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지금 죽이러 갑니다 (3)
“용……!”
자신 옆을 스쳐 가는 레나스를 멍하니 바라보며 제르비어스가 외쳤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외침은 끝맺음 되지 못했다.
레나스의 수검(手劍)은 의심의 여지 없이 나를 죽이기 위해 찔러져 왔으나 허공에 정지된 것처럼 멈춰서 있었다.
내 목젖과 칼날의 끝은 불과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간격밖에 벌어져 있지 않았다.
“후우, 조금 더 떨어져서 쓸 걸 그랬어.”
나는 오른손에 든 크리스탈 시계를 어루만졌다.
[용사가 S급 아이템 ‘후회 안 하는 여신의 회중시계’를 사용했습니다.]
[시전자를 제외한 주변의 시간이 정지합니다.]
[제한시간은 1시간입니다.]
8층의 죄수 벨리오나.
그녀가 분신인 오토마타를 통해 내게 건네었던 귀중한 호출기.
나는 레나스를 도발하고 난 뒤 그것을 발동시켰다.
‘정말로 시간이 멈추는군.’
레나스의 무릎 뒤에서 나오는 분사구가 불꽃을 뿜고 있었는데, 그 불꽃의 형태는 마치 미려한 조각품처럼 못 박혀 있었다.
동료들 역시 벨리오나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조각상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돼 있었다.
제르비어스는 레나스의 등에 손을 뻗은 채로, 아스티나는 폭류천마검의 칼자루를 막 쥐려는 동작 그대로, 캉이는 양볼을 붙잡은 채 꼬리를 바짝 세우던 모습으로 정지돼 있다.
또각또각또각.
얼마 지나지 않아 기다렸던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양산을 쓴 화려한 오토마타가 극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거 보라고, 슈바인 스트링거. 내가 예측한 게 맞아떨어졌지?”
벨리오나의 오토마타는 만면에 가득한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준 회중시계를 작동시켰다는 것은 8층의 죄수들 중 기원파의 계획에 협력하겠다는 뜻에 다름 아니니까.
나는 계단을 올라가며 거꾸로 내려오고 있는 그녀를 맞이했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 변했기 때문에 협조하기로 한 거야. 마치 간접적으로 날 조종했다고 생각하진 말아줬으면 하는데.”
“어머. 그런 적 없단다. 그냥 기뻐서 그래.”
“뭐가 그렇게 좋은데?”
“우리가 다시 만난 건 불과 일주일만인데 너는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해져 있으니까. 믿기 힘들 정도로. 역시 ‘우리’가 해결사를 제대로 골랐구나 싶어서.”
계속 대화하고 있다가는 짜증만 날 것 같았다.
게다가 벨리오나가 준 회중시계가 시간을 멈출 수 있는 데엔 제한시간이 있었다.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지. 네게 협조한다면 기원검의 손잡이를 건네주겠다고 했지?”
“응. 여기에 있어.”
이전과 반대로 이번엔 오토마타의 양쪽 가슴이 뻐꾸기시계처럼 열렸다. 그 안엔 큼지막한 칼자루와 코등이(Guard)만 남은 대검의 잔해가 있었다.
“가슴에서 꺼내게 만들다니, 악취미네.”
“또 오해하고 있구나. 사이즈를 보렴. 이 오토마타 내부에 이만한 걸 넣으려면 어깨나 무릎에는 곤란하다고.”
하여간 한 마디도 지지 않는 방정맞은 여신이군.
나는 기원검 네메시스의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용사가 천공돌파의 수왕(囚王) 르팔타커스 시온의 애병에 접촉했습니다.]
[자격 없는 자를 판별하는 즉사의 심판이 발동합니다.]
뭐라고?
즉사의 심판?
불길하기 짝이 없는 암흑이 칼자루 끝에서 뿜어져 나와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벨리오나의 표정은 태평했다.
“걱정 마. 내 짐작대로라면 넌 기원검을 쥘 자격이 있으니까. 이 감옥의 그 누구보다도 말이지.”
[용사의 손등에 새겨진 사자의 문신이 기원검에 반응합니다.]
[즉사의 심판은 취소되었습니다.]
이윽고 암흑은 다시 칼자루로 흡수되었고, 기원검의 잔해는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젠장. 나를 속였어, 이 빌어먹을 여신님아.”
벌컥 화를 내자 벨리오나는 깔깔 웃었다.
“그럴 리가. 널 속인 적 없어. 말했듯이 신격은 그보다 떨어지는 존재에게 거짓말을 하지 못하니까. 대신 진실을 ‘생략’했을 뿐이지.”
“네가 생략한 진실은 이 기원검이 자격 없는 자를 죽이는 기능이 있다는 것뿐만이 아니잖아.”
“호오. 그러면 뭐가 또 있지?”
나는 칼자루를 인벤토리 안에 집어넣으며 대꾸했다.
“너는 기원검의 파편을 회수해달라고만 했지, 그 파편이 교도관의 몸속을 찌르고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어. 의뢰의 핵심이 교도관을 찾아가서 죽여야 하는 점을 숨겼잖아.”
벨리오나는 발뺌하지 않았다.
“맞아. 그 당시엔 네가 지레 겁먹고 의뢰로부터 달아날까 걱정됐었거든.”
하지만 나는 결국 만철도시에서 숱한 상황을 돌파했고 그 과정에서 연금술사 그룬덴 사니릭투스와 그가 만들어낸 자동인형 레나스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교도관을 죽여야겠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속은 것 같아서 억울하니?”
“아니. 그냥 짜증이 조금 난 정도야. 8층에 올라가면 이 빚을 몇 배로 갚아줄 테니까 목 닦고 기다려라.”
“헤헷. 여신은 목욕이나 샤워를 할 필요가 없는데도?”
“비유적인 표현이야, 비유.”
내가 손사래를 치며 벨리오나의 오토마타를 지나치자 그녀의 시선은 공격 상대를 잃은 채 정지해 있는 레나스에게로 향했다.
“그나저나 저 프리마돈나가 이 정도로 강한 줄은 몰랐는걸? 내 친구들이 알면 무척 탐을 내겠어.”
“됐고. 난 이제 검궁으로 갈 거야. 이미 너에겐 충분히 시간을 할애한 것 같거든.”
*
오페라 하우스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도로의 풍경이 보여야 했겠지만 지금은 내가 만철도시에 저지른 재난 때문에 하얀 고양이 인형이 무더기로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뚫고 가야겠군.”
내가 마검 디아볼릭을 뽑으려 하자 옆에 있던 벨리오나가 다급히 손을 뻗었다.
“그러지 마. 좋은 생각이 아냐.”
“어째서?”
“말했잖아. 내 시간정지의 권능은 무적의 비법 같은 게 아니라고. 누군가에게 검을 휘두르거나 타격을 입히는 순간 권능은 해제돼.”
“닌자처럼 슬금슬금 다가가는 것까진 괜찮지만 칼을 찔러넣기 위해 상대의 피부에 닿는 순간 풀린다? 이렇게 해석하면 되나.”
“정확해. 그 인형이야 얼마든지 박살 내도 괜찮지만 지금 저 인형 무더기 곳곳에는 너를 사냥하기 위해 몰려든 등반죄수들이 숨어 있거든. 그들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난감해질걸.”
“알았어. 다른 방법을 찾아보지 뭐.”
나는 미련 없이 디아볼릭을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내 동작이 지나치게 깔끔했던 걸까. 벨리오나가 턱에 손가락을 올리며 물었다.
“너, 정말로 똑똑한 녀석이구나.”
“왜 갑자기 칭찬이야?”
“사실 그 검을 휘두를 생각조차 없었던 거 아니야? 내가 말해주지 않은 회중시계의 빈틈이나 약점을 확인하기 위해 날 도발한 거 같은데.”
“…….”
“흥미로워. 이런 상황에서도 아주 먼 미래에 8층에 올라 나와 맞서 싸울 때를 대비해서 여신의 권능에 대해 파악해두려는 거잖아.”
“그럴 수밖에. 네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대신, 뭔가를 꽁꽁 숨겨두는 짓거리를 좋아한다는 걸 확인했으니까.”
“좋아. 지금은 너를 응원해야 하는 입장이니까 별로 아쉽지 않아. 신격의 권능이라는 게 몇 번 구경한다고 해서 격파되는 것도 아니고.”
벨리오나는 팔짱을 끼더니 호기심을 드러냈다.
“자, 그러면 검이나 주먹을 쓰지 않고 저길 어떻게 뚫을 셈이니? 하나씩 하나씩 꺼내서 길을 트려면 한 세월일 텐데.”
“잠자코 지켜보고 있기나 해.”
나는 잔뜩 뭉쳐 있는 인형들 더미에 손바닥을 올리고 읊조렸다.
“아이템 수납.”
슈욱. 슈슈슉.
촘촘히 쌓인 블럭의 중간 부분이 사라지듯 인형들이 없어져갔다. 정확히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내 인벤토리에 차곡차곡 쌓여나가는 거지만.
“우와, 그거 신기하네? 아공간 주머니를 자유롭게 쓰는 죄수라고? 교도관장의 총애를 받는다는 소문이 진짜였구나.”
“그래. 그뿐 아니라 파천황의 가호까지 받고 있지. 우리가 다시 만날 때엔 너희가 고이 모아둔 기원검의 파편도 전부 꿀꺽해서 이 아공간 주머니에 넣을 계획이시다.”
“그렇게 말해도 겁 안 먹거든?”
나는 옆에서 조잘조잘 떠드는 벨리오나를 무시한 채 오페라 하우스 앞에 쌓인 인형 더미를 싹 치워버리는 데 성공했다.
확실히 등반죄수들이 나를 노린 채 숨어 있다는 이야기는 거짓이 아니었다.
인형 수백 개를 치워버리자 서슬 퍼런 표정의 등반죄수들이 돌격 자세를 취한 채 굳어있는 게 드러난 것이다.
개중엔 아스티나, 캉이와 마지막으로 싸웠던 등반죄수 울라한도 있었다.
울라한은 금강곤봉을 한 손에 쥔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내가 지금 이 녀석에게 냅다 살신참을 갈겨버리면 어찌 될까?”
“그 대머리는 십중팔구 죽거나 큰 부상을 입겠지. 하지만 인간을 초월한 반사신경을 갖고 있거나 자동으로 발동되는 호신 기술이 있는 경우엔 이야기가 다르고.”
“공격의 순간 상대에게 들켜버린다. 그렇다면 그 순간에 바로 또 시간정지를 사용하면 그만일 텐데, 그게 가능했다면 네가 8층을 통일하지 못한 게 조금 이상하고.”
“……흐흥.”
“쿨타임이 있는 거군. 재사용하기까지 조건이 있는 거야.”
“대화는 거기까지. 내게서 뭔가를 더 캐낼 생각은 말아. 난 이제 사라질 거거든.”
“검궁까지 날 따라오진 않는 건가?”
“전에 말했듯이 이 인형은 관상용이지 전투용이 아니거든. 부디 그 기원검을 이용해서 목적을 이루길 바라, 슈바인 스트링거.”
내가 고양이 인형을 없애줬기에 도로로 사라지는 벨리오나의 걸음걸이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다만 모퉁이를 돌기 전에 한 번 나를 쳐다보며 싱긋 웃었을 뿐.
“달리 말하면 전투에 돌입한 내 진정한 모습을 넌 상상도 못할 거야.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너를 응원할게. 아디오스.”
그렇게 8층의 죄수 벨리오나와 나는 작별했다.
*
[천마어기행공]
검궁까지 이르는 긴 여정을 무식하게 인형 청소를 겸하며 진행할 순 없었기에 나는 경공술을 사용하는 걸 택했다.
시간이 정지된 풍경 속을 날아다니며 등반죄수들이 재난에 가까운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나를 찾는 건가?’
어쩌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신장보다 기다란 톱날창을 휘두른 채 멈춰 있는 등반죄수가 있었다. 녀석 주변에는 온몸이 갈기갈기 찢긴 검궁 기사단과 시민들의 잔해가 즐비했다.
‘그냥 화풀이에 휩쓸렸군.’
어쩌면 저 등반죄수는 유독 오랜 시간 동안 악마의 기계 속에 갇혀 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가만히 형량이 줄어가길 기다리는 대다수의 죄수들과 달리 저들은 나처럼 ‘등반’을 선택했다.
반드시 탈옥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고, 교도관의 통제에 따르는 것이 죽기보다 싫은 독불장군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구속을 거부한 자들이 등반죄수가 되는 것이다.
그런 녀석들을 인형으로 만들어 오랜 시간 가둬두었으니 결국 저렇게 폭주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렇게 될 줄 예상 못 했다고 하진 않겠지, 교도관 사니릭투스?”
지면에 꽂힌 대검 모양의 초고층 건물 검궁.
이 사태에 이르러선 만철도시라는 거대한 무덤에 꽂힌 묘비처럼 보인다는 생각도 든다.
[4층의 교도관이 만물의 일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대답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이 감옥에서 많은 걸 예상했잖아. 파천황 르팔타커스 시온이 등반에 실패해서 다시 내려오는 것, 무기고를 4층과 융합시키면 그 무기들을 탐낸 등반죄수들이 층을 건너뛰지 않고 머무르며 오토마타들과 한바탕 뒹굴 것도 너라면 다 예상했을 거야.”
[4층의 교도관이 죄수의 말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거대한 대검의 끝자락, 혼란의 도가니탕과 같은 광장에 나는 내려섰다.
“등가교환 좋아하지, 사니릭투스? 네가 짠 연극 무대가 이제 클라이막스로 접어들었어. 지금까지 그 대본에 계속 어울려주었으니 이번엔 당신이 내게 어울려줄 차례야.”
[4층의 교도관이 설레는 심정으로 그대를 기다린다고 전합니다.]
아마도 사니릭투스는 계속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 만철도시의 청사진을 파악해 그것을 되짚어올 수 있는 누군가를.
그래서 지금 내가 이곳에 있다.
광장에서 올려다본 검궁의 최상층은 까마득히 높았다.
나는 압도적 높이를 자랑하는 그 칼자루 끄트머리를 노려보았다.
“지금 죽이러 갈게, 교도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