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133화 (133/300)

#133. 등가교환 (3)

성전사 쿠자가르트.

그의 완력은 ‘근력 999’를 찍은 나와의 힘겨루기에서도 우위를 가져갈 정도로 대단했다. 그리스 신화 속의 헤라클레스와 목숨을 걸고 겨룬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그나마 단점이라고 한다면 괴력에 비해서 민첩성은 다소 떨어진다는 점과 커다란 체구로 인해 아스티나의 쾌검을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투척과 동시에 4개로 갈라지는 특대검의 변화무쌍한 원거리 공격이 그 약점을 감싸주고 있었다.

결국 싸움은 장기전으로 접어들었다.

“지금이다, 용사야!”

제르비어스의 오메가 위프가 쿠자가르트의 왼쪽 다리를 완전히 옭아맸다. 채찍을 타고 전해지는 보라색 마기가 성전사에게는 더욱 큰 고통을 안겨주는 듯 보였다.

캉이와 내가 쿠자가르트의 앞뒤에 선 채 동시에 여우트림을 내쏘았다.

콰아아아아아!

움직임이 봉쇄된 채 광선포의 포격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던 쿠자가르트의 몸에서 탄내가 피어올랐다.

“패.배.인.가.넷.은.아.무.래.도.무.리.였.군.”

금이 간 투구로 보이는 쿠자가르트의 눈빛은 허망했다.

그가 선 자세로 바닥을 향해 고꾸라지는데, 바닥에 쓰러진 것은 거구의 성전사가 아닌 20분의 1 크기인 봉제인형이었다.

“쓰러트리면 인형이 된다는 건가?”

그를 포위한 채 몰아치던 우리 넷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느닷없이 덤벼온 초강자와 진심으로 싸우느라 급격히 힘을 몰아 쓴 것이다.

그때, 등 뒤에서 악마의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인상적이군. 이제 32번 남았다, 등반죄수.”

악마가 묶인 기둥 앞에는 난리통 속에서도 흠집 하나 나지 않은 인형 뽑기 기계가 여전히 다음 도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저 안에 들어있는 수백 개의 인형들이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

“역시 평범한 기계가 아니었잖아.”

어째서 만철도시에 살아 있는 죄수는 단 한 명도 없었던가. 그것은 도시의 시민이 전부 오토마타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인형을 뽑으면 죄수가 튀어 나온다.

저건 내기에서 패배한 등반죄수들의 무덤이었다.

*

드워프가 검을 휘두른다면 어떨 것 같은가.

그리고 그 드워프가 든 검이 한 자루도 아니고 두 자루의 쌍검이라면 또 어떨 것 같은가.

또한 그 드워프가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아니라 2미터는 되는 장발을 휘날리는 여자라면 어떨 것 같은가.

만약 게임 속에서 그런 캐릭터와 마주쳤다면 나는 웃었을 것이다. 지독한 부조화로 점철된 디자인을 조합해낸 게이머의 뒤틀린 유머 감각에 박수를 쳐 줬을지도.

하지만 여성 드워프 쌍검전사 스누트라의 변화무쌍한 공격을 받아내는 나는 웃을 수도, 박수를 쳐줄 수도 없었다.

“항.복.하.라.등.반.죄.수.여.그.러.면.편.해.진.다.”

악마의 인형 기계에 사로잡히면 다 저렇게 말투가 어눌해지는 건가. 스누트라는 속수무책으로 그녀의 공격을 받아내는 내게 연거푸 말을 걸었다.

그러면서도 쏟아내는 검무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다리를 노려온 검 하나를 막아내면 그 궤적 뒤에 따라붙은 또 다른 검이 목젖을 꿰뚫으려 한다.

카아앙!

“포기는 당신이나 해. 인형이 되고 싶은 취미는 없거든.”

드래곤하트 플레이트를 착용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벌써 몇 번이나 급소에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스누트라와 혈투는 실시간으로 내가 갖고 있던 편견이 박살 나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그녀와 싸우면서 나는 몰랐던 사실을 새로 깨우치기도 했다.

첫 번째로 드워프의 짤막한 신장과 리치는 칼싸움에서 당연히 불리해야 함에도 스누트라에겐 해당사항이 없었다. 그것을 커버하는 검술 실력과 재빠른 발놀림이 있었기에.

또한 쌍검은 공격력을 중시하는 겉멋 든 자들의 선택이라고 착각했다. 아니었다. 쌍검의 진가는 다수를 상대로 수세에 몰렸을 때 발휘되었다.

그녀가 휘두르는 두 자루의 검은 아담한 체구 전체를 커버하는 검막을 펼치는 데 유용했다.

동화 속 라푼젤을 연상케 하는 스누트라의 늘어진 머리카락도 단순 겉멋이 아니었다. 손가락처럼 주인의 의사에 따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머리카락은 지면에 앵커처럼 박힌 뒤 기괴한 도약을 가능하게 해줬다.

머리카락을 방패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아스티나가 이를 악물고 스누트라를 몰아쳤을 때 캉이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스나이퍼처럼 여우트림을 내쏘았는데, 그녀의 머리카락이 공작새의 깃털처럼 펼쳐지더니 충격을 감소시킨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스누트라를 쓰러트리는 데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수적 우위 덕분이었다.

쉼 없이 그녀를 몰아치면서 다른 셋이 태세를 정비하며 장기전으로 끌고 가 가까스로 체력을 소진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원.통.하.다.나.는.둘.만.더.잡.으.면.자.유.인.데.”

그것이 지면에 꽂은 쌍검에 기댄 채 숨을 헐떡이던 스누트라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그 직후 그녀를 꼭 닮은 인형 하나가 바닥에 떨구어졌다.

“다들 괜찮아?”

아스티나와 캉이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차마 힘들어 죽겠다는 말을 꺼내지 못해서라는 게 뻔히 보였다.

“살려다오, 용사야. 삼월초원에서 마교도와 마법사들을 한 번에 상대했을 때도 이 정도의 강행군은 아니었다고.”

제르비어스는 얼굴이 반쪽이 된 채 괴로워하고 있었다.

근거리는 나와 아스티나가, 원거리는 캉이가 커버하고 있는 전법에서 제르비어스만이 오메가 위프의 우월한 범용성 덕분에 전방위로 움직이며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체력 소모가 우리 중 가장 막대할 수밖에 없다.

“등반죄수여, 휴식 시간은 100초에 불과하다. 레버를 잡지 않은 채 그 이상의 시간이 경과하면 실패로 간주된다.”

기둥에 묶인 악마가 무미건조하게 우리를 향해 충고했다.

“망할 새끼. 이 디아볼릭으로 널 한 방 후려쳐도 그렇게 우릴 약 올릴 수 있는가 볼까.”

“그대 이전에 그런 시도를 했던 등반죄수가 여태껏 없었겠는가. 하지만 지금의 내가 멀쩡하다는 사실에서 부디 교훈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지.”

“입은 살아선.”

“82초 남았다. 나와 투덕거릴 시간으로 낭비하긴 아까울 텐데.”

녀석의 말이 맞았다.

나는 침통한 심정으로 기진맥진한 일행들의 몰골을 쳐다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은 나도 마찬가지다.

[HP: 2,317/9,999]

어느덧 위험한 수준까지 체력이 낮아져 있었다.

게다가 스탯으로 표기되진 않지만 연전을 거듭하게 되면 ‘집중력’이라는 소중한 자원이 끝없이 고갈되기 마련이다.

이렇게 몇 명이나 더 쓰러트릴 수 있을까.

스누트라는 우리와 맞서 싸운 여섯 번째 등반죄수였다.

내기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앞으로 이 정도의 강자와 무려 스물일곱 번을 내리 싸워야 한다.

그때까지 우리의 목숨이 붙어 있을 확률은 극히 희박했다.

‘저 기계 안에 붙잡힌 녀석 중엔 만만한 놈이 없어.’

몇 층에서 올라왔더라도 등반죄수의 자격을 얻었다는 것은 한 층의 최강자로 군림할 만큼 뛰어난 강자라는 소리.

네 번째로 튀어나온 등반죄수였던 리저드맨 제미칼리스란 녀석은 특히 강력했다. 그 녀석보다 상대하기 어려운 녀석이 튀어나올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55초.”

아스티나는 한 명이 적의 타깃이 되어 도망치는 동안 다른 셋이 전장에서 멀찍이 떨어져 휴식을 취하자는 의견을 냈었다.

하지만 나는 고심 끝에 그 작전을 기각했다.

전원이 달려들어 싸웠기에 여섯 명이나 잡아낼 수 있었던 거다. 일 대 일로 상황이 흘러간다면 타깃이 된 멤버가 무사할 거라는 보장이 없다.

상대 쪽도 절박하긴 마찬가지. 각자 자신의 무기에 할당된 영혼의 수를 채우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따라붙는다.

그런 강자와의 술래잡기를 긴 시간 유지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37초.”

내가 예상한 바에 따르면 이대로 내기를 강행한다면 열 번째, 어쩌면 아홉 번째 등반죄수가 출현했을 때 전멸하게 되는 수순이다.

차라리 희박한 가능성에 불과하더라도 불리한 상황을 일거에 뒤집을 수 있는 절묘한 한 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29초.”

나는 스톱워치처럼 남은 시간을 읊조리는 악마를 무시하고 제르비어스에게 다가갔다.

“마왕, 날 믿고 목숨을 한 번만 맡겨줘.”

“……평소엔 안 그랬던 것처럼 말하지 마라.”

제르비어스는 설명할 시간이 없다는 걸 이해했기에 자신이 무얼 해야 하는지만 물었다.

“나 대신 레버를 조작해줬음 해.”

“괜찮겠냐. 난 성공할 자신이 없는데.”

“어. 아마도 실패하겠지? 그리고 내가 바라는 것도 바로 그 지점이다.”

마왕은 인형 뽑기에서 실패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다음 작전의 실마리를 뽑아낼 수 있게 되니까.

“18초.”

이 부탁인즉슨 저 얄미운 악마 놈에게 본인의 영혼을 건네주라는 소리였다. 차마 그것만큼은 못하겠다며 거부를 하더라도 이해할 생각이었으나,

“하지.”

폭렬마왕은 망설이지 않았다.

녀석은 성큼성큼 기계 앞으로 걸어가 지금까지 나 홀로 조작했던 레버를 손에 쥐었다.

“성공확률은…….”

“말하지 마라. 확률을 따져서 판단한다면 진정한 믿음이라 할 수 없으니.”

제르비어스는 레버를 손에 쥐기만 했을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금속 집게는 허망하게 까딱거리다가 빈 허공만을 움켜잡았고, 뽑기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후후후. 싸움에 지쳐 편해지고 싶었던 건가. 어쨌든 도전자의 영혼은 이제 내 것이다.”

인형으로 줄어든 마왕이 빛에 빨려 들어갔다.

곧바로 기계 내부를 확인해보니 뿔이 달려 있고 망토가 구겨진 봉제 인형 하나가 인형 더미 위에 생겨나 있었다.

머리 위에서 악마가 나를 조롱했다.

“그렇게 번거로운 방법을 쓸 필요까진 없었다, 등반죄수여. 그저 내게 항복이라고 한 마디만 하면 된다. 그러면 아주 편안하게 나머지 셋 또한 먼저 붙잡힌 친구 옆으로 안내해주지.”

녀석이 중얼거리는 걸 한 귀로 흘리면서 나는 제르비어스에게 귓속말을 걸었다.

- 마왕, 들리냐?

초조함을 느낄 정도의 공백 이후 대답이 돌아왔다.

- 그래, 듣고 있다.

- 다행히 귓속말은 가능하다는 거군. 어떤 상황인지 설명해 주겠어?

-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구속되어 있다.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가 없군. 도축 상점을 생각하면 될 거다. 비할 데 없이 강력한 죄수들이 투명한 관에 갇힌 채 방치돼 있다.

- 의식은 깨어 있지만 행동이 구속되어 있다는 거군. 필요한 정보는 다 얻었다.

- 도움이 된 거냐.

- 그래. 거기서 조금만 참아. 금방 꺼내줄 테니까.

내가 인형 뽑기 기계 속에 빨려 들어간 제르비어스와 대화하고 있음을 알 리 없는 악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할 텐가. 항복하지 않는 건가.”

“다시 내가 도전자가 된다.”

“희한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군. 그럴 거라면 어째서 귀중한 동료를 포기한 거지?”

미안하지만 그것까지 알려줄 의무는 없다.

나는 제한 시간인 100초 제한에 걸리지 않도록 곧바로 레버를 조작했다.

역시 정밀한 컨트롤으로 인형 하나를 집어서 밖으로 빼내었다.

쿠우우우웅.

이번에도 역시 강력해 보이는 등반죄수가 출몰했다.

너덜너덜해진 승복 안에 꿈틀거리는 근육이 예사롭지 않다. 살생을 저지른 파계승이라도 되는 건가.

그 등반죄수가 악마에게서 곤봉을 넘겨받는 동안 나는 아스티나와 캉이에게 말했다.

“둘이서 잠시만 버텨줘.”

“너는 어떻게 하려고? 피신해 있을 거야?”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략상 필요하다면 도주도 고려하겠지만 지금은 그럴 타이밍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선택해야 한 길은 ‘적진으로의 잠입’이었다.

“친구 제르비어스 폰타인의 곁으로 순간이동!”

우렁찬 외침과 함께,

나는 인형 뽑기 기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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