다.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운 사소한 단점을 제외하면 아늑한 보금자리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하실에 관한 기억은 없어.’

무언가 착각한 것이 아니냐고 묻자 레나스는 주황색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고개를 저었다.

“제게 착각할 수 있는 기능은 탑재돼 있지 않습니다. 분명히 이 공간 아래엔 은폐된 공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레나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리버스 그래비티를 구사해 식탁과 의자, 카페트를 위로 들어올리자 매끈한 대리석이 드러났다. 대한민국의 가정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재질.

맨홀 뚜껑처럼 생긴 금속판에는 익숙한 문양이 그려져 있다.

용의 목을 앞발로 짓누르고 있는 거대한 사자.

“르팔타커스 시온의 문장.”

이로써 확실해졌다. 이 층간 구역의 지하에는 파천황 르팔타커스가 남겨놓은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이곳에 들르는 것은 벌써 4번째이건만 숨겨진 공간이 존재할 것이라는 발상은 떠올리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보다 이 집의 구석구석을 잘 알고 있다 생각했기 때문에.

“대체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던 걸까?”

레나스를 동료로 영입하지 못했더라면 한참 뒤에나 이 공간에 대해서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끝끝내 알지 못하고 지나쳤을 수도.

“어디 지하실에 유령이 살고 있는지 한번 볼까. 흐음!”

콰아아아아앙!

오른쪽 발에 천근추의 묘리를 실어 내리찍었다. 레나스의 머리카락이 거칠게 휘날릴 정도의 충격파가 일었으나 뚜껑엔 작은 흠집도 나지 않았다.

“관객님들 중에선 이 장치를 물리력으로 개봉할 수 있는 분은 안 계십니다.”

“……나도 큰 기대는 안 했어.”

금속 뚜껑의 중앙, 그러니까 사자의 아가리 부분에는 동그란 홈이 파여있었다.

“여기에 뭔가를 꽂으면 열릴 것 같은데 말야.”

“구조를 파악해보니 관객님께서 갖고 있는 네메시스란 검의 칼자루가 빈 홈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인벤토리에서 기원검의 파편을 뽑아 홈에 꽂자 반응이 왔다.

그그그긍.

뚜껑이 열리고 드러난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그리고 철제 사다리였다.

그 안에서 익숙한 존재감이 풍겨왔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소란을 감지한 아스티나와 제르비어스가 다가왔다. 사정을 설명하자 둘의 표정 역시 사뭇 진지해졌다.

다만 야수의 예민한 감각을 갖고 있는 캉이는 2층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며 중얼거렸다.

“설마 거길 내려갈려고? 느낌이 안 좋아. 뭔가가 형아를 잡아먹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유혹하듯 내게 입을 벌리고 있는 지하실의 입구.

유익한 조언을 줄 수 있는 단탈리온을 꺼내 들었다.

- 용사님께 해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 대상은 기원검의 소지자에 국한되어 있군요. 용사님을 제외한 다른 분들이 지하실에 들어서면 목숨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결국 나 혼자 오란 얘기군.

으스스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고 정체불명의 장소를 발아래 둔 채 계속 등반을 이어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금방 갔다올게.”

나는 사다리에 발을 올렸다.

*

바닥에 발이 닿는 순간 서늘한 공기가 나를 반겼다.

“대체 얼마나 내려온 거야?”

머리 위를 보자 내가 몸을 들이민 구멍은 어느덧 엄지손톱보다도 작아져 있었다.

주변엔 아무런 불빛도 없었는데 그 점이 내게 기묘한 위화감을 가져다 주었다.

아무런 광원이 없는 장소라면 사다리 또한 보이지 않아야 정상인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실이 아닌 누군가가 서툴게 붓질한 그림 속에 던져진 기분이었다.

[그대의 직감이 옳다. 이곳은 짐의 조각난 심상 세계 중 일부이니까.]

어두운 공간 내부에서 귀에 익은 울림이 전달돼 왔다.

그것은 0층 대기실에서 내가 접촉한 어떤 죄수의 것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르팔타커스? 당신인가요.”

화륵.

매캐한 냄새와 함께 작은 화톳불이 기지개를 켰다. 그제야 비로소 방 안의 풍경을 온전하게 볼 수 있었다.

[그렇다. 짐의 이름은 르팔타커스 시온. 그대가 이곳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천운이 여러 번 겹쳐야만 가능한 일일 터. 징표를 가진 자가 짐의 애병을 회수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니.]

“저와 대화를 나눌 수 있으신 건가요?”

[완벽한 소통이라 할 수는 없겠군. 여전히 짐에게는 그대의 존재감이 미약하게 느껴지거든. 그대에겐 짐이 또렷하게 보이는가?]

“아니오. 홀로그램…… 아니, 유령처럼 희미하게 윤곽만 알아볼 수 있습니다. 화톳불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계시군요.”

내 대꾸에 르팔타커스의 영체는 턱을 긁었다.

아니, 머리를 어루만진 건가. 우연히 찍힌 심령사진처럼 흐릿하다.

[그렇다면 그대의 여정은 이제 겨우 반환점을 돌았을 뿐이겠군. 푸르가토리움의 4층이나 5층 정도인가.]

“정확히는 그 중간입니다.”

[그러한가. 그렇다면 여전히 짐의 숙원은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는 거군.]

동그란 이글루의 내부처럼 보이는 작은 방은 내가 묵던 고시원의 단칸방보다 조금 넓은 정도였다. 위대한 황제가 기거하던 장소라고 하기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가까이 오라. 층간 구역은 시간이 흐름이 유실되고 매몰된 곳. 짐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을 터이니 지금이 그 적기라 할 수 있겠지.]

“여기는 어떤 곳입니까?”

[층간 구역은 그 죄수가 유년기에 머물던 기억을 발췌해서 만들어진다. 이곳은 짐이 검투장의 노예로 붙잡혀 있던 시절의 숙소.]

아, 그렇다면 이렇게 작고 허름한 사연이 설명된다. 저 사다리 위의 공간이 내 유년기의 2층집인 이유도.

[내 반려를 보여줄 수 있겠는가.]

인벤토리에서 네메시스의 칼자루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르팔타커스의 영체에서 웅혼한 기상이 흘러넘치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은 칼자루뿐이로군.]

나는 8층의 죄수 벨리오나와의 만남을 그에게 이야기했다. 기원검의 파편을 모아서 8층까지 올라와 주길 바라고 내게 칼자루를 넘긴 세력이 있다는 것 또한.

[짐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난 일은 아니로다. 네메시스의 별호는 기원검. 말 그대로 소지자의 갈망을 현실로 만들어줄 수 있을 만큼의 힘을 품고 있지. 신을 죽이고 싶다고 바란다면 그것조차 가능할 정도로.]

화톳불은 줄어들었다가 커졌다가 하며 작은 방 안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르팔타커스의 음성은 계속 이어졌다.

[그래. 모든 것은 이 작은 방 안에서 시작되었다. 검투장의 노예에 불과했던 한 소년이 지고의 존재가 빚은 검 네메시스를 쟁취하게 되는 긴 여정이었다.]

결코 짧지 않은 이야기가 그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만전불패.

르팔타커스는 불과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 검투장의 챔피언이 되었고 그 뒤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채 무력의 정점에 올랐다.

검투사가 쥔 허름한 단검은 곧 병사의 투창으로 바뀌었고, 장군이 쓴 투구가 황제의 면류관으로 탈바꿈되었다.

그 과정에서 르팔타커스 시온은 흑마법사 셋의 목을 쳤고, 다섯 마리의 용을 무릎 꿇렸으며 결국에는 여덟 대륙을 관장하는 팔신(八神)의 협공마저 이겨냈다.

대하 서사시를 몇 편이나 집필할 수 있을 만큼의 영웅담이었으나 정작 본인은 커다란 감흥 없이 덤덤히 과거를 되짚어나갈 뿐이었다.

한 세계의 가장 밑바닥에서 오를 수 있는 최고점까지 오른 그가 마지막에 쥔 무기.

그게 바로 기원검 네메시스였던 것이다.

[짐의 등 뒤에 있는 문이 보이는가.]

“잘 보입니다.”

[저곳은 내가 첫 살인을 저지른 검투장으로 이어지는 문.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의 전사와 목숨을 걸고 싸워야만 했다. 그리고 수천의 관중들이 그것을 보며 오락을 즐겼지. 술과 고기를 뜯으면서.]

감정은 빛바랜 것인가. 아니면 내다보기 어려울 만큼 깊게 쌓여서 드러나지 않는 것인가.

[우리는 무려 두 시간에 걸쳐 혈전을 벌였다. 그 전사는 결코 약하지 않았었다. 이후 목숨을 위협했던 수만 번의 전투를 다 따져봐도 그 순간만큼 짐이 죽음에 가까웠던 순간은 없었다.]

나는 르팔타커스의 권능을 사용하고 있다. 화룡도에서 차카 도기노브와 정식 죄수가 되기 위해 자리 쟁탈전을 펼쳤던 순간부터 줄곧 그가 보태준 힘은 여러 번 내 목숨을 살려주었다.

그중에서도 만전불패의 체술은 르팔타커스의 발자취가 그대로 담겨 있는 스킬 이상의 스킬이었다.

이자의 체술이 아니었다면 화룡도의 마그마 볼에서 우승할 수도, 삼월초원의 마교서열전에서 살아남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천마와 마녀가 알려주는 무공과 마법을 내 것으로 흡수하는 것조차 벅찼을 것이다. 용사의 육체가 하드웨어라면 르팔타커스의 체술이 소프트웨어였던 것이다.

하지만 만 번의 싸움을 승리로 가져다준 그 체술조차 태어나자마자 완성될 수는 없는 이야기.

[말은 통하지 않아도 눈빛이 있지. 그 이국의 전사는 전쟁에서 패해 끌려온 백전노장이었다. 왼쪽 다리는 절고 있었고 멀쩡한 손가락은 일곱 개뿐이었어. 그럼에도 열두 살 소년의 심장을 검으로 찌르는 것에는 아무런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싸움이 길어지면서 르팔타커스는 상대의 동작에서 어떤 의지를 읽어낼 수 있었다.

[그는 절망하고 있었다. 자신이 나를 쓰러트린다 한들 그 검투장의 밑바닥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고국으로 돌아가 그리웠던 고향의 터에 묻힐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검을 맞대는 순간순간에 그것이 느껴지더군.]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르팔타커스는 상대의 일격을 물리치고 치명타를 가하면서 한 가지를 확신했다.

상대가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았다는 것을.

그리고 본인은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이 나락의 공간을 르팔타커스라면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느꼈다는 것을.

그래서 마지막 검격 교환의 순간에 힘을 느슨하게 뺐다는 것을.

놀라운 재능과 감각이 그런 미묘한 감정마저도 명징하게 깨닫게 만든 것이다.

[그때 짐의 검에 목이 찔려 죽어가는 전사를 내려다보며 품었던 결심. 그것이 무엇인지 알겠는가.]

“……모르겠습니다.”

[그 이름 모를 전사의 핏값을 묻겠다는 생각이었다. 짐을 지켜보던 그 숱한 관중들, 그 관중들의 위에 있는 국가의 제후들, 더 나아가 피조물의 아귀다툼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신들마저도 그 핏값의 대금 장부에서 자유로울 수 없도록 만들겠다 다짐했노라.]

한 소년이 피웅덩이에서 느낀 부조리.

약육강식의 사슬을 끊기 위해 스스로 정점에 오른 사내.

[이 감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짐은 최하층인 화룡도에서부터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등반을 하였지. 누군가 짐을 내려다본다는 감각을 도무지 견딜 수 없어서였어.]

상대했던 검투사들이 차원감옥의 죄수로 바뀌었을 뿐.

고기와 술을 마시며 내려다보던 귀족이 교도관으로 대치되었을 뿐.

‘천장이 존재하면 깨부순다’는 르팔타커스의 행동원리는 한결같았던 것이다.

[그래. 성공할 뻔하였지. 분명 닿을 수 있었어.]

그러나 꼭대기인 9층에서 이자는 실패했다.

“르팔타커스 시온.”

나는 오랫동안 궁금해 왔던 그것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감옥의 9층에서 당신은 무엇과 맞닥뜨린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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