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숙원청부업자 (1)
- 그리하여 이 푸르가토리움에는 연금술사가 탄생시킨 만철도시 사니릭타운이, 오토마타 레나스가 멸망시키기 직전의 모습으로 복원된 것입니다.
마도서 단탈리온의 이야기가 끝이 났다.
인간 사니릭투스가 연금술사로 성장하고 그 과정에서 씻을 수 없는 업보로 인해 죄수가 된 뒤, 종국엔 교도관의 책무를 맡게 된 사연.
“많은 의문이 풀렸어.”
어째서 이 4층이 감옥과 어울리지 않는 생경한 환경이었는지, 인간의 외형을 한 자동인형인 오토마타들이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하고 있을 수 있는지, 층장을 뽑기 위한 시련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 등등.
“이 층은 거대한 연극무대였어. 감독은 연금술사 그룬덴 사니릭투스. 배우들은 그가 만들어낸 오토마타와 해방시킨 무기들.”
내 중얼거림에 제르비어스가 첨언했다.
“그렇다면 주인공은 방금 전의 그 소녀겠군.”
오토마타 레나스.
천상의 목소리로 관객들의 심금을 울리던 소녀는 본래의 세계에서 악마의 꼬임에 넘어가 무수한 인간들을 학살했던 살상병기였다.
귀여운 외양과 어울리지 않는 암울한 전사.
아무리 겉모습으로 상대를 파악하면 곤란한 푸르가토리움이라지만 이건 정도를 넘어섰다.
‘오페라 극장에서 우리가 괜히 더 귀찮게 했었다간 큰일 날 뻔했겠는걸.’
아스티나는 단탈리온의 이야기에서 등장한 파천황의 무기 ‘기원검’을 짚고 넘어가자고 했다.
창밖을 가리키는 아스티나의 손가락.
“이런 대도시를 구현화했다는 것은 평범한 무기가 아니라는 걸 거야. 기원검이라는 이름도 그렇고. 접촉한 자의 소망을 이뤄주는 일종의 마법. 어쩌면 권능일지도 모르고.”
내 머릿속을 스치는 한 여인의 모습이 있었다.
오토마타를 통해 나에게 거래를 제안했던 톱니바퀴의 여신 벨리오나.
그녀는 내게 ‘기원검의 손잡이를 줄 테니 층을 오르며 파편을 회수해달라’고 요청했었다.
당연히 수상쩍기 그지없는 거래였기에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단탈리온의 이야기에서 기원검의 파편이 도시 하나를 부활시킬 정도라는 걸 확인하고 나니 구미가 당기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너희한테 보여줄 게 있어.”
나는 인벤토리에서 여신 벨리오나가 건네준 회중시계를 꺼내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시간이 멈춰진 세계에서 그녀와 나눴던 대화를 전했다.
“나도 그 누나 만나보고 싶어!”
캉이는 자신이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신기해했다. 세상이 모두 누나와 형으로 양분되어 있는 녀석의 기분이란 어떤 걸까.
“나와 이야기를 나눈 건 그 죄수의 본체가 아니라 인형에 불과했지만 보통 녀석은 아니라는 느낌이었어. 그 무지막지한 설공과 같은 층에 있는 여자니까 얕봐선 안 돼.”
아스티나도 내 말에 동의했다.
“엄마는 중력 마법의 9서클에 도달한 마녀였어. 하지만 그런 엄마도 시간의 흐름을 조작하는 건 존재 유무를 알 수 없는 10서클은 되어야 시도해볼 수 있다고 했으니까.”
“용사야, 네놈이 기원검의 파편을 회수해간다면…… 그 파편이 몸에 박혀있는 교도관 ‘침묵으로 통곡하는 검’은 어떻게 되는 거냐.”
“분명히 타격을 입겠지. 교도관이 우리에게 했던 마지막 말을 생각해 봐. 정당한 주인이 아닌 자가 무기를 갖고 올라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에…….”
“자신을 죽이면 된다고 했지.”
앞뒤가 맞아 들어간다.
교도관은 기원검 네메시스의 파편을 몸 안에 받아들이는 대가로 이 만철도시를 감옥 안에 쌓아 올렸다.
내가 파편을 회수한다는 의미는 곧 이 도시와 모든 오토마타들을 무로 되돌린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현재 용사는 보너스 퀘스트 수행 중입니다.]
만철도시를 둘러보라고 내준 보너스 퀘스트.
과연 교도관장은 어디까지 내다보고 이런 퀘스트를 내어준 걸까. ‘침묵으로 통곡하는 검’을 죽여서 만철도시를 무너뜨리는 것을 바라고 있는 걸까.
아니면 벨리오나라는 8층의 죄수가 내게 접근하면서 교도관장의 계획에 어떤 변수라도 생겨난 것은 아닐까.
‘자유의지를 가진 자를 사랑한다고?’
하여간에 음흉한 녀석. 한 방에 다 알려주는 법이 없지.
“일단 기원검에 관한 문제는 뒤로 미뤄두자. 눈앞에 닥친 것에 집중해야지.”
제르비어스의 채찍 오메가 위프.
당면한 숙제는 바로 그것을 본래 주인의 손에 되찾아주는 것이다.
“일단은 하룻밤만 여기서 묵고.”
단탈리온에게 넘겨준 MP가 완전히 회복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바닥난 마력을 다시 채우고 나면,
“사이브리즈를 만나러 가자.”
숙원을 들어주면 오토마타와 무기의 연결은 해제된다고 했다.
검궁기사단의 그 오토마타가 어떤 숙원을 갖고 있는지 궁금했다.
*
“불이야!”
“살려주세요~!”
거대한 화마가 건물을 아래서부터 집어삼키고 있었다.
강변에 위치한 다섯 채의 건물이 화재에 휩쓸려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우르릉.
탑 꼭대기에 걸려 있던 우체국 간판이 떨어져 내렸다.
그 아래엔 미처 몸을 빼내지 못한 오토마타 여자아이가 쓰러져 있었다.
하얀 꼬리가 옆에서 순간 살랑이더니,
다음 순간 구미호로 변신한 캉이가 떨어지는 간판을 꼬리로 쳐내 아이를 무사히 구출해 냈다.
“이제 괜찮아! 일어설 수 있어?”
오토마타는 말하는 구미호를 멍하니 바라보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결국 캉이는 아이의 뒷덜미를 물더니 안전한 곳으로 몸을 빼냈다.
휘이이익!
불타는 우체국의 옥상에서 하얀 제복을 입은 여인이 뛰어내렸다. 채찍 오메가 위프로 세 명의 시민들을 대롱대롱 매단 채였다.
사이브리즈가 우리를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또 당신들입니까. 지금은 여러분을 상대하고 있을 시간이 없…….”
“우리가 돕지요. 어떻게 된 일입니까?”
사이브리즈는 달라진 우리의 태도에 멈칫했으나 시간을 낭비하진 않았다.
“누군가 우체국에 방화를 저질렀습니다. 불길이 인접한 건물들로 번지는 바람에 구출하지 못한 시민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습니다.”
“이 도시에 소방차는 있습니까?”
“소방비행선이 날아오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때쯤이면 불길이 걷잡을 수 없게 될지도 몰라요.”
사이브리즈는 채찍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명수였으나 빙결 마법 같은 게 걸려 있지 않는 한 화재와 싸우기엔 적합하지 않은 무기다.
“용사야, 너의 기감으로 생존자를 찾아낼 수 있나.”
“불가능해. 오토마타들은 기가 없으니까.”
대신에 나는 단탈리온에게 신세를 지기로 했다. 마도서는 불타는 건물에 남아있는 오토마타들의 숫자와 위치를 알려주었다.
“3분 안에 모두 구출하겠다. 사이브리즈, 당신. 오메가 위프라면 잘 받아낼 수 있겠지?”
“네? 네…… 네?”
“그럼 믿겠다.”
어리둥절해하는 검궁기사단원을 뒤로 한 채,
망토를 집어던진 제르비어스가 거침없이 불길 속으로 달려갔다.
사이브리즈는 완전히 달라진 마왕의 눈빛에 당황해 녀석을 붙잡지 못했다.
“당신의 동료는 제정신입니까?”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녀석은 마그마에 발을 담가도 멀쩡한 특이체질이라서요. 기다려보세요.”
잠시 후.
콰아아아앙!
건물 외벽이 보라색 섬광과 함께 터져나갔다.
마왕의 오의 지옥파쇄포.
구멍 안에서 누군가 거센 힘으로 집어던진 듯 오토마타들이 투포환처럼 날아들었다.
사이브리즈는 기겁했으나 어느새 그녀의 손은 오메가 위프의 손잡이를 향했다.
그녀가 채찍으로 오토마타들을 구해내는 사이, 나와 아스티나는 천마어기행공으로 날아올랐다.
아스티나가 물었다.
“어떻게 할 거야?”
그 질문은 방법이 있느냐고 묻는 게 아니었다. 여러 가지 방법 중 어떤 걸 고를 거냐고 물어오는 것이었다.
[마도제국학파 중력마법]
[리버스 그래비티]
참월의 마녀에게 전수받은 중력 마법은 보통 고체를 대상으로 하지만 컨트롤에 자신 있다면 액체에 적용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나는 등 뒤의 강물에서 다섯 개의 수구(水狗)를 퍼올리는 데 성공했다.
아스티나가 곧바로 나를 따라해 우리의 머리 위엔 수영장 여러 개를 채울 수 있는 양의 수구가 즐비해졌다.
[천마신교 비전 무극파천공]
[허공섭물]
열 개의 수구가 발화점에 충돌하는 순간 물보라를 일으키며 불길을 잡아먹었다. 그렇게 서너 번 반복하자 더이상 다른 건물로 화마가 넘어가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아수라대멸겁 같은 큰 기술로 건물 자체를 쓸어버린다면야 더 간편했겠지만 그래서야 곤란하다.
이 모든 장소가 실제의 세계를 모방하는 ‘가짜’라고는 해도 레고블럭을 박살내듯 건물을 부숴버리는 건 당치 않은 이야기였다.
뒤늦게 비행선으로 도착한 검궁기사단과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브리즈가 우리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도시의 치안을 맡고 있는 몸으로서 여러분께 감사를 표합니다.”
“아닙니다. 그렇게 거창한 일은 아니었어요.”
나는 평온하게 대꾸했으나 등 뒤에서 보란 듯이 과장된 동작으로 망토를 털어대고 있는 제르비어스 때문에 빛이 조금 바랬다.
사이브리즈는 난처한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층장 님에게 신세를 지는 날도 오는군요. 이 도시의 모든 것은 곧 등가교환. 단장님이 이에 대한 보상을 여러분께 드릴 겁니다.”
그녀의 눈빛이 다시 평소의 엄격함을 되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도시의 은인이시라 하더라도 제 무기를 넘겨드리는 건 불가합니다. 이렇게 절 따라다니셔도 절대…….”
나는 사이브리즈의 말을 도중에 끊어야 했다.
“채찍을 넘겨달라고 도와드린 건 아닙니다. 물론 당신을 찾아다닌 건 사실이었지만, 우연히 화재가 일어난 현장에 있었을 뿐이에요.”
새카맣게 그을린 화재 현장은 대수림의 야수왕 훔바라스 세 마리가 지나간 듯 을씨년스러웠다.
“보통 이렇게 불이 자주 나는 겁니까?”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정밀조사가 이뤄져야 하겠지만 방화를 일으킨 건 분명…… 마피아의 소행일 겁니다.”
마피아.
오르콰이움의 낫과 올쿠레 어르신의 전투도끼를 휘두르는 검은 무리들.
이 도시에 거하는 오토마타들이 저마다 배역을 갖고 있듯, 마피아들 또한 도시에 혼란과 소요를 가져오는 것이 부여받은 배역일 것이다.
물론 스스로 그렇다는 자각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순서는 뒤바뀌었지만 사이브리즈에게 물어야 할 것이 있었다.
“당신은 어째서 마피아를 그렇게 싫어하는 건가요? 그게 검궁기사단의 일원이기 때문인가요?”
사이브리즈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폭력이 싫습니다. 자연과 평화를 사랑하죠.”
무심코 제르비어스의 뚱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쩌면 오메가 위프의 주인들은 비슷한 성향을 갖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는걸.
“하지만 마피아들은 제가 사랑하는 평화를 위협하는 무리들입니다. 그들을 척결하기 위해 저는 하얀 제복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피아를 전부 없애버리는 게…… 당신의 숙원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건가요?”
내 질문에 사이브리즈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폭력에 대항하는 게 반드시 폭력이어야만 한다고 믿진 않습니다. 숙원을 물으신다면 마피아의 보스인 칸을 도시의 법정에 세워 판결을 받도록 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죠.”
조건이 조금 더 까다로워졌다.
섬멸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평화주의자 사이브리즈의 숙원은 그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흔히 밤의 대통령이라 불리는 마피아의 보스를 포획해와야 하는 거로군.
“그 보스란 자를 체포하는 데 성공한 적은 있나요?”
아스티나의 질문에 사이브리즈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직 그런 적은 없습니다. 칸이 가진 무기의 파괴력은 도시 전체를 통틀어 손에 꼽을 만큼 대단하거든요. 게다가…… 그의 근처에 가면 뛰어난 기사단원들도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합니다.”
“몸을 가누지 못해요?”
“네. 저도 당해본 적이 있는데, 마치 수백 톤의 기차가 등 위에서 저를 짓누르는 것 같더군요. 물론 그자는 그런 기술 가운데에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고요.”
나와 아스티나는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사이브리즈가 묘사하고 있는 기술이 너무나도 친숙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거…… 천마군림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