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등가교환 (4)
철벅.
드래곤하트 플레이트의 철화에 진흙이 달라붙는다.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니 드넓은 갯벌 위에 수백 개의 유리관이 일정한 간격으로 누워 있었다.
“제르비어스! 어디야?”
파천황의 권능인 순간이동은 같은 층에 있는 죄수 곁으로 날아갈 수 있도록 해 준다. 그 중간에 아무리 강력한 결계가 있어도 이 권능이 파훼된 적은 없었다.
그러니 마왕의 들어있는 유리관은 분명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예상은 적중했다.
“……!”
유리관 속에서 눈동자만 꿈뻑이고 있는 제르비어스를 곧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 있군. 기다려 봐. 외부에서 꺼낼 수 있는지 한 번 시도해 볼 테니까.”
디아볼릭을 꺼내 검기를 입혔다.
현무패웅검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검기를 유지하고 있는 마검을 들어 유리관을 내리쳤다.
타앙!
내가 일으킨 충격파에 갯벌의 진흙들이 밀려 나갔으나 유리관엔 작은 흠집도 나지 않았다.
제르비어스는 유리관 안에서 성난 눈빛을 내게 쏘아댔다. 녀석의 입장에선 꼼짝할 수 없는 상황에서 디아볼릭의 살신참을 그대로 받아내는 상황이었으니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겠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던 제르비어스는 곧 귓속말로 의사를 전하면 된다는 발상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 깜짝 놀랬잖아, 이 자식아! 왜 대뜸 공격하는 거냐!
- 바깥에서 파괴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본다고 했잖아. 아, 안 들린 건가?
- 안 들렸다, 이 호랑말코 같은 놈아!
눈을 마주치고 있는 상황에서의 귓속말은 또 신선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마왕의 투덜거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설마 아무 계획 없이 제 발로 여길 들어온 건 아닐 거잖아.
- 당연하지. 나를 뭘로 보고.
- 바깥은?
- 아스티나와 캉이가 버텨주고 있어. 다만 오래가진 못할 거야.
제르비어스가 인형으로 빨려 들어간 직후, 순간이동을 시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위험했다.
이제부터 내가 시도할 작전은 절대 100초 안에 끝날 일이 아니었기에.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도 등반죄수를 최소한 한 명은 꺼내놔야 했다.
순간 머릿속이 노이즈가 낀 것처럼 시끄러워졌다.
- 죄.수.여.어.찌.그.대.는.자.유.로.운.가.
- 부.디.우.리.도.자.유.롭.게.해.다.오.
- 감.옥.속.의.또.다.른.감.옥.에.갇.힌.지.너.무.오.래.되.었.단.말.이.다.
등반을 할 만큼 뛰어난 죄수들은 무림 세계관의 전음이나 텔레파시 마법 같은 수단들을 저마다 갖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런 제재나 구속 없이 움직이는 나를 유리관 안에서 보고는 아우성을 치고 있는 것이다. 진짜 교도소에서 복도를 거니는 탈옥수를 발견한 죄수들처럼.
“다들 입 다물고 있어 주지 않겠어? 집중하는 데 방해되거든. 혹시 알아?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기다리고 있으면 뜻밖의 기적이 찾아올지.”
수군거림이 잦아들었다.
나는 인벤토리를 열어 두 개의 아이템을 꺼냈다.
하나는 이 기계 안으로 뛰어들기 전에 아스티나에게서 빌려 온 앙증맞은 인형.
[이름: 깜찍한 고양이 토템]
[등급: D급]
[인형의 귀여움으로 소지자의 기분을 들뜨게 만들어 줍니다. 인벤토리에 넣으면 행운 스탯을 1 올려 줍니다.]
또 하나는 대수림의 교도관인 ‘증식하는 밀림의 뱀’에게서 떼어낸 손바닥만 한 비늘.
[이름: 탐식하는 신화종의 비늘]
[등급: S급]
[사용횟수: 3/3]
[차원감옥의 한 층을 관리하는 신격 존재로부터 떨어져나온 파편입니다. 이 비늘을 사용하면 B등급 이하의 아이템을 무한히 증식시킬 수 있습니다. 중지를 외치기 전까지 복제가 멈추지 않으니 주의하십시오. 증식한 아이템의 유지 시간은 24시간입니다.]
고양이 토템 위에 신화종의 비늘을 갖다 대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아이템을 사용하겠다고 마음먹자 비늘에서 흘러나오는 신비로운 색채가 고양이 토템에게로 옮겨갔다.
[탐식하는 신화종의 비늘을 사용했습니다.]
[D급 아이템 ‘깜찍한 고양이 토템’이 무한 증식합니다.]
[남은 사용횟수 2/3]
결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지만 2층에서 나는 마왕의 저주를 자원해 받아들이면서 심마에 빠진 기억이 있다.
그곳에서 두 부모님의 목숨과 내 다리를 앗아갔던 끔찍한 자동차 사고가 무한히 반복되는 심상 세계에서 고통받았었다.
덕분에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유심히 관찰할 기회가 없을 광경을 연거푸 지켜봐야 했는데,
그것이 바로 에어백이 버섯처럼 순식간에 피어오르는 순간이었다.
두두두두두두두두.
차체 안에 압축되어 있던 에어백이 기묘하게 부풀어 오르는 엄청난 속도.
그것을 훌쩍 뛰어넘는 경이로운 속도로 하얀 고양이 토템이 ‘증식’하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복사된 고양이 토템이 땅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복사된다. 그 과정은 연쇄적이었고 어느덧 내 시야의 3분의 1 이상은 하얀색으로 채워지게 될 정도였다.
철벅. 철벅. 철벅.
수십 개의 인형이 곧 수백 개로, 금세 수만 개의 인형으로 늘어났다. 초 단위로 숫자가 미친 듯이 갱신되는 인형들이 갯벌을 가득 메워 나갔다.
- 용사야, 대체 이게 뭐 하는 거냐?
- 잠자코 지켜 봐. 내 계산대로라면 곧 반응이 올 테니까.
증식하는 인형의 파도는 곧 갯벌 전체를 뒤덮었고, 자연히 등반죄수들이 갇혀 있는 유리관은 이제 밑바닥에 깔려 보이지도 않았다.
이곳은 고대종 악마의 복사본이 만들어낸 심상 세계다.
강력한 등반죄수들을 붙잡아놓고 마음대로 꺼내쓸 수 있을 정도니 녀석이 부리는 힘은 굉장할 것이다.
하지만 깨트리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교도관장이나 파천황 르팔타커스 시온, 혹은 뇌신 지드가 만들어낸 심상 세계처럼 신격이 지배하는 공간까지는 될 수 없다.
악마는 강대한 존재이지만 그 정도까진 아닌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영혼을 걸고 하는 내기’ 같은 번잡스러운 룰을 만들 필요도 없었을 터. 강제로 자신의 심상 세계에 죄수들을 가둬버리면 그만일 테니까.
‘그럴 수 없다는 것은 공략할 실마리가 있다는 거지.’
어느새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고양이 토템들이 무시무시하게 늘어났다.
어느덧 100층 빌딩을 훌쩍 넘는 높이로 쌓아 올려지는 인형들의 압박감은 대단했다. 이제는 그 무게만으로 압사당하는 걸 걱정할 정도였다.
‘내가 조작해낸 환경에 질식해서 죽으면 웃음거리도 안 되지.’
내공을 끌어올려 반탄지기로 드래곤하트 플레이트를 둘렀다. 그러자 반경 10센티미터 안으로는 인형이 공간을 파고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다.
제르비어스가 내 생각을 따라잡은 모양이다.
- 이 돌아버린 용사놈. 인형을 계속 증식해서…… 이 공간 자체를 터트려버릴 생각이구나.
- 맞아. 마법이나 권능으로 유지되는 인위적인 세계라면 반드시 규격에 한계가 있어.
인형을 하나씩 꺼내서 상대한다?
그렇다면 기다리는 것은 필패뿐.
차라리 스스로 함정으로 걸어 들어가 판 전체를 폭파시키는 전법을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내 작전은 예상보다 훨씬 굉장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 만약 이 공간이 박살나기 전에 아스티나와 캉이가 패배한다면 어쩔 거냐.
- 너희가 나를 믿듯이, 나도 너희들을 믿어. 녀석들은 반드시 내 작전이 열매를 맺을 때까지 버텨줄 거야.
짐짓 강한 척을 했지만 걱정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나는 하얀 고양이들로 가득 찬 갯벌의 중심에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
[마도제국학파 중력마법]
[그래비티 슬래시]
아스티나 류가 만들어낸 공간참격이 파계승 울라한을 향해 날아갔다.
울라한의 금강곤봉이 그것을 튕겨냈으나 측면에서 휘둘러진 구미호의 꼬리는 미처 피해내지 못했다.
퍼어어어억!
캉이의 꼬리가 울라한의 허리에 직격했으나 파계승은 공중제비를 돌아 우아하게 착지했다.
본래였다면 네 명이서 상대했어야 할 강적을 고작 둘이서 상대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지난한 일이었다.
“포.기.하.라.그.대.들.을.기.다.리.는.건.승.천.뿐.이.다.”
등반죄수 울라한은 ‘그만 단념하고 뒈져라’는 말을 고상하게 표현했다.
이미 탈진 상태에 가까운 상대들의 체력을 진작에 파악한 것이다.
아스티나는 상대의 그런 여유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하려면 내 팔 하나는 잘라놓고 얘기해야 맞지 않아?”
무기고의 한가운데서 마검사와 파계승이 맞붙었다.
아스티나의 청룡패웅검이 울부짖었으나 울라한은 절묘한 동작으로 상대의 초식을 상쇄시켰다.
“아.직.감.정.을.죽.이.는.방.법.을.모.르.는.구.나.”
울라한이 금강곤봉을 땅에 꽂은 뒤 그것을 축으로 삼아 비각술을 펼쳤다.
내공을 실은 파계승의 발차기가 흑기사의 갑옷에 적중하며 안쪽 착용자의 내장을 진탕으로 만들었다.
“크윽.”
뒤로 물러난 아스티나의 입가에 핏방울이 맺혔다.
내상을 입은 것이다.
결코 단시간에 회복할 수 없는 치명적인 일격을 허용했다.
승부는 이 시점에서 이미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누나! 괜찮아?”
아스티나가 흔들리자 캉이가 마구잡이로 앞발을 휘둘렀으나 울라한의 절대방어에는 통하지 않았다.
여우트림을 내쏠 기력을 다 상실했기에 캉이는 맨몸으로 파계승에게 덤볐으나 역부족이었다.
‘목숨을 건다면 아수라 대멸겁을 한 번 시전할 수 있을지도 몰라.’
동귀어진의 각오로 아스티나 류가 청룡패웅검의 칼자루를 다시 붙잡았을 때,
그 일은 일어났다.
까작.
격전을 벌이고 있던 셋은 물론이거니와 흥미롭게 관전하고 있던 고대종 악마 또한 그 소리를 들었다.
유리잔에 실금이 새겨질 때 들려오는 파열음.
그 불길한 소리의 진원지는 인형 뽑기 기계였다.
“내 힘이 사역하는 공간을 두들기고 있다고? 그게 가능할 리가…….”
악마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당혹감이 엿보였다.
아스티나는 자세한 영문을 몰랐으나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자발적으로 저 위험한 기계 속으로 뛰어든 슈바인 스트링거가 제대로 사고를 친 게 틀림없었다.
티이이잉!
인형 뽑기 기계에서 뭔가가 튀어나와 울라한과 아스티나에게로 날아왔다.
기계를 주목하고 있던 두 고수는 각기 반대 방향으로 발을 굴러 그것을 피해냈다.
“나사못?”
날아온 것은 인형 뽑기 기계를 지탱하고 있던 부품의 일부들이었다.
견고함이 부서지고 있는 기계는 심지어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요동치고 있었다.
기둥에 묶인 악마가 다급하게 외치기 시작했다.
“안 돼! 그만해라. 그랬다가는 내가 가둔 죄수들이 전부 해방되고 말아.”
악마의 외침은 마지막에 가선 거의 비명과 구분하기 힘든 무언가로 변해 있었다.
“하, 항복! 항복이다! 너희들이 이겼다. 그러니 네 동료에게 제발 저 짓거리를 멈춰달라고 해 다오.”
악마가 아스티나를 보며 애원했다.
이게 어찌 된 영문일까.
여기에서 녀석의 항복 선언을 받아들이면 다 끝나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게 슈바인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면 어떡하지?
아스티나가 고민하던 사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렸다.
콰아아아아앙!
결국 두 동강이 나버린 인형 뽑기 기계에서 마그마가 분출하듯 어마어마한 숫자의 하얀 고양이 토템이 치솟아 올랐다.
악마도, 캉이도, 심지어 등반죄수 울라한마저도 이성을 농락하는 기묘한 광경을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경동맥에 상처를 입은 맹수가 주변에 피보라를 일으키는 것과 흡사했다.
주변이 피웅덩이가 되는 대신에 모래알처럼 많은 고양이 인형이 언덕을 만들어내는 것이 다를 뿐.
“안 돼! 내 힘이 빠져나가고 있어.”
기둥에 묶인 악마가 몸을 뒤틀었으나 사슬의 힘은 강력했다.
어느덧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하얀 고양이떼가 악마의 가슴께까지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건 말이 안 된다.
악마의 뛰어난 술수로도 인형을 계속 복사하는 이 신묘한 권능의 정체를 도무지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드, 등가교환의 법칙을 이렇게 박살낸다고?”
그것은 악마마저도 질리게 하는 무한 증식.
“네 항복을 받아들여 주고 싶은데…….”
아스티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악마에게 말했다.
“어떡하니? 이미 늦은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