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129화 (129/300)

#129. 하얀 고양이 법정 (2)

올곧게 벼려진 검과 같은 여성의 음성.

문을 열어주니 눈앞에 검궁 기사단장 에니찰리드가 꼿꼿하게 서 있었다.

“여러분을 모시러 왔습니다. 재판장님께서 마피아를 일망타진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 분들을 참관인으로 모시고 싶다 하십니다.”

“그럼 법정으로 가는 겁니까?”

“네. 한 시간 뒤인 정오에 마피아 보스인 칸과 그 부하들에 대한 판결이 내려질 겁니다.”

그녀 옆에서 누군가가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오메가 위프를 허리에 두른 기사 사이브리즈였다.

“한때 여러분을 무기 탈취범으로 오해했던 것을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화재사건을 진압해주신 것도 모자라 많은 시민들을 불안에 떨게 한 마피아를 궤멸시키는 단초를 제공해주신 것을 도시 전체가 잊지 않을 것입니다.”

등 뒤에서 제르비어스가 팔짱을 낀 채 턱을 쳐들고 있었다.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이 마왕에게 채찍을 돌려주기 위한 거라는 걸 알면 사이브리즈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으나,

차르르르르.

놀랍게도 다음 순간 사이브리즈는 픽셀이 조각조각 나듯 빛무리로 화해 사라졌다.

우리가 놀라워하고 있는 가운데 에니찰리드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숙원을 달성한 오토마타는 이렇게 다시 도시의 먼지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녀를 이루고 있던 물질들은 검궁의 용광로에서 다시 재조립될 수 있겠지요.”

사이브리즈의 허리춤에 매여 있던 채찍 오메가 위프가 허공에 떠올랐다.

[오토마타로부터 해방된 무기가 적법한 주인의 존재에 반응합니다.]

[교도관이 인정한 절차에 따라 죄수 제르비어스 폰타인에게 오메가 위프의 소유권이 이전됩니다.]

빛무리에 휩싸인 채찍이 자석처럼 그 본래 주인에게로 스르륵 미끄러져 갔다.

오메가 위프의 손잡이를 거머쥐는 폭렬마왕 제르비어스 폰타인은 거의 울먹일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드디어…… 너를 다시 휘두를 수 있게 되었구나.”

“축하한다. 교도관이 허가했다는 걸 보면 이제 그 채찍을 다음 층으로 가져갈 수 있게 되었을 거야.”

“고맙다, 용사야. 우리가 탈옥을 하게 되었을 때 그 길의 최전방은 이 오메가 위프가 뚫게 될 거라고 약속하지.”

마왕이 새신랑처럼 기뻐하는 가운데 우리는 에니찰리드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그럼 법정으로 가볼까요. 칸이란 자의 마지막을 제 눈으로 직접 봐야 할 것 같거든요.”

*

“벽돌은 이쪽으로 나르게!”

“4번 철골은 아예 교체해야 해요. 인부 둘이 더 필요합니다!”

거리로 나오자 셀 수 없이 많은 오토마타들이 간밤의 폭주 열차가 만들어낸 피해를 복구하는 중이었다.

하루아침에 터전이 엉망이 되었는데도 인부와 시민들의 얼굴은 해맑았다.

도시 전체가 상처에서 벗어나 새살을 키워내는 중인 것이다.

만약 우리가 칸을 저지하지 못했더라면, 나아가 카지노의 진법을 해체하지 못했더라면 저들의 웃는 얼굴을 보기란 어려웠겠지.

“활기가 넘쳐. 이들이 인형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야.”

아스티나의 말에 나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이 감옥의 한 층에 불과하다는 걸 자꾸만 잊게 돼.”

활기에 넘치는 건 시민들뿐만이 아니었다.

“으랏차아! 이런 건 내게 맡기면 가뿐하다!”

“오오오오! 멋진 기사님이 기둥을 다시 일으켜 주셨어.”

제르비어스는 오메가 위프를 현란하게 휘둘러 인부 열 명이 달라붙어야 세울 수 있는 기둥을 바로 세웠다.

“어디 이번에는 저곳인가. 선로에서 기차를 치우면 되는 거겠지? 으하하하!”

본래의 무기를 찾게 되어 무척 신이 난 모양이다.

“빨리 안 오면 놔두고 간대, 아저씨!”

공사 현장 여기저기에 끼어들려고 하는 마왕을 캉이가 가까스로 붙잡아 왔다.

인부들은 떠나가는 제르비어스를 좀처럼 놔주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영웅을 귀찮게 하면 안 된다는 양가적 마음을 동시에 느끼는 듯했다.

‘사람과 똑같은 반응.’

하지만 만철도시 사니릭타운은 진리를 탐내려다 추락하고 만 연금술사가 회한을 담아 만들어낸 모조품이다.

한때 세상 어딘가에 존재했던 풍경을 동일 크기로 재현한 촬영장에 지나지 않는다.

“왜일까.”

교도관 그룬덴 사니릭투스는 어째서 이런 장소를 봉마연옥이라 불리는 푸르가토리움에 지어놓은 것일까.

그것이 어떤 속죄라면, 대체 누구에게 보여주려는 것인가.

“용사야, 누군가 마피아를 뿌리 뽑아 주길 바라고 그 당시를 복원해놓은 것은 아닐까. 자신이 아끼던 도시가 깨끗해지길 바란 걸 수도.”

“글쎄. 우리 모두 단탈리온을 통해 사니릭투스의 이야기를 들었잖아? 그의 도시는 마피아나 카지노 때문에 몰락한 게 아니었어.”

어딘가 개운치가 않다.

내가 찾지 못한 톱니바퀴 몇 개가 이 도시 어딘가에 누락된 부품처럼 숨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도착했습니다, 여러분. 이곳이 만철도시의 신상필벌을 주관하는 신성한 장소 ‘하얀 고양이 법정’입니다.”

고대의 신전을 연상케 하는 으리으리한 건물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순백의 기둥 위에는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있는 고양이. 그런데 저 자세가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진다.

아스티나가 품에서 앙증맞은 인형을 꺼냈다.

내가 액세서리 숍에서 뽑기로 타낸 상품.

하얀 고양이 토템.

“이 인형이 아마 도시의 마스코트 같은 건가 봐.”

“거꾸로 이 법정의 상징물을 따서 인형을 만들어낸 걸 수도 있지.”

정답은 후자였다.

우리는 웅장한 재판정 안에 참관인석으로 안내받았다.

“여기서 재판이 시작될 때까지 기다리시면 됩니다. 곧 재판장님이 입장하실 겁니다. 그럼 저는 이만.”

에니찰리드는 경례를 붙이며 법정의 외부 경비를 맡겠다고 떠나갔다.

재판장은 오페라 극장보다 더 큰 규모로 피고인석과 증인석을 내려다볼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형아, 이번엔 누가 노래를 불러주는 거야?”

“아니.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는 사람은 안 나와. 여긴 재판장이지 공연장이 아니거든.”

물론 죄와 벌이 가려지고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저울 위에 올라가게 된다는 점에서 때로는 법정이 오페라보다 더한 연극 무대일 수는 있겠다.

“빌어먹을! 이거 당장 풀지 못해.”

“보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우리의 아지트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다고 장담하셨잖아요?”

“그래! 어찌 가타부타 말이 없으신 거요.”

피고인석에는 포승줄에 묶인 마피아들이 우르르 착석해 있었고, 그 맨 앞줄에는 코트를 벗고 검은 양복만을 입은 칸이 고고히 앉아 있었다.

그는 등 뒤에서 아우성을 치는 부하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안대를 벗었네? 누군가 벗긴 건가. 아니면…….’

그때, 아스티나는 심상치 않은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왜 그래?”

“이 법정 바깥에 세워진 그 많은 하얀 고양이가 과연 우연일까? 슈바인, 엄마가 삼월초원에 세운 탑의 이름을 기억해?”

“백묘탑. 어라? 백묘(白猫)라면…….”

“응. 하얀 고양이라는 뜻이지. 엄마는 삼월초원에 떨어졌을 때 하얀 털을 가진 고양이의 환상을 보았다고 했어. 그 고양이를 따라가니 아름다운 호수를 발견했고 그 위에 마법사의 탑을 지은 거라고 했거든.”

삼월초원 백묘탑의 어원에 그런 이야기가 있는 줄은 몰랐다.

“그렇다는 어쩌면 이 재판장의 주인이…….”

“응. 우리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지 않을까?”

두우우우웅!

법정의 문지기인 풍채 좋은 오토마타가 북채로 북을 두들겼다.

그러자 관객들과 배심원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이알레 재판장님이 입장하십니다.”

성스러움마저 느껴지는 하얀색 법복. 허리까지 늘어지는 금발 머리카락.

좌중을 숨 멎게 만들 정도로 고혹적인 자태를 가진 오토마타 여인이 장막 뒤에서 걸어 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끄트머리가 반달 모양으로 휘어진 금속 막대기가 들려 있었고, 반달의 정중앙에 투명한 수정구가 고정장치도 없이 떠 있었다.

엄청난 마력이 느껴지는 고위 마법사의 지팡이.

나와 아스티나는 약속이나 한 듯 시선을 교환했다.

“그렇다면 저게?”

“응. 그라비타스 페룰라(Gravitās Ferula). 엄마가 사용했다던 지팡이와 똑같이 생겼어.”

하얀 고양이 법정의 재판장 나이알레는 백묘탑의 탑주이자 9서클 마법사인 일레인 쿠디슈의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나이알레가 재판장석에 앉자 마피아들이 험악하게 소리쳤다.

“제기랄. 이거 풀어줘!”

“그래! 무슨 권리로 내 무기를 뺏어간 거냐. 내 창을 돌려주면 당장 저년의 목을 쳐주마.”

포승줄을 풀어주면 당장이라도 폭동을 일으킬 기세였다.

나이알레는 투명한 눈동자로 그들을 스윽 훑어보더니 그라비타스 페룰라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의사봉 대신 가볍게 내리쳤다.

투우우우웅.

소란을 일으킨 마피아들이 모두 재판정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보이지 않는 투명 망치가 그들의 뒤통수를 거세게 후려갈긴 것처럼.

“재판장 안에선 정숙해 주세요, 여러분.”

기품이 넘칠 정도의 중력 마법이었다.

아마도 정밀하게 구사된 그래비티 프레스.

지극히 가까이에 있는 배심원이나 방청객들에겐 아무런 영향이 없는 걸로 봐선 저 지팡이는 마법의 좌표를 분배하는 데에도 뛰어난 성능을 가진 것이 틀림없었다.

“아스티나, 탐 나?”

“솔직히, 엄청.”

아스티나 옆에는 칸의 무기 폭류천마검이 세워져 있었다. 여기에 저 지팡이마저 아스티나의 손에 쥐어진다면 지금보다 몇 배는 강해질 것이 분명했다.

부모님의 무기로 설공에게 복수한다는 발상도 결코 꿈이 아니게 된다.

“방법을 찾아보자. 하지만 일단은 재판 결과를 지켜봐야겠지.”

재판장 나이알레가 손에서 지팡이를 놓자 그것은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그녀 옆에서 둥둥 떠 있었다.

침묵에 젖어든 법정 한가운데서 나이알레가 입을 열었다.

“드디어 내 앞에 붙잡혀 온 건가요, 칸. 만철도시에서 최고로 늠름한 악당이라 할 수 있는 사내여.”

“그래. 결국 당신의 뜻대로 되었어. 그 아리따운 얼굴을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다니 진작 붙잡혀 올 걸 그랬군.”

어?

지금 뭐라고?

턱이 빠질 정도로 황당하게 둘의 대화를 듣고 있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제르비어스도, 아스티나도, 다른 관객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대의 수려한 용모는 언제나 나를 기껍게 하지만 다른 피고인들과 달리 보석금으로 어찌해볼 수 있는 단계가 아닙니다. 아마 용광로행을 피하긴 어려울 겁니다. 오늘이 우리가 같은 도시에서 숨 쉬는 마지막 날이겠군요.”

“이걸 어쩌지? 나는 당신의 아름다움을 매일 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데. 용광로에 나를 녹이는 대신에 당신의 눈빛으로 녹여주면 안 되는 건가.”

“애석하게도 불가합니다. 다시 말하지요. 불가능이 아니라 불가입니다.”

류운학과 일레인이 맺어진 영향일까.

누가 저 대화를 재판장과 죄수의 그것이라고 생각하겠어.

해변에서 오늘 막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속삭임이라고 해야 말이 되겠지.

두 오토마타는 서로를 향해 쉼 없이 윙크를 날리고 있었다. 아마 저걸 위해 칸이 안대를 벗은 모양이었다.

억, 토할 것 같다.

옆에 있는 아스티나도 얼굴을 감싸고 있다.

“……너무 창피해. 엄마 아빠의 맨얼굴을 보는 기분이야.”

“무기를 대신 맡고 있는 인형들마저도 서로 사랑에 빠지게 하다니…… 사부님과 스승님은 정말 천생연분이셔.”

하지만 나이알레는 공사를 구분 못 하는 어리석은 재판장은 아니었다.

잠시 우스운 분위기가 되었지만 이 순간은 엄연히 만철도시 최악의 범죄자를 판결하는 현장인 것이다.

옷매무새를 바로한 그녀가 철혈의 재판장으로 다시 돌아와 선언했다.

“그럼, 정식으로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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