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뛰는 놈과 나는 놈 (1)
“재판장 나이알레. 아직 버텨주고 있었군요.”
광장의 하늘에는 그라비타스 페룰라를 머리 위로 치켜든 나이알레가 떠 있었다. 회전하지 않는 초거대 마법진이 그녀의 등 뒤를 받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당신이 얼마나 진심으로 이 도시를 지키려 했는지 알겠어요.”
그녀의 법복은 이미 여러 번의 공격을 허용했는지 넝마 같은 꼴로 전락해 있었다.
근접 공격의 허용이 곧 치명타로 이어지는 마법사의 전투법을 고려하면 나이알레에게 유효한 일격을 집어넣을 수 있는 등반죄수들이 적지 않았다는 뜻이다.
나이알레의 다리 밑에서 분전을 펼치고 있는 한 오토마타에게도 시선이 간다.
“기사단장 에니찰리드.”
지금까지 우리 일행을 여러 번 챙겨준 에니찰리드는 검을 입에 물고 있었다.
왼팔은 완전히 떨어져 나가 있었고, 오른팔은 케이블이 늘어져 있는 걸 보면 자동수복 기능을 발동하는 중인 듯했다.
신체가 무기와 떨어지는 순간 수복 기능이 사라져버리기에 검을 입에 물고 등반죄수들과 싸워나간 것이다.
그녀의 등 뒤에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된 검궁 기사단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반면에 파괴의 화신이 된 등반죄수들은 여전히 멀쩡한 상태를 유지한 자들이 적지 않았고.
“미안합니다, 여러분.”
물론 내 중얼거림에 대답하는 오토마타는 하나도 없었다.
이 시간정지 권능의 유효시간이 끝난 뒤에도 내 말은 그들에게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악마의 기계를 박살 내지 않았더라면 결코 이 난리통이 벌어지지 않았을 테니까.
결자해지라 했다.
“제가 책임지고 이 사태를 끝내버릴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나는 배수의 진을 편 채 절박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에니찰리드의 귓가에 이 한 마디를 속삭인 다음 발걸음을 뗐다.
*
검궁 중앙 홀의 엘리베이터는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
입장자의 자격을 까다롭게 심사하기 위해 설치된 듯한 검사장치 역시 불빛만 켜져 있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무심하게 그것을 밟아서 통과했다.
“시간이 멈춘 덕분에 이런 짓도 가능하네.”
원래대로였다면 한 층의 교도관에게 이토록 쉽게 접근할 수 있을 리 없다.
벨리오나가 내게 넘겨준 이 회중시계는 사실 검궁의 자유이용권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그긍.
엘리베이터 문틈에 디아볼릭의 날을 박아넣었다.
그리고 999의 근력을 마음껏 해방하자 육중한 철문이 고무판처럼 일그러지며 사람 한 명 들어설 정도의 구멍을 만들어냈다.
케이블을 붙잡은 채 위를 올려다보자 까마득히 높은 곳에 매달려 있는 승강기의 바닥이 보였다.
나는 경공술을 발휘해 그것을 목표로 수직상승했다.
써걱!
승강기의 바닥을 잘라낸 다음 밖으로 나오자 검궁 최상층의 풍경이 나를 반겨주었다.
‘바깥에서 보면 검의 코등이 부분이 바로 여기구나.’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하는 기계 장치들이 즐비한 공장.
수백 개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 각양각색의 크기를 가진 금속 부품들이 운반되고 있었다.
개중엔 나와 직접 만나진 않았지만 이야기로 전해 들었던 육중한 오토마타도 있었다.
제르비어스와 캉이가 힘을 합쳐 가까스로 승리할 수 있었다는 초대형 룰렛 머신. 그것이 절반 이상 조립을 마친 채 뼈대를 훤히 드러내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왕의 허풍인 줄 알았는데 정말 저런 녀석도 있었네.’
만들어지고 있던 룰렛 머신은 한 대뿐만이 아니었다. 컨베이어 벨트의 끝엔 완성된 기체 수십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시간이 정지되지 않았더라면 나 혼자서 저런 녀석을 무더기로 상대해야 했을지도.
절그럭.
원래대로였다면 고막을 찢어버릴 만큼 막대한 소음이 공장 전체를 지배하고 있어야 했을 터였다.
하지만 들리는 건 내 드래곤하트 플레이트가 절그럭거리는 소리와 부츠가 바닥을 밟을 때 나는 금속음뿐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멈춘 공장 한가운데에 한 노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층장 슈바인 스트링거.”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네, 교도관.”
시간정지의 권능은 그에게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연금술사 그룬덴 사니릭투스는 톱니바퀴를 형상화한 옥좌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양팔과 다리에는 두꺼운 케이블이 문어의 빨판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신성을 갖춘 교도관의 육체에서 무언가를 빨아들여 이 공장이 가동되는 듯했다.
복부엔 큼지막한 쇳조각이 대못처럼 박혀있었다.
르팔타커스 시온의 기원검 네메시스.
그것의 파편이 옥좌의 뒤편까지 꿰뚫고 있는 듯했다.
“당신은 교도관이면서…… 내가 본 그 어떤 죄수보다도 참혹한 꼴을 하고 있네.”
“고통을 느낄까 걱정하는 거라면 접어둬도 괜찮소이다. 이 감옥은 내가 미쳐버리지 않도록 육체적인 고통은 진작에 느끼지 못하도록 만들었으니.”
“그 말을 거꾸로 해석하면 정신적인 고통은 계속 느끼고 있다는 말로 들리는데.”
“허허허. 굳이 그런 점을 짚어내는 것은 그대의 악취미라 할 수 있겠구려.”
사니릭투스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이미 오래전에 시력을 잃은 것인지 탁해진 동공이 허공의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다.
“앞을 못 보는 건가.”
“이 육체를 통해서는 그렇소이다. 하지만 얼마든지 다른 방법이 있지 않겠소. 이 케이블을 통해서 도시 전체를 내 손바닥 주름 들여다보듯 볼 수 있다는 뜻이오.”
그런 방법으로 계속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던 건가.
나는 그에게 한 발짝 다가가며 담담하게 앞으로 그에게 닥쳐올 운명을 선언했다.
“당신을 죽일 생각이야, 그룬덴 사니릭투스.”
“알고 있소이다.”
내 말은 한 치의 허풍도 없는 진심이었다.
그런데도 이 교도관은 자신을 죽이겠다는 말에 조금의 당황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목숨에 아무런 미련이 없다는 뜻일까.
그럴 리가. 그렇다면 이 층의 교도관을 떠맡는 대신에 진작 그 무저갱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되는 일이었다.
“내 생각대로야. 당신은…… 죽고 싶어하고 있어.”
“그대의 짐작이 맞소이다. 하지만 그게 내 숙원은 아니라오. 엄밀히 말하자면 내 숙원을 이루는 데 있어 이 몸의 남은 생명이 장애물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
나는 이 늙은 연금술사의 숙원을 이미 알고 있다.
단탈리온이 해준 이야기에서 처음 실마리를 얻었고, 이후 만철도시에서 많은 오토마타들과 만나면서 확신이 생겼다.
“레나스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은 거지?”
사니릭투스는 본인의 말을 통해 내게 만철도시의 불문율을 알려준 바 있다.
어떤 무기를 자유롭게 만들기 위해선 그 주인인 오토마타의 ‘숙원’을 이루어주어야 한다.
레나스는 연금술사 사니릭투스가 푸르가토리움에 압수당한 ‘무기’로 취급된다.
즉, 오토마타 레나스가 자유의 몸이 되려면 그 주인인 사니릭투스의 숙원이 달성되어야 한다.
“정확하오. 내 숙원은 레나스가 이 감옥을 벗어나 넓은 세상으로 나가서 언젠가 영혼을 갖게 되는 것이오.”
“하지만 당신이 숙원을 이루기 전엔 레나스가 이 4층을 벗어날 수 없지.”
“그 또한 맞소이다.”
역설(Paradox)이다.
숙원이 이뤄지려면 레나스가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런데 레나스가 자유로워지려면 먼저 숙원이 달성돼야 한다.
두 가지 전제가 서로의 꼬리를 문 채 놔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
“파천황의 검 조각을 이용해서 감옥의 무기고를 내 층에 흡수시키는 데까진 성공했지. 하지만 그때 알았다오. 이 감옥과 압수당한 무기에 지워진 불문율이 나를 모순당착에 부딪히도록 만들었다는 걸.”
“그래서 이 난제를 대신 해결해줄 등반죄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군. 그 때문에 지하의 악마를 재현해 함정의 관리자로 만든 거야.”
“알겠지만 이 4층에는 교도관의 시련이 없소. 죄수라면 누구나 다음 층으로 지나쳐갈 수도 있지. 하지만 등반 자체에 얽매이지 않고 더 큰 힘을 욕망하는 자라면…… 내가 만들어낸 무대에 난입할 수 있을 거라 믿었소이다.”
그 믿음의 결과로 내가 이곳에 있다.
패러독스를 깨부수기 위한 그룬덴 사니릭투스의 발버둥은 결국 통한 것이다.
“당신의 몸에 박혀 있는 기원검의 조각을 뽑으면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거지?”
“이 층에 융합된 무기고의 규칙이 무용지물이 된다오. 실제 감옥에서 폭동을 일으킨 죄수들이 무기고에 채워진 자물쇠를 부숴버리고 그 문을 활짝 열어젖힌 것에 비유할 수 있겠지.”
“누구라도 손에 쥔 무기를 갖고 다음 층에 올라갈 수 있겠군.”
“그렇소이다.”
만철도시에 흩어져 있는 모든 무기가 해방된다. 아스티나의 폭류천마검 또한 다음 층에 가져갈 수 있게 된다.
“내 진작 말하지 않았소이까. 정당한 권리가 없는 무기를 갖고 올라가기 위해선 교도관을 죽이는 방법뿐이라고.”
“그때 내가 당신의 목을 따러 왔다면 어땠을까. 지난 며칠 동안의 개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 같은데?”
“하지만 그 여정을 겪지 않았더라면 나는 결코 그대를 만나주지 않았겠지. 그대의 고난은 헛되지 않았소. 이 순간까지 오기 위해서 필요했던 시간들인 것이외다.”
등가교환인가.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지름길을 허용하지 않는 연금술사의 화법다웠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기원검 네메시스의 칼자루를 꺼냈다.
두근.
오래전에 잃어버린 자신의 파편을 감지했는지 손잡이에서 맹수의 심장 박동이 전달돼 왔다.
“이걸로 당신을 죽이고 레나스를 다음 층으로 데려가겠어.”
“고맙소이다. 교도관도, 연금술사도 아닌…… 인간 그룬덴 사니릭투스로서 그대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하고 싶소이다.”
“너무 그러지 않아도 돼. 나는 탈옥을 해야만 하는 입장이고 그 과정에서 강력한 동료를 필요로 하고 있거든.”
“그 아이를 만들어낸 입장에서 자화자찬처럼 들리겠지만 확실히 레나스는 뛰어난 힘을 가지고 있지. 하나 그대가 레나스를 거두려는 이유가 오직 그것뿐만인 것은 아니라는 걸 안다오.”
“…….”
“그대는 다정한 사람이오. 그동안 교도관을 맡으면서 숱한 등반죄수들을 봐 왔지만 그것만큼은 아무리 강한 죄수라도 갖기 어려운 재능이지.”
이미 오래전에 말라버린 눈물샘을 가졌기 때문일까. 사니릭투스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마음속에서 미약한 동요가 일어나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대에게 주어진 나와의 대화 시간이 이제 얼마나 남았소이까?”
벨리오나의 회중시계를 어루만지자 시간정지의 잔량이 표시되었다.
[권능의 유지시간이 13분 남았습니다.]
이것을 전해주자 사니릭투스는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이 다하기 전에 커피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허락된 것에 대해서.
“하나 물어도 되겠소이까?”
“그래.”
“그대는 이 검궁의 엘리베이터를 보고서도 전혀 당황하지 않더군. 아마도 문명의 기술 수준이 뛰어난 곳에서 붙잡혀 온 것 같다고 생각했소이다. 혹 그대가 있던 세계에도 자동인형이 있소이까? 그렇다면 자동인형과 같이 살아본 적은 있소이까?”
“아니. 내가 있던 세계에 오토마타 같은 것은 없었어.”
나는 아쉬워하는 사니릭투스의 얼굴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이 내 부족했던 설명을 채워주기로 했다.
“대신에 당신에게 들려줄 만한 이야기라면 하나 있지.”
죽음이 확정된 교도관 앞에서 나는 지구에서의 삶을 들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