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143화 (143/300)

#143. 뛰는 놈과 나는 놈 (3)

자고로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

당연히 용사도 겸손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꺾어주마’란 얘기를 내뱉고 싶다면 더더욱이 그래야 한다.

콰드드드득!

근접전에서 레나스와 맞붙은 나는 곧장 상대의 수준이 고강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특히 검으로 변환한 팔을 상대하는 것이 까다로웠다.

냉병기를 든 적들을 무수히 상대해봤음에도 레나스가 그려내는 궤적은 변화무쌍하면서도 날카로웠다.

‘쉴 틈을 안 주는군.’

비슷한 경지의 상대와 싸울 땐 공격과 방어의 비율을 섬세하게 조절해야 한다. 상대의 연격을 막아내거나 비껴내면 곧 나에게 찬스가 돌아오게 된다.

바둑이나 체스, 혹은 턴제 게임처럼.

하지만 레나스와의 접근전에서 내 턴은 결코 돌아오는 일이 없었다. 호흡을 고를 필요가 없는 자동인형이기 때문이었다.

매번 쉬지 않고 치명적인 급소를 노려오면서도 물 흐르듯 다음 공격이 이어진다.

보통의 검객을 상대하는 상황이었다면 내게 다섯 번은 기회가 와야 했을 텐데도 레나스는 계속 전진만을 해올 뿐이었다.

“너만 공격하기 있냐?”

검을 받아내는 입장에서는 치사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결국 이 일방적인 공세의 흐름을 끊어내기 위해서 나는 극단적인 수를 써야 했다.

[용사전용기 무극참월공]

[제일식 축공탄(縮空彈)]

나와 레나스 사이에 기탄이 폭발하며 잠시의 틈이 생겼다.

내 쪽은 스킬의 후폭풍을 몸뚱이로 받아내야 했는데, 레나스는 신속하게 뒤로 물러섰다. 얄밉게도 옷자락 하나 상하지 않았다.

“네 주인은 죽을 거야, 레나스. 되돌릴 수 없어.”

“아직 수단은 남아 있습니다. 관객님에게서 그 아티팩트를 강탈하면 되니까요.”

“그거 지금 내 아공간 주머니에 들어 있거든. 나를 죽인다 해도 되찾을 수 없을걸?”

“지금의 말씀이 거짓일 가능성이 1퍼센트라도 존재하는 한 저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으흠. 거짓말을 탐지하는 능력은 없는…… 끄앗!”

카캉!

레나스는 자신의 말을 지켰다.

나와 대화하는 도중에도 양팔을 수검으로 변환시킨 뒤 덤벼왔다.

보통 아무리 사악한 녀석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말을 건넬 때는 공격을 멈춘 채 대화에 집중해주기 마련인데 레나스는 예외였다.

그것이 시간에 쫓기는 입장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대화를 나누면서도 집중력이 흐트러질 일이 없는 기계여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연금무장술 살상기능 해금]

[형태변환 C: 중거리 특화형]

나왔다.

주먹이 모닝스타로 변하는 레나스의 연금무장술.

한 방만 맞아도 치명타가 될 것 같은 도리깨가 늘어나는 사슬과 함께 날아들었다.

콰앙!

옆구리에 둔중한 통증이 파고들었다. 내 스킬 만전불패의 체술이 도리깨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드래곤하트 플레이트의 단단한 방어력이 아니었다면 이번 피격으로 승부가 끝났을 것이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

태세를 전환해 디아볼릭을 거칠게 휘둘렀다. 절대 눈으로 보고 피할 수 없는 검놀림인데도 전혀 타격감이 없다.

무력하게 허공을 휘젓는 기분. 놀랍게도 레나스는 정확히 필요한 움직임만 구사해 종이 한 장 차이로 검을 흘려내고 있었다.

[4층의 교도관이 그렇게 싸워서는 레나스의 전투연산법을 깨트릴 수 없을 거라 충고합니다. 상대의 미세한 호흡과 자세에서 세포 단위로 정보를 읽어 들이는 이 최강의 오토마타는 절대 쓰러트릴 수 없다고 전합니다.]

공중제비를 돌며 수평베기를 피해낸 레나스가 곡예와도 같은 발차기로 내 가슴팍을 걷어찼다.

꺼어어어엉!

한참을 날아간 내 몸뚱이는 컨베이어 벨트 세 개를 망가트린 다음에야 멈췄다.

온몸에 휘감기는 루프와 도르래를 떨쳐내며 일어섰다.

“퉤엣!”

하지만 끝내 내 몸에 달라붙어 있는 것은 한 노인의 절박한 시선이었다. 저 멀리서 죽어가는 그룬덴 사니릭투스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진짜 답 안 나오는 괴물을 만드셨어, 연금술사 선생.”

이토록 먼 거리인데도 불구하고 사니릭투스는 내 목소리를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4층 교도관이 자신을 인질로 삼으라고 제안합니다. 오직 그것만이 레나스의 움직임을 봉쇄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속삭입니다.]

“아니. 용사는 그딴 치졸한 수 안 써.”

[4층 교도관이 의아해합니다. 그대는 승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편 아니었냐고 묻습니다.]

나는 인벤토리를 열어 용사의 최종무장에 손을 뻗으며 대꾸했다.

“그건 맞는 말이지. 하지만 내 수단과 방법은 아직 제대로 꺼내지도 않았어.”

아공간에서 해방되자마자 허공에 붕 떠오른 SS급 성검 아론다이트를 본 레나스가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 대검이 얼마나 패도적인 힘을 갖고 있는지 민감하게 포착한 것이다.

“레나스, 나는 널 이길 거다.”

“제 연산으로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겨서 널 다음 층, 그다음 층으로 데려갈 거다. 너에게 자유라는 개념을 익히게 할 거야.”

“거부하겠습니다. 자유는 제 주목대상이 아닙니다. 저는 오직 그룬덴 사니릭투스 한 명만을 위해 작동합니다.”

“알아. 그러니 내 자격을 너에게 증명하겠다.”

정신을 집중하고 내공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허공섭물의 묘리를 마음껏 해방했다.

[용사전용기 무극참월공]

[제사식 비천성검(飛天聖劍)]

쐐애애애액!

3층에서 트랜스 상태로 폭주하던 캉이를 일격에 잠재웠던 필살기.

그것이 오토마타 소녀의 동체를 찢어버릴 기세로 날아갔다.

레나스가 무릎을 굽힌 채 스프린터의 준비자세를 취했다.

콰아아아앙!

아론다이트는 레나스가 있던 지면에 내리꽂혔다. 커다란 충격파가 검궁 최상층 일대를 진동시켰다.

하지만 내 시선은 착폭 장소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놀랍게도 첫 일격이 빗나간 것이다.

설마 했는데 이것마저 피해낸다고?

[연금무장술 살상기능 해금]

[형태변환 D: 비행 특화형]

네 쌍의 금속 날개가 레나스의 등 뒤에 생겨나 있었다.

그리고 그 날개의 밑둥에 각각 두 개, 총 여덟 개의 분사구가 불꽃을 내뿜고 있었다.

그녀가 등반죄수와 맞설 때엔 꺼내지 않았던 형태.

그 카드를 사용하게 만들었다는 자부심과 동시에 아직 미세한 도트데미지조차 입히지 못했다는 굴욕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어디 계속 피할 수 있는지 보자고.”

비천성검은 일격으로 끝나는 필살기가 아니다. 내 마력이 동날 때까지 집요하게 상대를 추적하게 만들 수 있다.

손가락 두 개를 붙여 세운 다음 그것을 위로 치켜들었다.

바닥에 박혀 있던 아론다이트가 주변에 잔해를 날려보내며 다시 날아올랐다.

목표물은 레나스의 몸통.

네 겹의 날개를 X자로 교차시킨 레나스가 날아오는 성검을 피해 비행을 시작했다.

나는 그 궤적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콰콰콰콰콰콰!

레나스는 성검의 비행을 저지하기 위해 공장의 압착기와 조립 시설의 틈으로 각도를 꺾는 영리함을 보였다.

하지만 아론다이트를 저지하려면 평범한 강도의 물질로는 어림도 없다.

결국 오토마타와 성검의 비행은 자연히 공중 추격전이 되었다. 드론 레이싱의 속도를 수십 배 증폭시키면 비슷한 풍경이 연출되지 않을까.

하지만 상황은 내 의지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레나스와 성검은 지칠 일이 없는 레이서들이었으나 성검의 파일럿인 내 집중력과 마력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떨그렁.

비행을 멈춘 채 낙하하는 아론다이트.

레나스가 날개를 접은 뒤 성검의 폼멜 위로 올라섰다.

잠자리채를 휘두르다 지쳐서 나가떨어졌을 때 그 잠자리채 위에 얄밉게 올라선 잠자리를 보는 어떤 소년의 심정.

“이제 연료가 다 떨어진 건가요?”

“연료가 아니라, 헉헉. 마력이 떨어진 거야.”

나는 침통한 심정으로 바닥을 드러낸 스탯창을 보았다.

[MP:0/14,199]

레나스가 성검을 도약대 삼아 돌진해 왔다. 내게는 그것을 막아설 아무런 수단이 없었을 때,

콰아아아아아!

붉은 광선포가 레나스의 측면에서 쏘아져 왔다. 그러나 오토마타의 날개 중 하나가 오목한 형태로 바뀌며 광선포를 흘려보냈다.

“형아, 괜찮아?”

창문을 박살 내고 들어온 구미호의 등에 아스티나와 제르비어스가 올라타 있었다.

캉이가 혀를 헐떡이는 걸 보니 전력으로 레나스의 뒤를 쫓아온 것처럼 보였다.

“동료분들이 관객님을 도우러 오셨군요. 이를 내다보고 시간을 끄신 건가요? 하지만 숫자가 늘어난다 해서 전황을 바꾸실 순 없을 겁니다.”

레나스의 말에 동의했다.

“그렇겠지. 쟤들은 신경 쓰지 마. 여기서 너와 싸우는 건 어디까지나 나 혼자니까.”

그러자 내 옆에 내려선 제르비어스가 벌컥 성을 냈다.

“무모한 소리 하지 마라, 용사 놈아. 가진 마나를 다 끌어다 썼으면서 무슨 수로 저 소녀를 이기겠다는 거냐.”

“그래, 슈바인. 지금은 자존심 세울 때가 아니야. 우리가 동시에 협공하면 틈이 생길 수도…….”

나는 둘에게 오메가 위프와 폭류천마검을 집어넣으라는 손짓을 했다.

“레나스의 말이 맞아. 이런 상황에서 하나가 넷이 된다 해도 승률에는 큰 변동이 없지.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야.”

아스티나는 납득하지 못했다.

“여럿이 힘을 합쳐도 이길 수 없는 적을 상대하면서, 혼자서 싸워야 승산이 높다는 논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란 말야?”

설명할 순 있겠지만 레나스가 그걸 기다려주고 있을 리 없다.

나는 아스티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알잖아. 나는 믿는 구석이 있을 때만 이러는 거. 미안하지만 저번처럼 너희의 마력을 전부 내게 몰아줬으면 해.”

“그건 어렵지 않지만…….”

“그리고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어. 아예 건물 바깥으로 피신해 있어도 괜찮고.”

캉이와 제르비어스가 시선을 교환하더니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내가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는 것에 뭔가 작전이 있으리라 지레짐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스티나는 그렇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슈바인. 자폭이나 동귀어진을 노리는 건 아니겠지? 어?”

은발의 마검사가 내 손목을 단단히 낚아챘다.

이것만큼은 너스레를 떨며 넘길 수 없는 문제였다. 아스티나는 수만 번의 시간선을 넘나들며 자신의 눈앞에서 동귀어진으로 죽어간 부모들을 기억하는 장본인이었으니까.

“너에게 여분의 목숨이 있다는 걸 알아. 그걸 믿고 지금 불사르려는 것 아니냐고.”

“아니야. 진짜로.”

“……맹세해.”

“맹세할게. 만약 동귀어진의 수를 쓸 일이 있으면 너에게 꼭 허락을 받을 테니 지금은 날 믿고 물러나 줘.”

결국 아스티나는 내 고집에 못 이겨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뗐다. 그리고 다시 여우화한 캉이의 등에 올라타 난간까지 물러섰다.

레나스는 그동안 나를 공격하지 않고 있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판단을 내리시네요. 어째서 저를 혼자 상대하겠다고 하시는 건지요.”

“내가 지금부터 보여줄 작전에 친구들이 휘말리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

내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정말 죽을 수도 있다.

“이제 정말 마지막 수야, 레나스. 다음 작전 같은 건 없어. 이것마저 네가 피해내면 순순히 원하는 칼자루를 내어주지.”

레나스의 녹색 눈동자가 빛났다.

나는 친구들에게서 마력을 대여해 왔다.

[용사가 일시적으로 동료의 마력과 연결됩니다.]

[MP: 11,300/14,199]

급속 재충전을 마친 나를 보며 레나스가 다시 전투형태로 돌입했다.

나는 멀찍이 내팽개쳐져 있던 아론다이트를 다시 허공섭물로 끌어왔다.

영롱한 빛을 내뿜는 검신이 시위가 필요 없는 화살처럼 내 가슴 앞에서 빛나고 있다.

“아까와는 조금 다를 거야.”

나는 중력 마법을 시전해 레나스와 나 사이에 작디작은 포탈을 만들었다.

중력 마법의 점멸기술인 워핑에 사용되는 중간 단계의 포탈이다.

하지만 이번에 공간을 건너뛰는 것은 내 몸이 아니다.

이 성검이다.

쐐애애애액!

포탈을 향해 날아간 성검은 이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잠시의 침묵이 우리 사이를 지배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아론다이트가 모습을 드러낸 다음 순간,

콰지이익!

레나스의 왼쪽 팔꿈치 아래는 사라져 있었다.

“……어, 어떻게?”

묻는 듯한 시선의 레나스를 마주 보며 나는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자고로 인간은 겸손해야 한다.

하지만 때로는 오토마타 역시 겸손해야 한다.

“러시안 룰렛이라고 들어는 봤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