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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135화 (135/300)

#135. 무대의 주인공 (1)

나는 그렇게 악마의 심상세계를 박살냈다.

황량한 갯벌에 있었던 나는 어느 순간 등반죄수들과 혈전을 벌였던 검궁의 지하 무기고에 되돌아와 있었다.

쿵! 쿵쿵!

두 동강 난 인형 뽑기 기계는 마치 크레모아가 탄알을 발사하듯 균열에서 인형을 내뱉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 중간 등반죄수들이 갇혀 있는 유리관을 발사했고, 그것들은 무기고의 천장에 날아가 박혔다.

멍하니 내가 만들어낸 황당한 참극을 지켜보고 있는데,

“슈바인!”

“형아!”

아스티나와 캉이가 달려왔다.

얼굴은 반가움에 가득 차 있었지만 일직선으로 내게 다가오지는 못했다. 하얀 고양이 토템이 갓 튀겨진 팝콘처럼 사방으로 비산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탈출한 거야?”

“고양이의 은총을 받았지.”

아스티나는 내 아리송한 대답에 영문을 몰라했으나 자세한 설명을 해줄 시간이 없었다. 천장으로 날아가 박힌 수백 개의 유리관 중에서 제르비어스 폰타인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단탈리온! 제르비어스의 위치를 알려줘.”

마도서는 어렵지 않게 제르비어스의 유리관을 찾아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녀석을 인형 뽑기 기계 속에서 꺼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여전히 유리관 속에서 꼼짝하질 못했던 것이다.

“이 유리관을 열 수 있는 방법은 뭐야?”

- 폭렬마왕 제르비어스 폰타인 님은 현재 고대종 악마의 계약에 붙잡혀 있습니다. 그가 만들어낸 룰에 따라 패배한 것이므로 물리적인 방법 안에선 아무리 강한 충격을 가한다 하더라도 꺼낼 수 없을 겁니다.

“그러면?”

- 계약자를 소멸시킨다면 자유로워질 수 있겠죠. 다행히 용사님께서 악마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기계를 내부에서 붕괴시켰기 때문에 지금의 그는 평범한 오토마타나 다름없어졌습니다.

“오호라. 그렇단 말이지?”

인벤토리에서 디아볼릭을 소환해 꼬나쥐었다.

인형이 계속 증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야가 극히 제한적이었다. 악마의 큰 덩치도 쌓여가는 인형들에 파묻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녀석이 묶여 있을 기둥은 천장과 연결된 유일한 구조물이었기에 대략의 방향은 추정할 수가 있었다.

“이야압!”

수직으로 쳐든 디아볼릭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마검이 뿜어내는 검파가 상어의 등지느러미처럼 인형 더미들을 헤쳐나갔다.

곧 기둥에 묶인 악마와 나를 연결하는 일직선의 길이 만들어졌다.

나는 디아볼릭을 어깨에 멘 채 뚜벅뚜벅 걸어갔다.

“안 돼! 오지 마라!”

악마는 사슬을 뜯어내려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하지만 온전히 힘을 갖고 있을 때에도 불가능했던 것이 약해진 상태에서 가능할 리가 없었다. 사슬은 무정한 파찰음만 낼 뿐 조금도 꿈쩍하지 않았다.

악마의 꿈틀거림은 디아볼릭의 검날이 목에 들이밀어졌을 때에야 멈췄다.

“크게 실수하는 거다, 등반죄수여.”

“실수는 내가 아니라 네 쪽에서 먼저 저질렀지. 불공평한 계약조건으로 등반죄수들을 등쳐먹을 때는 신나 했으면서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나 봐?”

“너는 내기에서 승리한 게 아니다. 그저 내기판을 뒤엎었을 뿐. 나를 죽인다 하더라도 폭류천마검을 다음 층으로 갖고 가진 못한다. 너는 헛수고를 한 셈이야.”

“플랜 A가 여의치 않았다는 건 인정하지.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순 없어. 플랜 B대로 가면 그만이야.”

악마의 입이 쩍하고 벌려졌다. 내가 말한 플랜 B가 어떤 것일지 감을 잡은 듯한 모습.

“네 녀석, 설마 교도관을……!”

카각!

나는 망설이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어차피 없앨 녀석의 넋두리를 오래 들어줄 필요는 없었으니까.

몸통과 머리가 분리되자 악마의 육체는 빛무리와 함께 허물어졌다. 구속 대상을 잃어버린 굵은 사슬만이 처량한 소리를 냈다.

뒤를 돌아보자 아스티나가 캉이의 눈을 손바닥으로 가린 채 볼멘 소리를 냈다.

“냅다 베어버릴 거면 미리 신호를 좀 줘. 교육상 안 좋은 광경이잖아.”

“왜에? 나는 괜찮아, 누나. 내가 있던 3층에서는 더한 것도 많이 봤는걸.”

“폭력에 너무 무감각해지는 것도 안 좋아, 캉이야.”

“얘, 이래 보여도 구미호야. 인간이랑 같은 기준으로 생각하는 게 좋지 않을 수도 있어.”

우리가 어린 구미호의 교육 안건에 대해 떠들고 있을 때 유리관에서 해방된 제르비어스가 지면에 착지했다.

“폭렬마왕, 복귀했다.”

녀석은 나름대로 망토를 펄럭이며 폼을 잡고 싶은 듯했으나, 안타깝게도 푹신한 고양이 인형 무더기 위에 내려앉은 거라 카리스마는 전혀 눈에 뜨이지 않았다.

구속에서 해방된 것은 제르비어스뿐만이 아니었다.

악마와의 내기에서 패배해 기나긴 시간 동안 갇혀 있던 등반죄수들이 일제히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드디어 풀려났다!”

“어떻게 된 거지? 누군가 악마를 패배시킨 건가.”

“단순히 패배가 아니라…… 녀석을 죽인 것 같다.”

등반죄수들은 인형에서 불려 나왔을 때처럼 말을 더듬지 않고 유창하게 대화했다.

아직은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겠지만 분명 머지 않아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니 그 전에 먼저 움직여야 한다.

“저들이 전부 몇 명이지, 단탈리온?”

- 232명입니다. 지금껏 용사님의 등반 과정에서 보아온 자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무력집단이 탄생한 겁니다.

악마가 내게 말한 ‘실수’라는 것은 바로 저들을 만천하에 풀어준 것을 말한 것일 터다.

물론 지금 당장 행동을 개시하지 않으면 녀석의 말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꼴이므로,

나는 망설임 없이 후퇴를 결정했다.

“우리가 들어왔던 곳으로 달아나야 해. 지금 당장.”

232명의 등반죄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제 발로 이 지하 무기고에 걸어들어온 강자들이다.

하지만 그들에 비해 우위가 있다면 까마득히 오래전에 이곳에 온 저들과 달리 우리는 불과 몇 시간 전에 암스트롱의 안내를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출구의 위치에 대한 기억이 아직 생생한 이점을 이용해야 했다.

“가자!”

그렇게 우리는 인형을 헤치고 출구를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측면에서 거센 파공음과 함께 무기가 날아들었다.

불시의 기습인가 싶어 받아치려는 순간에 나는 그 형체가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맹렬한 기세로 날아오다가 아스티나의 눈앞에서 멈춰버리는 불세출의 명검.

폭류천마검이 울고 있었다.

“아스티나, 너를 찾아온 것 같은데?”

잠시 머뭇거리던 아스티나가 폭류천마검의 칼자루를 움켜쥐자 그녀를 중심으로 거센 기파가 터져 나왔다.

고양이 인형들이 자석에 튕겨나가는 쇠공들처럼 길을 비켜주었다.

“나와 함께 가고 싶어하는 것 같아.”

강맹한 기운에 휩싸인 아스티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뒤편에서 연거푸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의지를 가진 무기들이 각자의 주인을 찾아 본래의 힘을 회복해 생기는 연쇄작용.

우리는 다시 도주에 박차를 가했다.

“서두르자! 여기에 계속 있다간 파묻히겠어.”

*

만철도시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재판은 이제 막 종료되었다. 더 이상 장내에 남아 있는 청중이나 배심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높은 자리의 재판장석은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재판장님, 아직 남아 계시는 겁니까?”

나이알레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강인한 오토마타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어깨에 푸른 장식이 달린 하얀 제복. 청안의 백묘에서 모티브를 따온 제복이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기사단장.

검궁 기사단의 일인자인 에니찰리드였다.

“생각할 거리가 있어서요.”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시라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군요. 외람된 질문이 아니라면 무엇을 그리 골똘히 생각하시고 계셨는지 여쭐 수 있을까요?”

“우리 오토마타의 ‘숙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만들어진 목적에 부합하게 되는 순간 다시 가장 작은 부품인 ‘원자’로 환원되는 자동인형. 피고인으로 재판장에 불려온 주제에 숙원을 이뤘다면서 해사하게 웃던 사내의 얼굴이 제 마음을 어지럽히는군요.”

“재판장님께선…… 이해할 수 없지만 마피아의 보스에게 독특한 입장을 견지하고 계셨으니까요.”

무어라 이어갈 말을 찾고 있는 듯한 기사단장 에니찰리드에게 낭랑한 질문이 날아들었다.

“기사단장님, 그대의 숙원이 무엇인지 들어볼 기회가 없었군요. 혹시 말해줄 수 있습니까.”

“만철도시의 완벽한 평화입니다.”

에니찰리드의 어깨가 빳빳하게 펴졌다.

나이알레는 그녀와 그녀가 이끄는 검궁 기사단이 얼마나 철저하게 자신을 단련하고 몰아세우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나이알레가 만철도시의 심판자라면 눈앞의 기사는 만철도시의 수호자였다.

“검궁 기사단의 가장 큰 적이었던 마피아가 오늘 완전히 궤멸되었으니 그대의 숙원은 이루어졌다고 봐도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에니찰리드는 칸이나 사이브리즈처럼 빛무리가 되지 않았다. 그것은 아직 자신이 만들어진 목적을 끝까지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무릇 평화란 언제든 깨어질 수 있는 일시적인 상태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일리 있는 해석이군요. 그렇다면 그대는 아주 오랫동안 나와 함께 지지고 볶으며 도시의 붙박이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군요.”

“저야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만…… 재판장님께서는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나이알레가 재판장석에서 걸어 내려왔다.

지금 자신의 얼굴에 드러나 있는 회한의 표정이 만철도시의 심판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 숙원은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네?”

도시의 죄를 판별하고 벌을 집행하는 심판자. 그러나 나이알레의 숙원은 그런 대의명분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늘 재판이 끝나기까지 저는 제 숙원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칸이 완전히 먼지로 되돌아간 후에야 비로소 명징하게 깨달아지더군요. 내 숙원이 무엇이었는지를, 그리고 그 숙원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나이알레의 손바닥이 텅 빈 피고인석의 등받이를 쓸어내렸다.

칸이 마지막으로 머물러 있던 장소.

오토마타는 금속으로 이뤄져 있으나 부품들이 맞물리면서 발생시키는 ‘열’이 있다. 체온과 비슷한 수준의 미열.

“제 숙원은 칸과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

“물론 불경한 일이지요. 도시의 빛을 관장하는 자와 어둠의 지배자가 한 몸이 되는 일은 있을 수 없으니까요.”

이제 그것은 결코 이뤄질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무한히 0에 수렴하는 확률이 되어버린 것이다.

“위대한 연금술사께서는 어째서 우리를 서로 사랑하게 만들어놓은 뒤,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위치에 가져다 놓으셨는지 원망스럽군요.”

그래서 에니찰리드와 나이알레는 비슷한 처지다.

둘 다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숙원을 갖고 있으니.

에니찰리드는 평소엔 잘 하지 않는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대화의 화제를 바꿔보기로 한 것이다.

“이번 층장 님께서는 돌아오실 수 있으실까요? 지하 무기고로 내려간 층장이 귀환하는 일은 무척 드물지 않습니까.”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나이알레의 눈빛이 다시 원래의 날카로움을 되찾은 것이다.

“저는 검이나 창을 드는 무인은 아닙니다. 그래서 한 인간의 육체에 담긴 무력에 큰 관심은 없지요. 대신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 의지에 더 마음을 쓰게 되었답니다.”

나이알레가 본 슈바인의 눈빛에는 그 불꽃이 담겨 있었다. 지옥의 밑바닥에 내려꽂히더라도 바득바득 올라오고 말겠다는 불굴의 의지가.

“물론 내려간 지 세 시간도 채 되지 않았으니, 그가 귀환한다 하더라도 무척 긴 기다림이 될…….”

쿠르릉.

순간 두 오토마타는 재판장 전체를 미약하게 진동시키는 움직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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