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하얀 고양이 법정 (1)
‘제자야, 너는 심성이 너무 고와서 탈이다.’
‘제가요? 살면서 그런 이야기는 거의 들어보지 못했는걸요.’
‘그럼 달리 말해보자꾸나. 너는 빌어먹을 물러 터졌느니라.’
‘……사부님, 어조가 너무 급격히 달라지셨잖아요.’
‘본좌가 하나 물으마. 너와 싸우려는 상대가 한쪽 다리가 없으면 어떻게 하겠는고.’
‘어, 글쎄요. 만약 그자가 저보다 약한 자라면…….’
‘갈! 이미 틀려먹었다. 지체 없이 상대의 약점을 파고든다는 답변이 나와야 하거늘.’
‘좀 비겁하지 않습니까?’
‘생사결에 비겁이란 없느니라. 상대가 한쪽 다리가 없든, 한쪽 팔이 없든 너에게 덤벼온다는 것은 인생을 건다는 거다. 서로가 완벽히 만전을 기하는 공평한 대결이란 허상이다. 해서 본좌가 오늘 떼거지로 너에게 비무를 신청한 교도들을 탓하지 않은 게야.’
‘음. 알 것도 같습니다. 검을 든 순간 손속에 정을 둬서는 안 된다는 거군요.’
‘그래. 상대가 칼밥을 먹은 무인일 경우 그것은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줄 수도 있는 법. 만약 본좌가 왼쪽 눈을 잃고 너와 싸워야 한다면 너는 응당 본좌의 사각을 노려 검격을 퍼부어야 할 것이니라.’
‘에이, 설마 그런 날이 오겠습니까?’
설마 했던 그런 날이 왔다.
천마 류운학과 동일한 경지를 가진 마피아의 보스 칸이 나와 살벌하기 그지없는 살초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챙! 채앵!
‘사부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나는 용사전용기 축공탄을 날렸다.
노린 지점은 칸의 오른쪽 어깨. 물론 축공탄은 사전 동작이 큰 편이기에 칸의 폭류천마검이 대각선으로 치켜 올라가 그것을 잘라냈다.
그 순간 미묘하게 틀어진 칸의 중심축.
왼쪽 눈을 가린 안대 때문에 생길 수밖에 없는 사각지대. 나는 그곳을 향해 디아볼릭을 찔러넣었다.
하지만 그는 턱 끝을 살짝 들어 종이 한 장 차이로 필사의 일격을 피해버렸다.
“어떻게?”
“후훗, 놀랐는가. 이 안대, 사실 망사거든.”
이 자식, 애꾸눈도 아니면서 안대를 차고 다녔던 거냐! 그냥 멋으로?
어쨌든 균형이 무너진 나는 공격을 회수하느라 두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야 했다.
어느새 만철도시의 트레이드마크인 검궁의 마천루가 눈에 들어왔다.
결착을 내기까지 남은 시간은 불과 30여 초.
“이번엔 내 차례다!”
폭류천마검이 숱한 잔상을 만들며 나를 덮쳐왔다. 보법을 이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전부 쳐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리고 받아치는 데 소요되는 시간 또한 치명적.
‘이판사판이다.’
이를 악물고 급소를 피해 폭류천마검을 몸빵으로 받아냈다.
카강!
드래곤하트 플레이트의 사슬에 얽히며 폭류천마검이 살점을 찢고 들어왔다.
거의 들이댄 것이나 다름없는 수법에 칸이 순간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템 수납!”
순간 디아볼릭이 인벤토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왼쪽 옆구리를 관통한 폭류천마검을 놔둔 채 자유로워진 양손으로 칸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 녀석은 유기체가 아닌 자동인형.
통할지 아닐지 확신은 없다만…….
[천마흡성대법]
손바닥을 통해 오토마타가 품은 막대한 내공이 나에게로 흘러오는 것이 느껴졌다. 칸의 관절 접합부에서 스파크가 거칠게 터져 나왔다.
내공의 역류가 급격히 약해졌다. 에너지를 강탈당하는 것에 저항하는 것이다.
칸이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네놈의 패배다. 실개천의 도랑으로 바다를 집어삼킬 수야 없지. 이 기술은 너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지만 나는 아니다.”
그의 말엔 틀림이 없었다.
흡성대법을 구사하는 동안 나는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다. 움직일 수 있는 거라곤 입술과 혓바닥뿐이다.
“하지만, 입술만으로, 널 쓰러트릴 수 있지.”
이 감옥 안에 떨어진 후 세 치 혓바닥을 놀려 위기를 넘겼던 게 대체 몇 번이었던가.
그런데 심지어 내 혓바닥은 이제 물리적인 파괴력마저 지니게 되었다.
턱에 힘을 주며 칸의 명치를 향해 입을 쩌억 벌린다.
[친구 캉이의 스킬을 빌려옵니다.]
[여우트림 Lv. 2]
상대를 껴안은 거나 다름없는 지근거리에서의 광선포.
절대 피할 수 없다.
콰아아아아아아아!
초고열을 내뿜는 붉은 광선포가 칸의 흉부를 녹여버렸다.
*
띠링!
[돌발퀘스트 #9 ‘폭탄제거반’이 완료되었습니다.]
[용사는 제한 시간 내에 폭주 열차의 질주를 멈춰세우는 데 성공했습니다. 만철도시의 수많은 오토마타들을 지켜낸 것을 이 층의 교도관은 잊지 않을 것입니다.]
[보상으로 민첩이 150 오릅니다.]
치이이이이익.
제동이 걸린 열차가 선로에 불똥을 튀기다가 결국에는 완전히 정지했다.
늦은 밤 거리를 오가던 행인들이 선로를 보며 당황하는 표정이 보인다.
검궁과의 거리는 불과 150미터.
“휴우. 몇 초만 늦었더라도 망할 뻔했네.”
아스티나가 등 뒤에서 비틀거리며 걸어왔다. 내가 칸과 맞붙는 동안 계속 열차를 붙잡고 있었으니 내력 소비가 막대했을 거다.
“슈바인, 괜찮아?”
“복부에 마검을 꽂아둔 사람에게 할 말론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
“입은 살아있네. 뽑아야 하지 않겠어?”
“응. 부탁할게.”
폭류천마검의 칼자루에 내가 손을 올리자 이런 메시지가 떴다.
[주인이 있는 아이템이므로 인벤토리에 수납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정당한 소유권을 가져올 수 있는지는 나중에 고민하기로 하고, 나는 아스티나에게 폭류천마검의 칼자루를 넘겨주었다.
“셋에 당길게. 하나, 둘, 셋.”
“끄으으윽!”
혼이 빠져나갈 것 같은 통증이 덮쳐왔다. 하지만 강적을 쓰러트리고 나서 과다출혈로 죽을 수야 없는 노릇.
나는 업화의 쌍장을 가까스로 불러일으켜서 왼쪽 옆구리를 지졌다. 다행히 출혈은 금세 멈추었다.
“이게 아빠가 사용하던 검이구나.”
“응. 일단 네가 갖고 있어.”
“검기를 불어넣을 수도 있는데? 마치 검이 나를 반겨주는 것 같아.”
원래 주인의 핏줄임을 알아보는 건가.
“하지만 다음 층으로 가져가려면 몇 가지 절차가 남아 있어.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게.”
나는 옆구리를 부여잡은 채 열차 지붕의 끄트머리로 걸어갔다.
금이 간 마정석을 흉부에 드러내고 있는 칸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칸, 패배를 받아들이나?”
“그걸 물어보는 것 자체가 모욕이다. 당연히 내가 졌다.”
“다시 붙으면 내가 질걸, 아마도.”
“그 말인즉슨 나와 다시 싸워주진 않겠다는 뜻이로군.”
“응, 맞아. 짧은 시간인데도 나에 대해 잘 파악했군.”
“10분 동안 검을 맞부딪히면 10년 동안 대화를 나눈 것과 다를 바 없지.”
하여간에 은근히 사부님과 비슷한 뉘앙스로 말하는 오토마타다. 마음 약해지게 말이야. 하지만 배에 구멍을 낸 것은 서로 마찬가지이니 피장파장이다.
“마무리를 할 생각은 없는가.”
“어. 저 뒤에 날아오고 있는 검궁 기사단에게 네 신병을 넘길 거야. 네가 그들에게 체포되어서 법정에 서는 것까지가 내 미션이거든.”
폭류천마검을 휘둘러보고 있는 아스티나의 등 뒤로 무려 다섯 대의 무장 비행선이 날아오고 있었다.
아마 마피아의 조직원들 대다수가 포획된 채 실려오고 있을 것이다.
그 조직의 우두머리는 지금 내 앞에 누워 있고.
“층장이여, 그렇다면 저들이 도착하기 전에 잠깐 담소를 나눌 수 있을까.”
“뭐, 안 될 건 없지.”
어차피 나도 이곳에서 제르비어스와 캉이가 에니찰리드의 비행선을 타고 돌아오길 기다려야 하는 입장이다.
나는 녀석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주저앉았다.
“오토마타가 밥을 먹진 않을 테니, 옥살이를 할 때 사식을 넣어주겠다는 말은 못 하겠네.”
“그게 너의 유머 감각인가. 호불호가 좀 있겠군.”
“어. 그런 소리 많이 듣는다.”
칸의 왼쪽 가슴에서 튀어나온 파이프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웃고 있는 거겠지.
“마지막 순간에 나를 이 꼴로 만든 그 기술 말인데, 그것의 정체는 뭐지? 무공의 종류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아래층에서 만난 내 친구의 기술이야. 무려 환수인 구미호의 술법이지.”
“술법이라. 하지만 너는 인간이지 않나. 어떻게 환수의 술법을 사용할 수 있는 거지.”
“빌려서 쓰고 있는 거야. 뭐, 원리까지 말해줄 수는 없지만.”
“그렇게 강력한 힘인데도 불구하고 타인에게 끌어올 수 있다는 건가. 그 대가로 네가 잃는 것은 뭐지?”
칸의 질문에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지금의 내가 2층의 절대강자 류운학만큼 강한 이 오토마타를 쓰러트릴 수 있었던 데는 두 초월적 존재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죽은 자신을 대신해서 감옥을 올라 달라며 파천황의 권능을 건네준 르팔타커스 시온.
그리고 퀘스트를 통한 성장 시스템과 인벤토리, 용사의 심안 등의 축복을 남겨준 곰인형 교도관장.
하지만 그 둘은 내게 아무런 대가도 요구한 적이 없다.
그들의 목적이 내 갈망과 일치했기 때문이라고 막연히 생각해오고 있었는데,
칸은 그걸 부정했다.
“대가가 없을 리 없다, 층장이여. 카지노 앞의 전당포를 들렀다면 이해하겠지. 나는 만철도시의 꼭대기에서 더 큰 것을 가지기 위해 본래의 소중한 것을 팔아버리는 자들을 숱하게 내려다봤다. 이곳은 원래의 세계를 모방한 허구의 도시지만 그 안을 걸어 다니는 인형들의 욕망만큼은 진짜지.”
세상에 공짜는 없다.
언젠가는 대가를 지불해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일확천금의 꿈을 주입하며 희생자들을 불러모으는 카지노의 주인이 하는 말이었다.
결코 가볍게 들리지가 않는다.
“네 손으로 일군 것이 아니라면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마라, 인간. 그렇지 않다면 언젠가 네 운명의 슬롯머신에…… 사신의 낫 3개가 뜰지도 모르니까.”
영혼 없는 인형의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
만철도시에 아침이 밝아왔다.
눈을 떠 보니 내 옆에는 캉이가 웅크려 자고 있었다. 꼬리를 동그랗게 말아 코 위를 가린 채 쿨쿨 자는 녀석은 귀엽기 그지없었다.
“그래. 이렇게 곯아떨어질 만하지.”
푸르가토리움 속에서 우리는 원하지 않으면 잠들 필요가 없다. 아무리 치명적인 상처를 입어도 죽지 않는 한 시간이 흐르면 자연치유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넷은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약속이나 한 듯 쓰러졌다.
그만큼 어젯밤의 혈전이 치열했다는 거겠지.
푸석푸석한 얼굴의 마왕이 자신의 가슴을 두들겼다.
“다시 말하지만 그 쇳덩어리는 정말 괴물 같았다, 용사야. 나와 꼬맹이의 찰떡같은 호흡이 아니었다면 결코 거꾸러트릴 수 없을 만한 강적이었지. 그러니…….”
“그래, 대단했다. 고생이 많았어, 제르비어스.”
“어? 너 왜 그러냐. 보통은 더 빨리 진법을 부숴야 했다며 잔소리를 해야 하는 건데.”
아오, 이 자식.
평소에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냐.
“겨우 네 명이서 한 조직을 무너트리는 건 보통 일이 아니야. 저마다 훌륭하게 제 역할을 해 준 덕분이지.”
칸이 남긴 마지막 말이 내게 준 영향이 무의식중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 나는 분명 파천황과 교도관장의 힘을 빌리고 있다.
게다가 함께 등반을 해주는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결코 4층까지 올라오지 못했겠지.
앞으로도 그걸 잊을 생각은 없다.
똑똑.
“층장 님. 일어나셨습니까.”
그때, 누군가가 문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