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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145화 (145/300)

#145. 뛰는 놈과 나는 놈 (5)

“……!”

노래하는 레나스의 목소리는 읊조리는 듯했다.

가수의 목소리를 증폭시킬 수 있게 만들어진 오페라 극장과 달리 이곳은 드넓고도 삭막한 공장.

그랬기에 목소리를 높일 필요는 없다.

게다가 지금 레나스에겐 소리를 키울 수 있는 몸통, 정확히는 폐의 역할을 할 펌프마저 없었다. 오직 머리만 남은 채 주인의 품에 다소곳이 안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레나스의 노랫가락은 모두의 귀를 사로잡고 있었다.

나와 동료들은 사니릭투스와 레나스 주변에 캠프파이어를 하듯 둥그렇게 앉아 있었다.

“어릴 때로 돌아간 기분이야.”

무릎을 양팔로 감싼 채 턱을 괴고 있는 아스티나의 소감이었다.

신묘한 일이었다.

레나스의 금속 입술을 타고 흘러나오는 자장가에는 아무런 가사가 없었다. 다만 음율을 전달하는 허밍에 가까운 무언가. 음미할 내용이랄 것이 없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따스하고 충만한 것이 나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골목길.

아이들이 모두 떠나고 텅 빈 놀이터엔 올라탄 이 없는 시소가 저녁 바람에 삐걱댄다.

상희는 그 일정한 박자에 귀를 기울이는 걸 좋아했다.

모래밭 위에 서서 상희를 업고 있으면 오른쪽 어깨에 쌔근쌔근 잠드는 그 애의 숨결이 느껴졌다. 한없이 연약한 생명.

세상에 오로지 우리 둘만 남겨진 것 같은 평화.

“……!”

어째서 레나스의 자장가를 들으며 그때 그 순간이 떠오르는 건지 모르겠다.

제르비어스와 캉이 역시 눈을 감고 레나스의 허밍에 귀만을 열고 있었다. 녀석들도 각자의 삶에서 그리웠던 어떤 한 순간으로 돌아가 있는 게 않을까.

“아아, 레나스야. 이것을 보여주려는 거냐.”

순간 내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황금색 갈대밭이었다.

나는 이런 곳을 걸었던 적이 없다. 아니, 것보다 대한민국에는 이런 풍경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것은 내 기억에서 뽑혀 나온 그림이 아니다.

레나스와 사니릭투스가 함께 했던 여행길 중 한 대목일 것이다.

“형아, 여긴 어디야?”

들판 한가운데서 하얀색 귀가 쫑긋하고 올라왔다. 캉이의 키는 작았고, 갈대가 녀석의 턱 밑까지 자라나 있었기 때문이다.

“저들의 추억이 이 공간에 겹쳐지는 거야. 그냥 제자리에서 지켜보자.”

사르락.

제르비어스는 황홀하게 매료된 듯이 갈대들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이것은 현존하지 않는 환상. 그러니 마왕의 손길이 닿는다 해도 바스러지지 않는 갈대들이 하늘거리고 있었다.

“저길 봐.”

내 옆에 서 있던 아스티나가 손가락을 들어 먼발치를 가리켰다.

어린 소년이 자신의 키와 비슷한 소녀와 함께 갈대밭을 헤치며 걷고 있었다.

소년은 그룬덴 사니릭투스.

소녀는 그의 오토마타 레나스.

“주인님, 걸음걸이가 느려지고 있습니다. 혹시 다리가 불편하신 겁니까?”

“아니. 그냥 이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천천히 걷고 있는 거야. 인간의 손이 전혀 닿지 않았잖아. 이 대지 자체가 마치 수줍게 잠들어 있는 여신 같은 느낌이야. 도망치듯 서커스단을 빠져나왔지만…… 세상에는 이런 풍경도 있구나.”

사니릭투스의 음성은 앳되었다.

총명한 두뇌로 세상을 놀라게 할 만큼 뛰어난 오토마타를 개발한 천재 연금술사라기보다는 물레방앗간에서 연모하는 소녀를 기다리는 것이 더 잘 어울릴 만큼.

차카앙.

레나스의 팔이 늘어나더니 우산과 같은 장막을 사니릭투스 위에 펼쳐 보였다.

“응? 이게 뭐야, 레나스.”

“공기 중의 습도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곧 비가 내릴 것 같군요.”

“내가 비를 맞지 않도록 우산을 펴주는 거야? 아무런 명령도 하지 않았는데. 넌 참 다정하구나.”

“주인님의 표현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제겐 감정을 느끼는 기능이 탑재돼 있지 않으니까요. 주인님이 비를 맞아 감기를 비롯한 질병에 걸리면 폐의 기능이 악화될 가능성을 연산했을 뿐입니다.”

“……결국 잔소리라는 거네.”

“주인님께서 건강하게 오래 사시는 것이 제 작동 목적에 부합하니까요.”

“알았어. 오래 살아보도록 할게.”

멀리 떨어져서 관찰하는 것인데도 둘의 목소리는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또렷했다.

게다가 레나스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으나 사니릭투스는 그런 소녀의 얼굴을 힐끗 보며 흐뭇해하고 있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그래야 네 잔소리를 오래 들을 수 있을 테니까.”

곧 레나스의 예측대로 하늘엔 먹구름이 끼었다.

그 첫 빗방울이 레나스가 만든 우산에 닿는 순간,

환상은 사라졌다.

*

톡.

그룬덴 사니릭투스의 감긴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 나왔다.

그것이 레나스의 오른쪽 볼에 떨어졌다. 자연히 노래는 멈추었고, 모두가 숨을 죽이고 관객으로서 다음 순간을 기다렸다.

“고맙다, 레나스야. 이제 편안히 잠들 수 있을 것 같구나.”

“주인님, 이제 다시는 돌아오실 수 없는 겁니까?”

“그러하겠지. 하지만 괜찮느니라. 남겨진 미련은 믿음직한 누군가에게 넘길 수 있었으니.”

사니릭투스는 푸르가토리움의 죄수로 붙잡혀 들어와 교도관의 임무를 넘겨받았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두 번 다시 윤회의 고리 안에 포함될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다.

그러니 사니릭투스의 영혼에 있어 진정한 종말.

“주인님,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게 새로운 명령을 내려주세요.”

“이 마지막 노래를 끝으로 너는 만들어진 소임을 다했느니라. 그러니…….”

사니릭투스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레나스의 머리를 넘겨주었다.

“앞으로는 자유롭게 살거라. 먼 여정이 되겠지만…… 언젠가는 너의 몸에 영혼이 깃들 수 있는 그날이 올 때까지.”

사니릭투스의 흐린 눈이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나를 찾는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의 입이 열렸다.

“등반죄수여, 그대가 해 준 일에 대해 뭐라 감사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구려.”

“……그냥 그러고 싶었을 뿐이야.”

“다음 생에서 만나면 친구가 되자고 말하고 싶으나 그럴 수는 없겠구려.”

사니릭투스의 육체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붕괴는 발가락 끝에서부터 시작했다. 마치 빠른 속도로 풍화되는 것처럼 노구의 몸이 소멸해 나갔다.

“고맙소이다. 앞으로 남은 여정에서 그대가 내게 베푼 자비를 보답받을 수 있기를 바라겠소.”

더 이상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마지막까지 남겨져 있던 사니릭투스의 무릎마저 스르륵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레나스의 머리는 바닥에 떨궈지지 않았다. 그 직전에 내 손바닥이 그것을 받쳤기 때문이다.

나는 행여 깨트릴세라 조심스럽게 그것을 품에 안고는 레나스의 몸통에게로 돌아갔다. 아론다이트에 가슴이 뚫려 옴짝달싹 못 하고 있는 인형에게로.

“원상복구시키려는 거야? 위험하지 않을까.”

아스티나가 따라붙으며 말했다.

“괜찮아. 다 생각이 있으니까.”

레나스의 몸통에 얼굴을 붙여준 후 나는 아론다이트의 검신에 손을 올렸다.

“아이템 수납.”

성검은 내 인벤토리 안으로 역소환되었고, 비틀거리며 몇 걸음 내딛던 레나스가 똑바로 섰다.

나를 바라보는 오토마타의 얼굴엔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날 공격할 거야, 레나스?”

“아니오. 이제 당신을 쓰러트린다 한들 주인님의 영면이 번복되는 일은 없으니까요.”

“네 입장에선 내가 원망스럽겠지.”

“그것 또한 아닙니다. 원망은 감정의 한 종류이며 제게 그런 기능은 없으니까요.”

“……사니릭투스는 죽고 싶어했어. 그것이 네 손에 수많은 인간의 피를 묻히게 한 업보에 대한 속죄라 생각했을 거야.”

그리고 오토마타를 자유로워지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나는 사니릭투스의 안배에서 그의 의지를 읽어내고 그것을 이용했을 뿐이다.

“이제부터 어쩔 계획이야, 레나스?”

“아무런 계획이 없습니다. 다시 오페라 무대에 돌아가는 일도 없을 겁니다. 제 노래를 들려줄 주인님이 없으니까요.”

자신의 말대로 레나스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 나를 죽일 기세로 달려들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골목길에 버려진 봉제인형처럼.

나는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나는 탈옥을 목표로 하는 등반죄수야. 내 여정에 함께하지 않겠어?”

에메랄드 빛 눈동자의 초점이 나를 향해 맞춰졌다.

“거절합니다.”

“나와 친구가 되는 건 어때?”

“저는 입력된 목적으로만 기동하는 자동인형입니다. 그중에 인간과 친구를 맺는 기능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역시 이런 방법으론 안 되는 건가.”

연거푸 거절당하는 내 모습을 지켜보던 제르비어스가 혀를 찼다.

“포기해라, 용사야. 저 소녀의 강력함을 탐내는 게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만…… 무슨 수로 우리의 등반에 데려가겠다는 거냐.”

“뛰어난 전력이기 때문에 이 애를 데려가려는 것만은 아니야. 사니릭투스와 약속했기 때문이기도 해.”

결국 나는 마지막으로 생각해둔 한 수를 던져보기로 했다.

물론 성공확률은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히 이것이 레나스를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터였다.

“캉이야, 잠깐 이리로 와 볼래?”

“어? 나?”

쪼르르 내게 다가온 캉이의 어깨를 짚었다.

“캉이야, 너는 어때? 이 오토마타 누나를 여기 혼자 남겨두고 싶니?”

구미호 소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심하지만 분명한 동작으로.

“그래. 캉이, 네 민감한 귀가 레나스의 노래를 멀리서 알아채지 못했더라면 우린 결코 여기까지 올 일이 없었겠지.”

캉이는 오페라 극장에서 레나스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그녀를 선망하고 동경해 왔다.

그러니 실타래가 끊어진 인형을 다시 일어서게 만들 수 있는 건 내가 아니라 이 소년이다.

“레나스, 전에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던 거 기억해?”

“……한 사람만을 위한 세레나데에 도전하셨을 때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여러분은 이미 그때 답을 말씀하셨고 그것은 모두 오답처리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중 한 명은 유일하게 그때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어. 그러니 캉이에게는 아직 도전자 자격이 남아 있는 거야. 맞지?”

그제야 레나스의 고개가 살짝 아래로 움직여 캉이를 내려다보았다.

“관객님의 말씀은 정당합니다. 어린 관객님. 이름을 알려주시겠습니까?”

“어어…… 내 이름은 캉이야, 누나.”

“캉이 관객님. 도전하시겠습니까?”

캉이의 어깨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제대로 된 답을 내지 못하면 레나스와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날려버린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나는 그런 아이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괜찮아. 나는 널 믿어, 캉이야. 우리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이 문제로 고민해 왔잖아.”

“형아, 혹시 아까 그 할아버지한테 대답을 들은 거야?”

“아니. 사니릭투스는 그런 건 말해주지 않았어. 그건 우리 힘으로 알아내야 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형아.”

“괜찮아. 네가 생각하는 답을 레나스에게 말해보렴. 그러면 돼.”

가까스로 용기를 낸 캉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오토마타의 입이 스르륵 열렸다.

“문제를 내겠습니다. 뛰는 놈이 나는 놈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르비어스와 아스티나의 표정이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물론 나 역시 캉이가 가진 답이 무언지 모른다.

“뛰는 놈이 나는 놈에게 부, 부탁을 해요. 날개를 빌려달라고. 그래서 사이좋게 함께 날면 되는 거예요.”

그것은 그야말로 천진무구한 대답.

감옥의 층을 오르기 위해 투쟁만을 거듭해 온 등반죄수들은 쉽사리 떠올릴 수 없는 동심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였다.

영겁에 가까운 찰나가 흐르고 난 뒤.

레나스의 눈빛에서 광채가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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