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숙원청부업자 (3)
팽그르르.
룰렛의 금속 휠이 부드럽게 회전했다.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반짝이는 휠은 몰려든 겜블러들의 욕망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38개의 숫자가 적과 흑의 칸 위에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베팅을 하기 전에 자신이 좋아하는 숫자를 골라야 하는 시간이다.
딜러가 능숙한 솜씨로 은색 볼을 회전판 위에 던졌다. 그러자 휠의 회전방향을 거스르며 볼이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곧 베팅이 마감됩니다.”
테이블 위의 숫자판에 겜블러들이 칩을 올려놓았다. 칩의 색깔과 높이는 저마다 달랐고 누군가는 행운을 빌며 칩에 입맞춤을 하기도 했다.
그때, 고혹스런 자태의 은발 여인이 숫자 ‘9’에 블랙 칩 10개를 올려놓았다. 겜블러들의 입이 크게 벌어졌고, 그것은 딜러 또한 마찬가지였다.
스트레이트 벳.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베팅 방식이다.
보통 짝수나 홀수, 혹은 여러 개의 번호 경계선에 베팅하면서 확률을 올리는 것이 정석일진대, 첫 판부터 무모한 시도를 하는 여인.
“안타깝네. 귀족가의 여식인 것 같은데 세상 물정 모르고.”
“저러면 금방 거덜 나지. 행운의 여신이 붙어 있지 않는 한.”
귓가에 들려오는 탄식에 아스티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다만 빠르게 돌아가는 볼의 움직임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을 뿐.
천천히 속도가 줄던 볼은 놀랍게도,
정확히 9번 홀에 빨려들어갔다.
“어머나!”
“우우우와아!”
겜블러들의 감탄사와 함께 아스티나 앞에 블랙 칩이 수북이 쌓여나갔다.
무려 35배 당첨.
놀라지 않는 것은 아스티나가 유일했다.
‘우연인가?’
딜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분명 다른 번호를 노리고 샷을 던졌다. 사람이라면 컨디션에 따라 실수할 수도 있겠으나 오토마타는 다르다.
언제나 원하는 방향으로 볼을 유도하며 게임을 지배하는 것이 딜러의 역할.
게다가 볼에는 특수 처리가 되어 있어 자력을 가진 기계로 속임수를 쓰려 해도 조작되지 않는다.
그런데 아스티나는 계속 숫자 9에 고액을 베팅했고 볼은 약속이나 한 듯 번번이 그곳으로 쏙 점프해 들어갔다.
‘마법진을 만들 필요도 없지.’
간단한 중력 마법인 그래비티 프레스.
아스티나는 볼은 전혀 건드리지 않고 원하는 번호판의 중력을 강하게 만들었다.
즉 사과가 나무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듯, 볼은 그녀가 바라는 지점으로 안착하게 되어 있다.
36개의 숫자 중에서 9를 고른 이유는 어머니인 일레인 쿠디슈의 마법 서클 숫자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판에서 아스티나는 딜러에게 물었다.
“숫자 0이 두 개 붙어 있는 저건 뭐죠?”
“더블 제로. 당첨될 경우 판 위에 올라와 있는 모든 칩을 가지시게 됩니다.”
“그럼 이번엔 00에 걸죠.”
딜러는 자신의 명예를 걸고 절대로 그곳에 볼을 넣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그 비장한 결심이 무참히 박살 나는 데엔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어? 진짜로 들어왔네요?”
해맑게 웃는 아스티나에게 딜러는 형형색색의 칩을 전부 밀어줄 수밖에 없었다.
“손님, 죄송하지만 잠시 체크를 해 봐도 되겠습니까.”
블랙슈트를 입은 마피아 솔다토 2명이 아스티나를 에워쌌다.
“무슨 일이실까요?”
내심 긴장했으나 아스티나는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신고가 접수되었습니다. 손님께서 카지노에 반입이 금지된 어떤 장치를 소지하고 계신지 검사를 하고 싶습니다만.”
“아, 얼마든지요.”
험악한 인상을 가진 오토마타들은 부채처럼 생긴 금속탐지기로 아스티나의 하얀 드레스 곳곳을 검사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어깨에 올려놓은 하얀 고양이 인형을 제외하면 완전한 무장해제 상태였다.
청룡패웅검도, 흑기사의 갑옷도 모두 슈바인에게 맡긴 상태이기 때문이다.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부디 계속 게임을 즐겨주시기를.”
“칩이 너무 많아서 그런데 교환을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렇게 지시하겠습니다.”
거구의 마피아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아스티나에게서 아무런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했으니 트집을 잡을 수는 없었다.
“누나, 이것 좀 봐!”
그때 걸어 다니는 칩 가방이 아스티나에게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가방을 잔뜩 품에 안은 캉이였다.
본래 캉이는 게임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작전이었다.
하지만 지루해할까 봐 구경이나 하라며 칩 세 개를 쥐어준 것이 전부였는데.
“……어떻게 그만큼을 번 거야?”
“엄청 쉬웠어. 카드 섞는 걸 맞추는 놀이에서 내가 계속 이겼거든.”
아스티나는 캉이가 있던 테이블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딜러가 양손 사이로 카드를 빠르게 섞고 있었다. 평범한 동체시력으론 절대 분별해낼 수 없는 속도.
“저기에서 카드를 골라냈다고?”
“응. 그냥 통째로 외웠는데? 누나도 할 수 있어.”
아니, 못 한다.
그것은 날아다니는 물체를 새총으로 놓치지 않는 초월적인 동체시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묘기다.
마법이 아니라 타고난 눈썰미로 칩을 벌어왔으니 어쩌면 캉이가 더 대단한 일을 벌인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두 콤비는 여러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문자 그대로 칩을 쓸어모았다.
곧 골든 칩 10개가 모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대단해! 꼬마야, 그 꼬리 좀 만져봐도 되겠니?”
“그래. 우리한테도 행운을 좀 나눠주렴.”
캉이는 쏟아지는 관심을 만끽하면서 골든 칩으로 변환하고 남은 블랙 칩을 하나씩 나눠주기까지 했다.
“좋은 건 나누는 거랬어요.”
아스티나는 캉이의 돌발적인 행동을 내버려두었다.
계단 밑에 있던 마피아들이 모두 이쪽을 주목하는 걸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의 목적이 그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었기에 아스티나는 곧 접촉이 있을 거라 예상했고,
그 예상은 현실로 이뤄졌다.
“안녕하십니까, 카지노의 귀빈이시여. 저는 이곳의 플로어매니저입니다. 아무래도 위층에서 더 본격적인 게임을 즐기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황금색 유니폼을 입은 오토마타 여인이 아스티나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아스티나는 하얀 고양이 인형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응답했다.
“그럼 VIP 룸으로 안내해 주실래요?”
*
카지노의 2층 VIP룸은 로비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화려한 장신구를 단 오토마타들이 시종들을 데리고 온 채 여러 개의 방에서 딜러와 일대일로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도박장이라기보다는 고급 연회장을 방불케 하는 느낌이었다.
아스티나는 사춘기 소녀 시절 백묘탑의 마법 서고에서 로맨스 소설들을 섭렵했던 적이 있었는데, 마치 그 귀족들의 세계로 잠깐 여행을 온 기분이었다.
플로어매니저가 아늑한 카페트와 고급 소파가 있는 프라이빗 룸으로 둘을 안내했다.
“원하시는 종목이 있으십니까, 손님? 배정된 방에서 기다리시면 딜러를 보내드리도록 하지요.”
VIP룸에 입장하게 된 이상 칩을 더 버는 건 관심 없어진 지 오래였다.
아스티나는 시간을 좀 끌어보기로 했다.
“로비에서 너무 온 힘을 다해서 그런지 휴식이 좀 필요할 것 같아요. 하고 싶은 게임이 생각나면 그때 불러도 될까요?”
“언제든지요. 부르시면 바로 달려오겠습니다, 손님.”
플로어매니저는 깍듯한 인사와 함께 문을 닫고 나갔다.
“누나, 이제 우리 뭐해?”
캉이는 소파에 앉아 골든 칩을 튕기며 놀고 있었다.
아스티나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에 바짝 귀를 들이댔다.
다행히 인기척은 없었다.
“여기로 슈바인을 불러야지.”
파천황의 권능 중 하나인 순간 이동이 발동하려면 아스티나가 카지노에 숨어드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했다.
감시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황에서 대장을 소환하는 것까지가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아스티나는 눈을 감고 단체 텔레파시를 보냈다.
- 아스티나 류: 지금 VIP 룸으로 들어왔어. 주변엔 나와 캉이 둘뿐이야.
- 슈바인 스트링거: 아주 잘했어. 바깥은 복도야? 그렇다면 최대한 거기에서 떨어져서 지금 있는 공간의 가운데에 서 있어. 혹시 어중간한 곳으로 소환되면 곤란하니까.
- 아스티나 류: 응. 방금 네 말대로 했어. 이제 순간 이동으로 날아 와.
- 슈바인 스트링거: 어? 잠깐만. 여기 문제가 좀 생긴 것 같아. 내가 처리하고 나서 연락할게.
- 아스티나 류: 뭐? 문제가 뭔데?
텔레파시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스티나는 스멀스멀 차오르는 묘한 불안감에 응답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칩을 갖고 노는 것이 질렸는지 캉이가 하품을 할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
아스티나는 다시 한 번 텔레파시를 시도했다.
- 아스티나 류: 슈바인. 들려? 왜 말이 없어.
- 슈바인 스트링거: (부재 중)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아스티나와 캉이는 당황했다.
혹시나 싶어 다른 일행에게도 연락을 시도해 봤다.
- 제르비어스 폰타인: (부재 중)
하지만 마왕에게서도 응답은 오지 않았다.
뭔가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원래 작전대로였다면 대장인 슈바인이 순간 이동으로 VIP 룸에 숨어들어오면 카지노 바깥에서 제르비어스가 결계를 건드려서 난동을 피우는 것이 수순이었다.
그렇게 마피아들의 이목이 카지노 바깥으로 향했을 때, 슈바인과 아스티나가 보스인 칸의 신병을 덮치는 것이 작전의 줄기였는데.
‘내가 카지노의 바깥으로 나가봐야 할까.’
하지만 VIP 룸에 들어왔다가 단 한 게임도 하지 않고 다시 나간다면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게다가 입장 자격을 또 한 번 얻는 것은 번거로워지는 일.
한참을 고민하던 아스티나는 일단 복도로 나가 상황을 살펴보기로 했다.
“캉이야, 너는 여기에 있어. 금방 돌아올게.”
아스티나는 시무룩해하는 구미호 소년을 놔두고 복도로 나왔다.
플로어매니저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필요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손님.”
“목이 말라서 그런데…… 마실 걸 좀 가져다 주겠어요?”
“알겠습니다.”
플로어매니저가 어디론가 떠나자 아스티나는 슬그머니 다른 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쩌면 슈바인과 제르비어스가 결계를 돌파할 다른 방법을 생각해서 이미 내부에 진입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고, VIP 룸에서 마피아의 보스인 칸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때, 일군의 마피아들이 복도 저편에서 모퉁이를 도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저 녀석.’
마피아 무리의 선두에서 어깨에 낫을 걸친 채 다가오고 있는 장발의 오토마타를 발견한 아스티나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카포레지메 무이크루.
일전에 한 바탕 싸움을 벌였던 마피아 무리의 행동대장 녀석이었다.
그가 스물이 넘는 부하들을 이끌고 순찰을 돌고 있었다. 혹시나 있을 폭력사태에 대비하는 모양인지 모두 완전무장한 상태였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면 늦어.’
아스티나는 그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복도 벽면에 달라붙었다. 벽면에 있는 그림을 감상하는 것처럼 보이길 바라면서.
저벅저벅.
마피아들이 점점 가까워졌다.
카포레지메 무이크루의 눈빛이 아스티나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채 그림에 열중해 있는 그녀에게서 아무런 위험신호를 읽지 못했다.
그렇기에 시선을 돌려 지나치려는 순간,
무이크루가 느닷없이 걸음을 멈췄다.
“카포레지메? 왜 그러십니까.”
“흐으음. 여기서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한 솔다토가 묻자 무이크루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리고 아스티나에게 한 발짝 다가서더니 이렇게 말했다.
“손님, 잠깐 뒤를 돌아봐 주시겠습니까?”
아스티나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