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숙원청부업자 (4)
첨벙첨벙.
“우왓, 깜짝이야. 뭐였지?”
“놀라지 마라, 용사야. 그냥 생쥐 두 마리였어.”
제르비어스의 얄미운 표정이 나를 쳐다보았다.
녀석은 지금 횃불 대신에 손바닥에 업화의 쌍장을 피워올리고 있었다. 불빛 하나 없는 이곳에서 보라색 손전등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있는 곳은 만철도시 사니릭타운의 하수도.
아마 지금쯤 아스티나는 카지노에서 프로 도박사로 빙의해 칩을 쓸어 담고 있을 터였다.
마법을 사용할지도 모른다고 했으니 어쩌면 도박사가 아니라 사기꾼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만.
“그런데 어떻게 생쥐가 있지?”
“생명체가 아니라 오토마타였다. 저것도 인형으로 구현해 놓은 거지.”
“그 짧은 순간에 그게 보였단 말야?”
“동물이었다면 내 정신지배 탐지망에 걸렸을 거야.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어. 유기체가 아닌 인형, 오토마타라는 얘기지.”
“그렇군.”
“그나저나 계속 이걸 유지하려니 번거로운데. 네가 검기를 뽑아서 앞을 좀 비추는 게 어떠냐.”
“지금은 무기를 다 인벤토리에 넣어놨단 말이야. 비상 시에 대응이 어려워.”
“번거로운 건 꼭 나를 시킨단 말이야. 망할 용사 놈.”
그렇게 마왕과 속닥이며 하수도를 걸어가던 중, 나는 곧 강력한 존재감을 발휘하는 경계선에 도착했다.
마나 스트림을 민감하게 느끼는 제르비어스 역시 따로 신호하지 않았는데도 걸음을 멈췄다.
“여기서부터로군.”
우노키오 카지노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막강한 진법. 그것이 이 앞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확실히 삼월초원의 광멸복마진을 넘어서는 견고함과 술식의 복잡함이 느껴졌다.
정신을 집중해서 진법을 탐색하던 나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드려서 깨부수는 건 무리겠어. 비천성검을 쓴다면 모르겠지만 그래서야 수지타산이 안 맞아.”
아스티나를 들여보낸 것은 당연히 그녀의 침착함을 믿어서였지만 내 눈으로 카지노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는 플랜 B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지하에서 진법을 뚫을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제르비어스가 업화의 쌍장을 두 갈래로 피워올리더니 그것을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이거라면 어떠냐. 폭렬마법의 신기술 인피니티 드릴이다.”
“……그 기술명 표절이잖아. 왜 제트카이저의 필살기가 폭렬 마법에 들어가는 건데?”
“표절이라니. 영감을 받았다고 해 다오. 이 기술로 야수왕 훔바라스를 쓰러트린 거다.”
“호오. 그 필살기, 채찍으로도 쓸 수 있는 거냐.”
“당연하지. 오메가 위프만 내 손에 들어오면 나는 무서울 게 없어진…….”
제르비어스가 말을 멈췄다.
아스티나가 단체 텔레파시를 걸어온 것이다.
- 아스티나 류: 지금 VIP 룸으로 들어왔어. 주변엔 나와 캉이 둘뿐이야.
- 슈바인 스트링거: 아주 잘했어.
나는 순간 이동을 위해 아스티나에게 몇 가지 사항을 지시했다.
그런데 그때, 제르비어스가 내 어깨를 툭 치더니 정면을 가리켰다.
찰방.
누군가가 하수도의 어둠 속에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텔레파시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 슈바인 스트링거: 여기 문제가 좀 생긴 것 같아. 내가 처리하고 나서 연락할게.
내 가슴 언저리의 높이에서 붉게 빛나는 두 개의 눈동자.
아담한 체구의 오토마타 여인이 다섯 걸음 앞에서 멈추었다.
“너희들은 뭐야? 어떻게 여길 들어왔지?”
오토마타의 등 뒤에서 뭐가 펄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행 목적이라 보기엔 어려운 손바닥만 한 날개 한 쌍이었다.
묘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가운데 나는 대충 둘러댔다.
“길을 잃었어. 이제 막 돌아나가려는 참이야.”
“흐으응. 수상한데?”
우리가 한 걸음 물러서자,
오토마타는 거꾸로 한 걸음 다가왔다.
하지만 진법의 영향력이 끝나는 지점에서 정확하게 멈춰서는 영리함을 보였다.
마나 스트림을 민감하게 느낄 수 있는 부류다.
“보스가 왜 이런 우중충한 곳에 카포레지메인 나를 보냈는지 몰랐는데. 쥐새끼를 잡아오라는 뜻이었구나?”
오토마타의 손에 들린 지팡이가 분홍색 광채를 터트렸다. 요란하기 짝이 없는 보석들이 주렁주렁 달린 요술봉의 끝은 하트 모양으로 구부러져 있었다.
제르비어스의 망토가 내 시야를 가렸다.
“물러서라, 용사야. 저 지팡이가 누구 것인지 알 것 같다.”
제르비어스가 오토마타를 향해 업화의 쌍장을 피워올리며 경계했다.
“오토마타. 아마도 너의 이름은…… 에띠소크(Ettesoc)겠지?”
“어라? 내가 그렇게 유명해?”
그제야 나도 앙증맞은 날개를 달고 있던 화룡도의 5번 방장 코제트(Cosette)를 떠올릴 수 있었다. 에띠소크라는 이름은 그 서큐버스가 가진 이름의 아나그램.
에띠소크의 요술봉에서 지독하게 요사스러운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너희 둘을 보스에게 데려가면 아주 좋아하실 거야. 어쩌면 둘 중 하나는 장난감으로 내어주실지도?”
그러자 제르비어스가 어깨를 낮추며 요격 자세를 취했다.
“어디 해 봐라. 아무리 강력한 매료 마법이어도 그게 마왕에게도 통할까?”
순간 분홍색 서클 빔이 하수도 전체를 가득 밝혔다.
*
“손님, 잠깐 뒤를 돌아봐 주시겠습니까?”
무이크루의 음험한 목소리가 아스티나의 뒤통수를 때렸다. 아스티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한 뒤에 뒤를 돌았다.
“무슨 일이시죠?”
“잠깐 확인할 게 있어서 말입니다.”
카포레지메가 부하들을 옆으로 물리면서 걸어왔다. 이윽고 아스티나의 코앞까지 걸어와서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알 수 없어. 절대 눈치 못 채.’
흑기사의 갑옷은 전신을 감싸준다. 아스티나는 이 오토마타와 충돌했을 때 단 한순간도 갑옷을 해제하지 않았다. 흑기사의 투구는 음성마저도 변조시킨다.
그러니 무이크루가 그 장소에 있던 자신을 알아볼 리는 없다고,
아스티나는 믿었다.
“손님.”
낫을 들지 않은 무이크루의 손가락이 슬그머니 위로 올라왔다. 그것은 곧 어깨가 파인 드레스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그 인형, 혹시 어디에서 난 것인지 알 수 있을까요?”
“……네?”
“제가 아는 인형이 맞나 싶어서 말입니다. 그 액세서리 숍에서 뽑으신 겁니까.”
“맞아요. 좀 어려웠지만…… 분명히 제가 뽑은 거죠.”
무이크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분하다는 듯한 표정.
“놀랍군요. 그걸 정말로 성공시키는 자가 이 만철도시에 있었을 줄이야. 속임수를 쓴 게 분명하다고 생각해서 불을 지를까 고민 중이었는데.”
굽었던 무이크루의 어깨가 다시 펴졌다.
“다음번에 다시 도전해봐야겠군. 귀찮게 해드려 실례했습니다, 손님. 이봐, 이분께 사죄의 의미로 골든 칩 하나 건네드려.”
“아니, 그럴 필요까진…….”
“부디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손님.”
험악하게 생긴 마피아의 솔다토 하나가 가방에서 골든 칩을 꺼내 아스티나에게 건네었다.
‘휴우. 날 알아본 게 아니었구나.’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동안 무이크루와 부하들이 그녀로부터 멀어져갔다.
그때, 무이크루가 모퉁이에서 걸어 나온 누군가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어디 처박혀 있었길래 통 안 보인 거냐, 에띠소크?”
“흐흥. 보스께서 따로 내린 지령이 있었거든.”
“보스가 너에게? 음란의 마녀. 전투에 돌입하면 아무런 짝에도 쓸모없는 네 녀석이거늘.”
“내가 붙잡아온 쥐새끼 두 마리를 봐도 그런 말이 나올까?”
돌아서려던 아스티나의 발걸음이 우뚝하고 멈춰 섰다.
텔레파시에 응답하지 않던 두 동료의 존재, 그리고 요사스러운 저 목소리가 말하는 쥐새끼 두 마리라는 표현이 뇌리를 어지럽힌 것이다.
‘설마?’
아스티나는 커다란 화분 뒤에 숨어서 동태를 살펴보았다.
그러자 무이크루의 언성이 높아지는 게 들렸다.
“네가 누굴 잡아왔다고?”
“자, 봐봐.”
에띠소크라는 오토마타 여인의 등 뒤에 마치 호위무사처럼 익숙한 얼굴 둘이 서 있었다.
슈바인 스트링거와 제르비어스 폰타인.
그것을 확인한 아스티나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아오, 저 바보들! 저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동시에 무이크루 또한 둘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이런 빌어먹을. 저놈은 층장과 그 동료잖아?”
“탐내지 마. 카지노의 하수도에서 내가 잡아 온 거라고. 덕분에 부츠가 더러워지는 꼴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나한테 넘겨라, 음란의 마녀. 그놈들한테는 갚아야 할 빚이 있단 말이다. 부하를 무려 다섯이나 잃었어.”
“그건 네가 멍청해서지. 왜 나한테 따지는 거야?”
“한 번 해보겠다는 거냐, 에띠소크?”
“너야말로 보스의 명령을 거역하겠다는 거야?”
에띠소크의 빈정거림에 무이크루는 이를 부득부득 갈더니 결국 옆으로 비켜서야 했다.
마피아의 보스가 내리는 명령은 절대적.
“그럼 나중에 봐. 머리를 쓸 줄 모르는 무식한 것들아.”
에띠소크가 무이크루를 지나치자 슈바인과 제르비어스 또한 그녀의 뒤를 충성스럽게 쫓아갔다.
평소에 앙숙이나 다름없던 무이크루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어서 에띠소크는 잔뜩 신이 나 있었다.
“보스가 엄청 칭찬해 주겠지? 히힛.”
그녀가 멈춰선 곳은 휘황찬란한 문양이 양각으로 새겨진 거대한 문이었다.
마피아의 보스 칸이 있는 응접실이었다.
에띠소크가 문을 노크하려는 순간.
덜컹!
천장의 환풍구가 열리더니 은발의 여인이 날렵하게 착지했다.
드레스에 묻은 먼지를 털어대는 그녀의 눈빛에는 분노만이 가득했다.
“이 멍청이들. 대체 무슨 최면에 걸려든 거야?”
에띠소크는 은발의 여인과 두 장난감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는 사이니?”
“……그래. 아주 잘 알지. 내 친구들을 돌려줘.”
서큐버스의 외양을 한 오토마타의 입술 끝이 올라갔다.
아스티나의 양손에는 아무런 무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너 엄청 예쁘게 생겼구나. 특별히 전신을 떼어내 몸통만 박제해 줄게. 내 컬렉션에 들어오는 걸 영광으로 생각하렴.”
에띠소크의 요술봉에서 강력한 최면 빔이 쏘아져 나와 아스티나를 정통으로 직격했다.
은발 머리카락이 휘익 하고 휘날렸다.
“자아, 순순히 내 앞에 무릎을 꿇…….”
“뭐라는 거야, 지금?”
아스티나는 어깨를 툭툭 쳐내며 한 걸음 다가왔다.
“음란의 마녀인 내 트랜스는 여자한테도 먹히는데, 어째서!”
마지막 ‘어째서’는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아스티나는 나직하게 읊조렸다.
“내 어머니는 마굴의 정점에 오르신 분. 그리고 내 아버지는 마도들의 지존. 그따위 잡스러운 사술에 걸린다면 두 부모님을 뵐 면목이 없지.”
거추장스러운 드레스의 치마를 부욱 뜯어낸 후 아스티나가 양 주먹을 단단하게 말아쥐었다.
“음란의 마녀라고 했나?”
“다, 다가오지 마.”
“적어도 이 감옥 안에서 그 별명을 함부로 붙이고 다니는 것들은 내가 참아줄 수 없어. 이 푸르가토리움에서 ‘마녀’라는 호칭은 오직 한 분에게만 허락된 거야.”
쩌적. 쩌저적.
아스티나가 내공을 해방시키자 그녀 옆에 도열해 있던 화분들이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일제히 깨져나갔다.
겁에 질린 에띠소크의 날개는 더 이상 퍼덕거리지 않았다.
“내 어머니의 별명을 참칭한 죄. 내 아버지의 일권으로 벌해주지.”
은발의 마검사가 에띠소크를 향해 쏘아진 화살처럼 날아갔다.
“꺄악! 오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