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144화 (144/300)

#144. 뛰는 놈과 나는 놈 (4)

또 하나의 기억.

그리운 이와의 치열했던 한순간.

‘이번 수는 좋았느니라. 제법 허초라는 것에 대한 감각을 익힌 모양새. 그것이 본좌를 흐뭇하게 하는구나.’

‘하지만 사부님. 헥헥, 그것까지 다 막아내셨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 겁니까. 제 머릿속에 들어와 계시기라도 한 거예요?’

‘무인이 서로 칼을 맞댄다는 것은 말 그대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비유적인 표현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일정 단계에 넘어서면 상대가 온몸으로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지. 동공이 향하는 시선, 팔꿈치의 각도, 더 나아가서 기를 운용하는 흐름까지. 그 모든 것에 다음 수에 대한 묘리가 담겨 있느니라.’

‘그런 걸 싸우면서 다 파악하신단 말씀입니까?’

‘네놈과 본좌의 격차가 이만큼 크니 내 칼의 소리는 너에게 희미한 속삭임으로 들릴 것이오, 거꾸로 본좌에게는 네 칼의 소리가 쩌렁쩌렁한 사자후처럼 또렷하다.’

‘저 역시 갈고 닦으면 스승님처럼 상대의 다음 수를 완벽하게 읽어낼 수 있는 건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노라. 하나 무의 길은 드넓고 끝이 없는 법. 본좌의 별호에 ‘무극’이라는 칭호를 붙인 것은 나 자신이 무의 끝에 다다랐다는 뜻이 아니니라. 끝이 없는 무의 길을 탐구하겠다는 원념에 가깝지.’

‘자신의 모든 수를 읽어내는 상대. 그 상대마저도 쓰러트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무념검(無念劍).’

‘무념검이요?’

‘그렇다. 찌르되 찌르지 않는다. 베지 않겠다 마음 먹고 베어낸다. 모든 집념으로부터 초탈한 자가 텅 빈 마음으로 찔러오는 검. 그것이 무념검. 천리안을 가진 상대마저도 쓰러트릴 수 있는 경지로다.’

‘죽일 생각 없이 죽인다…… 저에겐 선문답처럼 들립니다.’

‘허허. 당연히 그럴 터이지.’

‘스승님, 그렇다면 한 번 보여주십시오. 그 무념검이라는 걸요.’

‘…….’

‘스승님? 어찌해서 검을 거두고 돌아서시는 겁니까?’

‘나도 못 하니까, 이놈아. 그것은 아마 설공이라 하더라도 닿지 못한 지고의 경지일 것이다. 그냥 그런 게 있다는 것만 알아둬라.’

‘스승님? 왜 그렇게 빨리 가십니까. 같이 가요!’

*

천마 류운학은 내게 무념검이라는 경지를 알려 주었다.

만약 실존하는지도 알 수 없는 그 무념검이라는 경지를 구사할 수 있었다면 내 모든 움직임을 연산하고 예측하는 오토마타 레나스를 손쉽게 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레나스는 가만히 선 채로 내 검에 꿰뚫렸겠지.

‘하지만 그런 꿈의 경지를 당장 이뤄내지 못했다 해서 포기할 수는 없는 거잖아?’

그래서 나는 평소처럼 전략을 짰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내가 가진 무기들을 모조리 뒤져내, 이 순간 끌어낼 수 있는 최고의 수를 내밀어보는 것이다.

그 결과 나는 레나스의 팔을 잘라내는 데 성공했다.

[4층의 교도관이 방금 벌어진 사태에 경악합니다.]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정적.

그도 그럴 것이 아무런 전조 없이 빈 공간에서 등장한 아론다이트가 오토마타의 일부를 잘라내 버린 것이다.

비틀거리다가 다시 자세를 바로잡은 레나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연산을…… 할 수 없어?”

싸움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유효타를 넣은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연산할 수 없을 거다, 강철 아가씨.”

왜냐하면…… 나도 저 성검이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르거든.

워핑(Warping)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단계는 점멸을 끝내는 지점의 좌표를 섬세하게 계산하는 일이다. 처음 참월의 마녀로부터 중력 마법을 배웠을 때 내가 가장 고생했던 부분이다.

“너와 싸우는 건 가위바위보를 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아. 보통의 그것과 차이가 있다면 내가 무엇을 낼지 떠올리는 순간 거의 동시에 너도 그걸 알아차린다는 거지.”

나는 레나스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이제 우리 둘의 거리는 20여 미터에 불과하다.

단 한 번의 돌진으로 서로의 목숨을 꿰뚫을 수 있는 거리.

하지만 나는 여기서 더 접근할 생각이 없었고, 레나스는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내 다음 수가 뭔지 모르니까.

“그래서 나는 내가 가위를 낼지, 바위를 낼지 나 자신도 모르도록 덮어버린 거야.”

중력 마법의 순간 이동 원리. 그중에서도 핵심이 되는 것은 바로 엄청난 수준의 좌표 계산이다.

공간을 휘게 만들어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게 되면 거리가 무력해진다. 상대의 허를 찔러 빈 공간에 출현하여 싸우는 것이다.

처음에 이 술법을 익혔을 때는 완전히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왜냐하면 ‘워핑’을 익혀서 나오는 순간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시각정보가 한꺼번에 바뀌어 버리니 뇌가 시커멓게 타버리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스스로를 포탈에 밀어 넣을 때마다 쏟아지는 감각 정보의 홍수. 그 안에서 상대의 공격궤도까지 예상해서 반격하는 것.

마치 열 개의 마우스를 동시에 움직여서 열 개의 유닛을 동시조종해야 하는 게임의 난이도와 비슷하달까.

그만큼 ‘워핑’의 응용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다행히 나는 감각에 의존해 길을 찾았고, 나중엔 ‘천마군림보’와 융합해 무영보라는 스킬을 새로 만들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 감각을 찾기 전엔 난리도 아니었지.’

워핑을 마스터하기 전엔 엉뚱한 곳에서 튀어나와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벽 앞에서 튀어나와 콧잔등이 박살 난 적도 있었다.

나는 일부러 내 자신을 그 시절의 ‘미숙한 상태’도 되돌렸다. 최신 버전이 먹히지 않을 때 이전 버전의 소프트웨어로 롤백하는 것처럼.

꽈아아아아앙!

나와 레나스의 머리 위로 돌무더기가 이슬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아론다이트가 이번엔 천장에 꽂혀 버린 것이다.

러시안 룰렛에선 빈칸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계속 방아쇠를 당길 생각이었다.

내 지휘에 따라 아론다이트는 다시 천장에서 뽑혀져 나와 포탈 속으로 들어갔다.

레나스는 아예 눈을 감은 채 계산에 들어갔다. 시각정보를 차단하면서까지 연산의 효율을 높이려는 것이다.

“안 될걸. 세상엔 미리 계산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걸 배워야지.”

포탈의 출입구가 어디에 생성될지는 완전한 랜덤이다.

말 그대로 무작위. 그 무한의 가능성을 적게 좁히는 것이 워핑의 본질이었다.

거꾸로 말해서 좁히지 않고서는 써먹을 수 없는 기술이 바로 워핑이었다.

꽈아아아아앙!

무언가가 내 볼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질주하는 성검이 내 등 뒤에 충돌하는 것이 느껴졌다.

멀찍이서 지켜보던 아스티나가 귓속말로 호통을 쳤다.

- 동귀어진 아니라며, 이 멍청아! 워핑은 시전자를 중심으로 펼쳐져. 그 말은 다음번에 꼬챙이 신세가 되는 게 너일 수도 있다는 거야!

- 맞아. 패를 뒤집지도 않고 포커를 치는 셈이니, 당연히 내가 질 수도 있지.

- 네 목숨을 고작 우연에 맡기겠다고? 지금 그걸 비장의 수라고 보여주고 있는 거야? 캉이가 지켜보는 앞에서 자살할 셈이야?

- 아니야. 지켜봐. 끝의 끝에 서 있는 건 레나스가 아니라 나라는 걸 보여줄 테니.

잘려나간 레나스의 왼팔이 수복되고 있었다. 손가락을 끼릭끼릭 움직여 본 오토마타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전보다 훨씬 살벌하게 나를 노려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덤벼들지 못하겠지, 레나스?”

“…….”

“너는 내 스킬인 비천성검의 위력을 맞아보지도 않고 파악했어. 그러니 받아친다는 선택을 하지 않고 오롯이 피해 다니기만 했지. 반면에 캉이의 여우트림은 처음 봤음에도 불구하고 흘려낼 수 있다는 계산 끝에 맞받아쳤고.”

이 오토마타에겐 본능이란 것이 없다.

인간의 눈앞에 주먹을 들이댔을 때 눈을 깜빡이는 건 눈꺼풀이 안구를 보호하기 위한 반사적인 행동이다.

하지만 레나스는 아주 작은 동작, 작은 움직임이라도 최적의 효율과 경로를 계산한 끝에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니 ‘계산이 끝나지 않는 상황’에서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거다.

일종의 과부하가 걸리고 있는 형국.

콰아아앙!

이번에도 성검은 아무 곳에서나 튀어나와 충돌을 일으켰다. 지켜보던 캉이 일행과 멀리 떨어지지도 않은 곳이었다.

그제야 제르비어스는 물러나 있으라는 내 말의 진의를 깨달았는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당신은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겁니까?”

레나스가 내게 물어왔다.

“처음으로 네 쪽에서 물꼬를 트는 거네. 그 말에 답하자면, 아니야. 굳이 따지면 평균 이상으로 목숨을 아까워하는 편일걸.”

“그런데 어째서 이런 술수를 쓰는 겁니까? 당신이 죽을 확률도 50퍼센트일 텐데요.”

“너와 바둑을 두면 무조건 질 테니까. 그러니 바둑돌을 통째로 집어던지는 수밖에.”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성큼성큼 레나스에게로 걸어갔다.

그녀는 지금 반격할 수 없다. 내가 공격할 마음을 먹지 않는 한 대응할 수 없는 것이다.

내 MP는 무한이 아니니,

이 러시안 룰렛을 오래 끌어선 곤란하다.

꽈아아아아앙!

이번엔 레나스의 오른쪽 무릎 아래가 날아갔다.

균형을 잃고 넘어지는 오토마타에게 나는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이상하지 않아, 레나스? 네가 두 번이나 썰려 나갈 동안 나는 아직 멀쩡한 것이. 이게 정말 우연일까.”

“우연이 아니면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무작위로 벌어지는 확률에서 어떻게…….”

딱!

나는 레나스의 눈동자 앞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설명해주지. 그냥 내가 운이 좋은 거야.”

그 마지막 일격의 출발점은 레나스의 등 뒤 지면이었다.

완벽한 지근거리에서 아론다이트는 포탈을 빠져나왔고,

콰직.

어린 묘목에 피어나는 꽃처럼,

레나스의 복부에서 성검이 피어올랐다.

“행운의 여신은 지금 내 편이거든.”

*

- 어, 어떻게 이긴 거야?

- 다 네 덕분이야, 아스티나.

- 그게 무슨 소린데?

- 여기까지 오는 와중에 하얀 고양이가 계속 증식하는 것 때문에 고생했지? 그래서 캉이가 레나스보다 훨씬 오래 걸린 걸 테고.

- 맞아.

- 나는 인형의 증식을 언제라도 멈출 수 있었어.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에 유용하게 써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레나스, 너에게 내 인벤토리 창을 보여줄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인벤토리에는 ‘하얀 고양이 토템’이 정확히 432개 들어 있었다. 오페라 하우스의 길을 뚫으면서 수납했던 인형들이다.

이 인형은 한 개당 행운 스탯 1을 올려준다.

[행운: 100(+382)]

원래 50이었던 내 행운 스탯은 100을 초과하고도 한참 높은 수치까지 올라 있었다.

“50대 50이 아니었어, 레나스. 내가 이길 확률은 482%였던 거야.”

상식의 궤를 벗어난 압도적인 행운.

나는 일시적이나마 그 상태를 강제로 이뤄낸 것이다. 여기가 푸르가토리움 안이라는 것이 아쉬울 정도다.

지금의 내 행운 스탯이라면 라스베가스의 모든 카지노를 털어먹을 수도 있을 텐데.

“납득할 수 없습니다. 저의 패배를 받아들일 수 없어요.”

“그건 나중에 천천히 복기해 봐. 지금은 네 주인의 목숨이 몇 분 남지 않았으니 좋은 타이밍이 아니잖아?”

나는 주황색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의 턱에 손바닥을 올려놓았다.

“레나스, 목과 몸통을 분리해도 소리를 낼 수 있어?”

“……질문의 저의를 모르겠습니다.”

“가능하다는 얘기네. 지금 당장 네 스스로 머리를 몸과 분리해줘. 내 검으로 잘라버려도 되지만…… 아무래도 그림이 아름답지 않잖아?”

잠시 후 레나스의 목에 실선이 그어지더니 케이블이 자동 분리되었다.

“제 머리가 코어로부터 분리된 채 가동할 수 있는 시간은 3분 45초에 불과합니다.”

“괜찮아. 그 정도면 차고 넘쳐.”

나는 레나스의 머리를 옆구리에 조심스럽게 낀 채 폐허로 돌변해버린 공장을 가로질렀다.

[4층의 교도관이 죄수를 주시합니다.]

그 길의 끝에는 피할 수 없는 사망선고를 받아든 한 노인이 지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딱 한 곡.”

“…….”

“네 주인에게 마지막 스완송을 불러줄 시간으로는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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