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숙원청부업자 (2)
천마 류운학.
나는 그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S급 마검 디아볼릭을 내기의 물품으로 건 적이 있다.
당시 류운학은 요구 근력수치 700에 달하는 디아볼릭을 가뿐하게 집어든 뒤 이렇게 말했었다.
‘본좌가 감옥에 빼앗긴 폭류천마검(暴流天魔劍)에 비견되는…… 아니 어쩌면 그를 능가하는 무기로다.’
그랬다.
삼월초원의 절대강자이자 내 무공 사부님, 그리고 아스티나 류의 아버지이기도 한 류운학은 이 감옥에 들어왔을 때 한 자루의 마검을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무기의 이름은 폭류천마검.
4층 만철도시의 어둠을 지배하는 마피아의 보스인 칸이 가진 무기는 십중팔구 그 검일 것이다.
“아스티나, 괜찮겠어?”
“뭐가?”
우리는 호텔 샹그릴라의 옥상에 서 있었다.
만철도시에는 여러 개의 마천루가 우뚝 솟아 있었는데 이 호텔은 물론이거니와 도시 정중앙의 최고층 빌딩 검궁도 그중 하나였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노려보고 있는 우노키오(Un Occhio) 카지노는 가장 현란한 불빛을 도시 전체에 뿌려대는 빌딩이었다.
“칸(Kahn)이라는 오토마타의 이름은 운학(Unhak)이라는 이름의 아나그램이야. 틀림없이 녀석은 사부님의 무공인 무극천마공의 고수일 테지. 게다가 S급 마검에 비견되는 무기인 폭류천마검을 들고 있고.”
아스티나의 입장에서는 아버지와 싸우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눈앞에서 류운학이 죽는 모습을 수만 번 직면해야 했던 아스티나가 그와 동일한 싸움법을 가진 마피아 두목에 맞서라는 건 가혹한 처사 아닐까.
그러나 아스티나의 얼굴은 단호했다.
“아빠의 무기를 손에 쥔 효과로 그저 기술을 따라 사용하고 있는 녀석일 뿐이야. 게다가 암흑조직의 정점에 올라 있는 걸 보면 모르겠어? 난 녀석이 아빠의 분신이라기보단…….”
분노로 솟아오르는 은발.
“선대 천마 설공의 잔재라고 생각해. 폭류천마검 역시 아빠가 마교를 척살하기 위해 빌린 무기일 뿐, 평생 사랑했던 애병은 청성파의 보검이라고 하셨고.”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걸 보니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구나.”
“응. 만철도시 어딘가에 아빠의 검과 엄마의 지팡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했어.”
교도관 ‘침묵으로 통곡하는 검’이 레나스의 몸을 빌려 우리와 대화했을 때 아스티나는 그에게 물었었다.
‘어떤 무기의 정당한 주인이 아니라면, 그 무기를 다음 층으로 가져갈 수 있는 방법은 있어?’
그때 이미 아스티나는 부모님의 무기를 찾아보겠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다.
나는 오색창연한 네온사인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그럼 가볼까. 카지노를 털어보자고.”
*
“아니오. 이 돌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군요. 보석이라 할 수 없으니 칩으로 교환할 수도 없습니다.”
보석감정용 현미경인 루페에서 눈을 떼며 감정사 여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트위저로 붉은 돌을 집어 다시 우리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대수림에서 야수들과 대항하게 만들어주었던 ‘빨강이’.
캉이는 당당하게 내민 돌이 퇴짜를 맞자 시무룩해졌다.
“히잉. 그럼 우린 어떻게 카지노에 들어가?”
우노키오 카지노에 숨어드는 건 시작부터 난항이었다. 지금까지는 층장의 수갑을 보여주면 어느 곳이든 입장이 불가한 장소가 없었지만 카지노는 달랐다.
마피아의 소굴이자 그들이 재물을 획득하는 주요수단이기 때문인지 이 환전소에서 칩을 바꿔가지 않으면 단순 입장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칩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오직 보석뿐이라니.”
나는 인벤토리를 빠르게 훑으면서 탄식했다.
다이아몬드나 에메랄드 같은 장신구가 붙어있는 액세서리라도 있으면 혹시 써먹어 볼 수 있을까 했는데, 그런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나오지 않았다.
일단 카지노 안에 숨어들어야 계획의 첫 단추가 바로 끼워질 텐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훨씬 큰 위험을 감수하고 정면으로 쳐들어가야 하나.
“슈바인, 잠깐 나 좀 봐.”
아스티나가 감정소의 구석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러고 나서 그녀가 꺼내든 것은 청룡패웅검이었다.
“왜 갑자기 검을 꺼내 드는…… 아하, 설마?”
“응. 내 검엔 월장석이 있으니까. 이걸 칩으로 환전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좋은 생각인 것 같아, 아스티나.”
그런데 이걸 어째서 은밀한 장소까지 찾아낸 다음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 보여준 걸까.
“이 월장석을 떼어내기 전에 꼭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었거든.”
그렇게 말한 뒤 아스티나는 월장석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생각지 못한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섬세하게 세공된 월장석의 한 면으로부터 홀로그램과 비슷한 영상이 흘러나온 것이다.
“이건…… 어릴 적의 너야?”
서너 살 정도 되는 여자아이가 삼월초원으로 보이는 들판을 달리고 있었다.
다음 순간 아이는 류운학의 어깨에 목마를 탄 채 귀혼산의 대나무숲을 거닐며 까르륵거리고 있었다.
달맞이 꽃차를 입에 댔다가 맛이 없다며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다. 그 순간 홀로그램 영상이 간드러지게 흔들렸다.
나는 그제야 이 홀로그램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누군가의 기억을 마법으로 저장해 둔 것이다.
어린 아스티나와 천마 류운학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는 시점의 주인공은 아마도…….
“맞아. 엄마가 섬광의 마도사인 유진 쿤딜리니 이모의 도움을 받아서 구현해 둔 환영 마법이야.”
딸이 차근차근 성장하는 모습을 담아둔 것이었다. 젊은 부모들이라면 응당 자식의 일거수일투족을 카메라에 담아두고 계속 돌려보기 마련인 것처럼.
이건 마녀 일레인 쿠디슈가 남겨 둔 홈비디오다.
아스티나를 블랙홀에 밀어 넣었던 첫 번째 평행우주의 일레인.
“이렇게 소중한 걸 고작 칩으로 바꾸겠다고? 다시 생각해, 아스티나.”
“블랙홀을 셀 수 없이 넘나들면서 나는 이걸 수천수만 번 돌려봤어. 물건은 물건이고 기억은 기억일 뿐이야. 다만 이걸 너에게 보여준 건 내 각오를 알아줬으면 해서였어.”
빠각.
월장석을 쥔 아스티나가 손에 힘을 쥐자 복숭아만 한 보석은 검 손잡이 끝에서 똑하고 떼어졌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거야. 그러니 네가 나를 도와주지 않겠어?”
“천마폭류검만 노리고 있는 게 아니구나.”
“응. 너에겐 성검 아론다이트가 있고 제르비어스도 오메가 위프를 되찾게 된다면 우리 등반대의 전력은 훨씬 강력해지겠지?”
뒤처지고 싶지 않다. 더 강한 힘이 필요하다.
그런 의지가 아스티나의 말투에 담겨 있었다.
“좋아. 내가 이번 층에서 제르비어스와 너를 한 단계 높은 곳으로 이끌어주겠어. 템빨의 진면목이 뭔지 모두에게 보여주자고.”
나는 ‘템빨’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고개를 갸웃하는 아스티나에게서 월장석을 건네받았다.
월장석을 들여다본 오토마타 감정사는 크게 놀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건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거군요. 가장 높은 등급의 블랙 칩 두 박스는 드려야 할 텐데, 전당포에서 부족한 칩을 가져올 터이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잠시 후.
붉은색 스웨이드 재질의 턱시도를 입은 캉이가 카지노 앞에 섰다.
양손에는 블랙 칩이 가득 담긴 가방 두 개를 들고.
“누나, 나는 준비됐어!”
캉이가 돌아본 곳에는 순백의 드레스를 차려 입은 아스티나 류가 레드 카펫을 밟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마녀 일레인이 결혼식 날 입었던 웨딩드레스. 비록 날개는 없었지만 대신에 만철도시의 오색창연한 광채가 드레스에 반사되며 강렬한 후광을 내비쳤다.
그것을 꺼내든 아스티나는 지금 사교계에 태풍을 불러온 귀족가의 여식처럼 눈이 부셨다.
“슈바인, 마지막으로 해줄 말 없어?”
“어? 응. 조심해. 머리는 어떻게 틀어 올린 거야?”
“작전의 세부사항을 점검해줘야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아스티나는 흑기사의 방패와 현무패웅검을 내게 건네며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머리를 한 번 털고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무기를 들고 갈 수 없으니까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니라면 힘을 쓰는 건 자제해. 첫 번째 목표는 마피아의 보스에게 접근하는 거니까.”
“그래. 맡겨둬.”
“누나는 내가 지켜줄게!”
“캉이야, 너도 마찬가지야. 기본적으로 카지노라는 곳은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 곳이거든? 누나 옆에서 떨어지지 말고 딱 붙어 있어야 돼.”
“응! 그럴게.”
예상했던 대로 우노키오 카지노에는 도저히 힘으로 뚫을 수 없는 굉장한 수준의 진법이 펼쳐져 있었다. 귀혼산장의 광멸복마진보다 더욱 견고하다는 것이 아스티나의 평가였다.
일단 무기를 가진 오토마타는 결계를 통과할 수 없었다. 카지노 내부에서 무기를 패용할 수 있는 자들은 블랙슈트의 마피아 조직원뿐.
또한 죄수의 수갑을 찬 나와 제르비어스에게도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기본적으로 이 카지노는 등반죄수를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카지노 잠입 멤버는 아스티나와 캉이, 단 둘로 좁혀졌다.
둘은 죄수가 아니므로 수갑을 차고 있지 않기에 결계를 통과하는 데 무리가 없다.
게다가 마피아와 충돌했을 당시 아스티나는 흑기사의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고 있었고 캉이는 구미호로 변신한 상황이었다.
즉, 카지노 내부에서 마피아의 간부와 마주쳐도 둘의 얼굴을 알아보지는 못할 것이다.
제르비어스가 아스티나에게 말했다.
“부탁한다.”
저 안에서 아스티나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마왕이 채찍을 되찾을 수 있느냐가 결정될 것이다. 아스티나는 초조한 기색의 제르비어스에게 윙크를 날려 주었다.
“카지노를 다 털어먹고 올 테니까 큰 가방을 준비하고 있어. 알았지?”
그렇게 은발의 마검사와 그 시종을 연기하는 구미호 소년이 카지노에 입성했다.
*
거대한 샹들리에가 높은 천장에 달려 있었다.
드넓은 홀에 수천 명의 오토마타들이 각자의 게임에 집중하는 가운데, 기둥 옆과 벽면에는 살벌한 기세를 내뿜는 마피아 조직원들이 도열해 있었다.
비록 배역을 받아든 오토마타들이라곤 하지만 향락과 탐욕의 에너지는 인간들의 그것 못지않았다.
“젠장. 왜 클로버가 안 뜨는 거냐고!”
“잭팟이다아아아! 저리 비키지 못해? 경비원, 날 좀 지켜줘.”
퍼레이드에서 그들을 환대해주었던 시민들과는 전혀 다른 눈빛의 오토마타들이 왁자지껄 떠들었다. 황금색 조끼를 입은 딜러들은 능숙한 동작으로 룰렛을 돌리거나 카드 패를 섞었다.
“누나, 나 좀 무서워지려고 해.”
이렇게나 강렬한 풍경을 처음 보는 캉이가 중얼거렸다.
“정신 똑바로 차려, 캉이야. 우린 지금 여기 손님으로 와 있는 거야.”
당황스럽기는 아스티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적어도 그녀는 목표를 망각하지 않고 있었다.
여덟 명의 마피아가 삼엄하게 감시하고 있는 플로어의 끝.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저곳이 카지노의 VIP 룸으로 연결되는 계단.
[VIP의 자격은 골드 칩입니다. 골드 칩은 블랙 칩 10박스와 교환할 수 있습니다.]
아스티나의 손가락이 검은색 칩 하나를 경쾌하게 튕겨냈다.
칩은 이내 휘둘러진 순백의 장갑에 낚아채졌다.
“무려 다섯 배의 수익을 올려야 VIP 룸을 구경이라도 시켜준다 이거지?”
아스티나 류는 웃었다.
그녀는 오늘 이 카지노가 만들어진 이래 단 한 번도 없었던 ‘파란’을 일으켜볼 작정이었다.
아무도 그녀의 과거를 아는 이가 없었으나,
사실 어린 시절 그녀는 삼월초원의 초마인들을 쩔쩔 매게 만들었던 독보적인 사고뭉치였다.
‘난장판을 만들어주겠어.’
무수한 욕망의 인파 속으로 아스티나가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