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무대의 주인공 (2)
“이게 무슨?”
에니찰리드는 무인의 민감한 본능으로, 나이알레는 중력 마법사의 예민한 감각으로 훌쩍 물러섰다.
콰아아아앙!
그러자 피고인석 전체를 박살내면서 일군의 무리가 튀어나왔다.
“어라? 마침 두 분이 함께 계셨군요.”
층장 슈바인 스트링거와 그의 동료들이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눈앞에 착지했다.
나이알레는 아스티나의 손에 들려 있는 검에 온통 시선을 빼앗겼다. 마피아 보스 칸의 애병인 폭류천마검이 매끈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럴 수가. 벌써 악마와의 내기에서 승리한 겁니까? 이토록 짧은 시간에?”
“획득이라기보다는…… 강탈했습니다. 하하.”
사정을 설명할 시간이 없다는 듯 슈바인이 나이알레의 앞에 성큼 다가왔다.
“재판장님, 질문이 있습니다.”
“뭡니까.”
“만철도시는 홍수에 대비되어 있습니까?”
*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내 질문에 나이알레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일종의 인공도시인 사니릭타운에 도를 넘어선 폭우는 내리지 않는다고 했다. 자연히 강물이 넘치는 홍수도 일어난 적이 없다는 것.
“그거 안타깝게 되었네요. 곧 이 도시 전체가 홍수에 잠길 겁니다. 하지만 홍수를 일으키는 건 물이 아닐 거예요.”
내 말에 담긴 의미를 파악할 방법이 없던 두 오토마타는 곤혹스럽다는 듯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터질 때가 됐는데.’
곧 우리의 등 뒤에서 고양이 인형의 분수가 터져 나왔다.
쿠아아아아아!
에니찰리드는 반사적으로 칼자루에 손을 뻗었다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퐁퐁 솟아나는 것들의 정체를 깨닫고는 아연실색했다.
“뭡니까, 저게?!”
하얀 고양이 법정은,
말 그대로 하얀 고양이들에게 점령당하고 있었다.
반면 나이알레는 당황을 뒤로 미루고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층장 님, 뒤로 물러나십시오.”
나이알레는 우리 일행을 지나쳐 걷더니 그라비타스 페룰라를 휘둘렀다.
[마도제국학파 중력 마법]
[포스 필드 제너레이트(Force Field Generate)]
마법진이 세찬 광휘와 함께 중력장을 형성하며 고양이 인형의 폭포를 막아 세웠다.
하지만 화산 꼭대기의 마그마 분출구를 거대한 뚜껑으로 틀어막는다 한들, 이미 거대한 압력이 발생한 이상 중력장을 통한 방어는 묘안이 될 수 없다.
나는 다급히 나이알레의 법복을 잡아채며 외쳤다.
“일단 건물 밖으로 피신하십시오, 재판장님.”
“어째서요? 저 인형들에게선 아무런 마력이 느껴지질 않습니다. 단순한 잡동사니…….”
“그 잡동사니가 계속 증식하고 있단 말입니다! 어서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심원석이 두 동강 나면서 고양이 인형의 대방출이 또 한 번 시작됐다.
굳건하게 세워진 법정 건물 전체가 요란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이.
두 오토마타는 결국 내 말에 따라 건물 바깥의 광장으로 몸을 피신했다.
그로부터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법정에 달린 모든 창문을 박살내면서 고양이 인형들이 흘러넘쳤다.
“저 아래서 대체 무슨 미친 짓을 저지른 겁니까, 층장 슈바인 스트링거?”
나이알레의 으르렁거림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저도 이런 지경까지 될 줄은 몰랐습니다. 신격이 담긴 아이템이 있는데 정작 실전에서 사용해 본 건 처음이었거든요.”
인형들이 만들어내는 파도의 범람.
내가 말한 홍수의 진의를 파악한 두 오토마타들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당연히 만철도시는 이 사태에 대한 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도시 전체가 자가복제하는 고양이 인형들로 뒤덮이는 재난을 예상하는 자들은 우주 전체를 뒤져봐도 없을 터.
법정 앞에 세워진 하얀 고양이 동상이 인형들의 파도에 비틀리다가 결국 무너져 내렸다.
인형 하나의 무게는 가볍기 짝이 없었으나 내부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증식의 파괴력이 그만큼 대단했다.
나이알레가 대기하고 있던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검궁 기사단의 2개 대대를 소집해라, 당장!”
그 말에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장님, 그래서는 안 됩니다.”
“네?”
“기사단 전체를 소집하셔야 할 겁니다. 저 안에서 튀어나올 것은 인형들뿐만이 아니거든요.”
이번에도 나이알레가 더 기민하게 눈치를 챘다. 그녀의 법복이 요동치는 마력으로 인해 세차게 펄럭이기 시작한 것이다.
“엄청난 강자들이 지하에서 올라오고 있군요.”
고양이 인형들이 마그마였다면,
그 마그마들 속에는 흉흉한 바위들이 곳곳에 섞여 있었다.
무기를 되찾아 기세등등해진 등반죄수들이 광장의 지면을 가르고 튀어나왔다.
열댓 명에 가까운 등반죄수들이 위압적인 패기를 내뿜으며 우리 앞을 포위했다.
도시 전체가 그들의 존재감에 움츠러드는 것이 느껴졌다. 저들은 한 명 한 명이 감옥 한 층을 제패할 수 있을 정도의 절대강자들인 것이다.
“층장이여, 순순히 열쇠를 양도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그들의 무기가 일제히 가리키는 곳은 나였다.
까마득한 세월, 악마의 지배 아래 묶여 있었던 그들이 드디어 사태를 파악한 것이다.
“니들이 지금 바깥 공기를 맡을 수 있는 게 다 내 덕분이라는 건 알고 협박하는 거지?”
“암. 물론이지. 그렇기 때문에 자비를 베풀어 준다는 것이다. 층장의 열쇠는 양도가 가능하지. 열쇠를 내놓고 물러나라. 그러면 너와 동료들이 피를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은혜를 발칙하게 갚는 녀석들일세. 누가 죄수 아니랄까 봐. 그치?”
“저항한다면 너를 죽이고 빼앗으면 그만이다. 선택하라.”
이때, 나는 4층의 교도관인 침묵으로 통곡하는 검이 내게 했던 의미심장한 두 마디를 떠올리고 있었다.
- 적어도 이 층에 한해서 그대는 시련의 도전자가 아니오. 거꾸로 시련의 대상이 된다면 모를까.
그 아리송한 말이 이런 사태를 내다보고 한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언제나 게임 속에서 퀘스트의 보상을 따내기 위해 움직였고, 그건 이 감옥 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트로피를 쟁취하기 위해 달리는 스프린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그 ‘트로피’다.
그때, 다른 등반죄수들이 하나씩 말을 보태었다.
“그런데 듣고 있자 하니 마음에 들지 않는군. 마치 네가 우릴 대표하는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고 있잖나.”
“그래. 층장의 열쇠가 필요한 건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 누가 넘겨받든지 간에 쾌적하게 다음 층으로 올라갈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다.”
숨 막히는 위압감이 잠시 누그러졌다.
우리 일행을 향하고 있던 등반죄수들의 살기가, 어느 순간 서로를 향해서도 내뿜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한바탕 살육극을 벌여보자 이건가, 동지들.”
“누구 멋대로 동지라고 부르는 거냐. 저 빌어먹을 기계 속에서 함께 누워있었다고 해도 우리는 절대 화해할 수 없는 경쟁자들 아닌가.”
“그래. 내기의 목숨값이 10개 미만인 녀석들은 뒤로 빠지는 게 나을걸. 고래 싸움에 등 터져 죽는 새우 꼴이 되고 싶지 않으면.”
“웃기시네. 여기 새우가 어디 있나. 전부 고래들뿐이다.”
“재밌는 일이 벌어지는 모양이군! 나도 끼워줘라.”
등반죄수들의 숫자가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강한 자들이 한 장소에 몰려 있다 보니 자연히 육식동물들의 레이더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고양이 인형의 파도가 도시의 모든 도로를 장악하며 혼란의 도가니를 만들어내는 가운데,
광장에 모인 등반죄수들의 숫자는 어느덧 오십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흥미롭군.’
사태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등반죄수들의 육체에 갈무리된 힘은 하나같이 천하를 호령할 만한 수준이었고, 각자의 손에 들린 병장기 역시 하나같이 신병이기의 풍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게 문제지.’
생사를 걸고 싸워보지 않는 한 쉽사리 우위를 판가름할 수 없는 강자들이 즐비하다 보니, 도리어 용감하게 칼을 뽑아 드는 자가 나타나기 어렵다.
누군가가 여기서 내 목을 썬 다음 층장의 열쇠를 쟁취한다손 치더라도, 그는 곧바로 다음 견제 대상이 된다. 트로피의 주인이 옮겨질 뿐이다.
이것은 교도관이 ‘아무런 시련도 내리지 않은 층’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층장 님, 이때가 기회입니다. 지금 당장 포탈로 달아나십시오.”
나이알레가 다가와 내게 속삭였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저들과 싸워봐서 아는데, 무척 강한 자들이에요.”
걱정스런 질문에 오토마타가 싱긋 웃었다.
“9서클 중력 마법사보다 더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글쎄요.”
나이알레는 내게 등을 보인 채 등반죄수들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이제 막 사모하는 대상을 잃어 화풀이할 대상이 필요한 여인입니다.”
캉이가 구미호로 변신하는 것을 신호로 우리 일행은 달아날 준비를 마쳤다.
그 기색을 읽은 등반죄수들이 노성을 터트렸다.
“층장이 도망치려 한다!”
“절대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해!”
각자 돌진 준비를 마친 등반죄수들의 시선이 칼날처럼 나를 옭아맸다.
그런 와중에 만철도시의 법을 수호하는 오토마타가 여유롭게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나이알레의 법복이 폭풍처럼 나부끼며 초대형 술식의 전개를 예고했다.
“이제부터 도시 전체를 판결 장소로 삼겠습니다.”
일순간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압도적 크기의 마법진.
광장을 잠식해 들어가던 고양이 인형들이 하나의 점으로 압축되기 시작했다.
“크으윽…….”
“이 무슨 폭력적인 마법인가!”
그것은 산전수전을 다 거친 등반죄수들마저도 움츠러들게 만들 정도의 공간 지배력이었다.
한층 경이로운 것은 그 무지막지한 압력이 우리 일행과 검궁 기사단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마도제국학파 중력 마법]
[최종영창(最終詠唱)]
[아스트로노미컬 디스트럭션]
압축된 점에서 낯익은 은하수가 뿜어져 나오며 천체파괴술의 위력을 만천하에 떨쳤다.
나이알레의 지팡이인 그라비타스 페룰라. 그 신묘한 매개체가 등반죄수들의 면전을 밝게 비추었다.
“도시의 평화를 어지럽히려는 폭도들, 전원 유죄를 선고합니다.”
배심원들의 투표는 이 순간 생략된다.
“집행 방식은 즉결 처분으로 하겠습니다.”
어쩌면 칸은,
폭류천마검을 들고서도 우리를 설렁설렁 봐주면서 상대했던 것은 아닐까.
아스티나는 존경을 넘어선 숭배에 가까운 감정으로 나이알레의 술식 전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다워. 엄마의 중력 마법은…… 원래 이렇게 무시무시했던 거구나.”
나 역시 계속 감탄하고 싶어했으나 저 술식이 절정에 달했을 때 주변에 막대한 파괴현상을 일으킨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캉이의 목덜미를 찰싹 내리쳤다.
“전속력으로 여기서 벗어나자!”
패도적인 중력폭발이 발생하기 직전에 우리는 광장을 벗어났다.
*
도시가 물에 잠기는 것을 ‘수몰(水沒)’이라 한다.
그렇다면 지금 만철도시가 휘말린 재난은 무엇이라 일컬을 수 있을까.
고양이 인형이 도시 전체를 집어삼키는 광경이니 ‘묘몰(猫沒)’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캉이의 등에 업힌 채로 건물의 옥상과 옥상을 가로지르며 참사의 현장을 내려다봐야 했다.
“이제 충분해. 멈춰 봐, 캉이야.”
한 고층 건물의 옥상 난간에서 발돋움을 하려던 캉이가 황급히 발을 끌었다.
“왜에?”
“포탈 쪽으론 가지 않을 거야.”
내 청천벽력같은 선언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 말에 제르비어스가 반대하고 나섰다.
“왜 그러냐, 용사야. 나이알레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오래 버티진 못할 텐데.”
맞다. 현실적으로 우릴 뒤쫓는 등반죄수들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한 명씩 상대해도 벅찼던 자들이 떼로 덤벼온다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혹시 다음 층으로 가면 잃어버릴 이 폭류천마검 때문이야? 이제 그만 포기하자.”
아스티나마저 나를 달래려 했으나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강력한 무기를 얻는 건 당연히 중요한 일이지. 하지만 오직 그것 때문에 탈출을 미루자고 하는 건 아니야.”
나는 여전히 멈추지 않고 증식하고 있는 고양이 인형을 가리켰다.
멀리서 봤을 때는 영락없이 하얀 파도가 만철도시의 모든 도로와 골목을 가라앉히는 듯한 천재지변이었다.
“아스티나가 빌려준 인형으로 저 난리통을 만들어낸 건 세 가지 목적에서였어. 첫 번째는 제르비어스를 기계 속에서 탈출시키는 것. 두 번째는 등반죄수들의 추격을 교란시키는 것.”
그리고 세 번째 목적은 아직 일행 중 누구에게도 밝힌 적 없던 나만의 추측에 기인하고 있었다.
“단탈리온이 해준 연금술사의 이야기를 기억해? 인간 그룬덴 사니릭투스는 교도관이 된 후, 자신의 욕심 때문에 절멸했던 도시 전체를 이곳에 복구시켰어.”
하지만 그것은 결코 현실 속의 사니릭타운과는 다르다.
연금술과 마정석, 그리고 기원검의 파편으로부터 나온 힘을 빌려 정교하게 짜인 미니어처에 불과하다.
“나는 줄곧 생각해왔거든. 이곳은 가상의 연극 무대나 다름없다고.”
그렇다면 주인공은 누구일까.
마피아의 보스 칸?
법정의 재판장 나이알레?
그 둘이 가장 돋보이는 오토마타인 것은 부정할 수 없겠으나 내 직감은 말하고 있었다.
그들은 결코 이 무대의 주인공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간헐적으로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층장이 이 무대의 주인공일까? 처음에는 그렇게 오해하기도 했지만…… 지하 무기고의 악마와 내기를 벌이면서 그것 또한 아니라는 확신이 섰어.”
도시의 모든 오토마타들이 우리를 환대해주고, 최고급 호텔의 스위트룸까지 내주었다만 층장은 어디까지나 이 도시를 스쳐 지나가는 여행객에 불과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악마가 층장들을 기계 안에 수집하고 있던 것을 설명하기가 어렵다.
우리 모두는 엑스트라다.
이 무대의 숨겨진 주인공은 따로 있다.
“다음 층으로 올라가기 전에, 나는 그 주인공을 이 무대에 한 번 올리고 싶어.”
내 손이 가리킨 곳은 포탈이 있는 도시의 분수대가 아니었다.
만철도시의 외곽지대.
그 어귀에 자리 잡고 있는 극장가였다.
“그러니 만나러 가자. 이 층의 진짜 주인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