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백조와 까마귀 (3)
“슈바인, 제르비어스가 방금 성희롱을 한 거야?”
아스티나는 물론 주변의 모두가 방금 일어난 일에 황당해하고 있었다.
대뜸 다가가선 ‘너의 육체는 내 것이다’라니.
저 마왕이 기어코 돌았나?
사이브리즈의 입에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무례한 언사를 사과하십시오. 아무리 층장 님의 동료분이시라지만 긍지 높은 병사를 희롱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볼을 어루만지던 제르비어스가 얼떨떨한 말투로 대답했다.
“아니, 나는…… 네가 아니라 그 채찍한테 한 말인데.”
“지금 저의 채찍을 탐내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더욱 불쾌하기 짝이 없군요.”
“뭐가 불쾌하다는 거냐! 오메가 위프(Omega Whip)는 내 거라고!”
“이름까지 미리 조사해 둔 건가요? 죄송하지만 제 채찍은 태어날 때부터 저와 함께 한 동반자입니다. 무슨 연유로 소유권을 주장하시는지 모르겠네요. 흥.”
사이브리즈는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듯 돌아섰다.
울컥한 마왕이 그녀의 뒤를 따라가려 했으나 내가 녀석의 망토를 붙잡아 멈춰 세웠다.
“잠깐만, 마왕. 진정하라고.”
“내가 진정하게 생겼나? 푸르가토리움에게 압수당한 오메가 위프가 뻔히 내 눈앞에 있는데!”
“저 채찍이 네 것인지 확실하지 않잖아.”
“마왕성의 보구로서 역대 마왕들의 손에서 손으로 내려온 채찍이다. 수천수만 번 저것을 들고 전장에 나섰지. 내가 못 알아볼 리가 없잖아.”
화룡도에서 이 녀석에게 친구 신청을 처음 했을 때 제르비어스의 회한은 내게 용사 일행과의 전투를 직접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때 분명 마왕은 채찍을 한 번 휘둘러 적을 일망타진 했었다.
‘그러고 보니 저런 디자인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게다가 사이브리즈(Saibrez)의 이름 자체가 강력한 증거이기도 했다.
그녀의 이름을 아나그램으로 변환하면 제르비어스(Zerbias)가 된다.
아마도 저 채찍은 폭렬마왕이 입소할 때 푸르가토리움이 수거해갔던 그 무기가 맞을 것이다.
“그래도 일단 진정해. 괜히 흥분했다가 또 오토마타한테 손찌검 당하지 말고.”
검궁 기사단의 단장인 에니찰리드가 우리 앞으로 걸어왔다.
“제 부하가 결례를 저질렀군요. 사과드립니다.”
“아니오. 제 친구가 먼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말을 해서 그런 건데요, 뭘.”
에니찰리드. 귀검신녀 딜라스틴의 검을 패용하고 있는 그녀는 여전히 절도 있는 말투를 유지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층장 님의 운신 계획에 대해 여쭈어도 될까요?”
“도둑맞은 인형을 되찾았으니 저희는 분수대의 포탈을 통해 다음 층으로 건너갈 생각입니다.”
그러자 제르비어스가 격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된다, 용사야! 나는 무조건 내 채찍을 되찾아야겠어. 오메가 위프 역시 주인 손으로 돌아오고 싶어서 울고 있을 거다!”
“……지금까지 채찍 없이도 잘 싸워왔잖아.”
“애초에 만나지 못했다면 모를까, 이 층에 오메가 위프가 떡하니 있다는 걸 안 이상 나는 포기할 수 없다.”
제르비어스는 색화첩이나 애니메이션 블루레이에 집착을 보일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진지한 얼굴로 주장했다.
“채찍이 있다면 난 폭렬마법의 오의를 8식까지 개방할 수 있게 된다. 마왕의 보구를 갖춤으로써 지금보다 두 배는 강해질 수 있는 거지. 네놈이야 현무패웅검에 아론다이트, 디아볼릭까지 있으니 내 심정을 이해 못 하겠지만.”
끄응.
제르비어스가 저 채찍으로 인해 본래의 전투력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그건 내게도 외면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우리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던 에니찰리드가 제안했다.
“듣자 하니 층장 님께서는 아무래도 이 도시에 좀 더 머물러야 할 것처럼 보이는데요. 만약 숙소가 필요하시다면 반드시 호텔 샹그릴라에 묵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호텔 샹그릴라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검궁 기사단장은 전투의 흔적으로 황폐화된 주변을 가리키며 연유를 설명했다.
“층장 님께서는 이미 마피아의 조직원들과 한 차례 충돌하셨지 않습니까. 이 층에 계신 한 마피아는 포기하지 않고 층장 님과 일행 분들을 노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호텔 샹그릴라는 검궁의 맞은편에 세워져 있지요. 기사단이 출동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숙소라서 추천 드리는 겁니다.”
제르비어스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결국 마지못해 나는 에니찰리드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단장님의 조언을 듣도록 할게요.”
*
우리는 검궁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만철도시의 중심부에 있는 호텔로 안내받았다.
“환영합니다, 층장 님. 편안한 휴식과 쾌적한 시간이 되시기를.”
호텔 샹그릴라의 지배인은 우리 일행에게 다섯 개의 침실과 두 개의 테라스, 한 개의 실내 수영장이 있는 초호화 스위트룸을 내주었다.
녹슨 철로 만들어진 침대가 삐걱이던 화룡도의 7번 방이나 대수림에서 굴을 파서 지내던 시절과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모욕적일 만큼 안락한 공간이었다.
“감옥 안에 호텔이라니.”
지구에 있을 때조차 이런 호텔에는 아랍의 석유재벌이나 할리우드 슈퍼스타들만 묵는다고 생각했었다.
‘당연히 나와는 먼 나라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내가 감옥에 끌려와서 라지킹 사이즈의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있게 될 줄이야.
수감 생활도 오래하고 볼 일이다.
“형아, 이거 진짜 맛있어.”
운동장만 한 거실에는 동서남북 네 개의 조각상이 있었고 그 모양은 날개 달린 천사들이었다. 천사들이 어깨에 짊어진 항아리에서 향기로운 음료수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캉이는 아까부터 그것을 수십 잔째 들이마시고 있다.
……저기에 알콜 같은 성분은 없겠지?
아무리 구미호라고 해도 애한테 술을 먹이면 안 되잖아.
“캉이야, 적당히 마셔. 그러다가 배탈 나면 곤란해. 이 층에는 전부 오토마타들뿐이니까 생명체가 아플 때 대처할 사람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말하는 아스티나의 양 볼은 가득 부풀어 있었다.
버튼을 누르면 천장에서 초콜릿이 묻은 팝콘이 눈송이처럼 쏟아져 내리는데, 이미 일곱 접시째 팝콘을 먹어치우고 있는 상황이다.
“아스티나, 그렇게 계속 먹다간…….”
“먹다간?”
“아니야. 아무것도.”
생각해보니 살이 찌거나 몸이 둔해질 리 없다.
이 감옥 안에선 뭘 먹어도 배가 부르는 현상 같은 건 일어나지 않는다. 그게 아니었다면 내가 절망의 탑을 밤새도록 갉아먹어서 HP를 올리는 게 가능했을 리가 없었다.
방향을 잃어버린 내 잔소리는 결국 제르비어스 폰타인에게로 향했다.
“그나저나 마왕 놈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나는 널찍한 통창으로 만들어진 창가를 건너가 테라스에서 바깥을 내다봤다. 아침 해가 떠오르고 오토마타들이 분주하게 하루의 시작을 준비하고 있는 풍경.
그리고 초고층 빌딩인 검궁의 1층에는 꽤 큼지막한 연무장이 있었는데, 이른 아침부터 하얀 제복을 입은 검궁 기사단원들이 제식 훈련을 하고 있었다.
절도 있게 원형으로 움직이는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호수 위를 우아하게 헤엄치는 백조 떼를 보는 듯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호수에는 잔뜩 골이 난 까마귀 한 마리가 설치는 중이었다.
“나랑 얘기 좀 하자니까!”
“당신과 볼 일 없습니다. 돌아가세요. 훈련에 방해가 되지 않습니까.”
제르비어스가 졸졸 따라다니고 있는 대상은 바로 오토마타 사이브리즈였다.
“딱 1분만! 그 채찍을 딱 1분만 빌려줘. 내가 오메가 위프를 휘두르는 모습을 보면 너도 납득할 수밖에 없을 거다.”
“검궁을 수호하는 기사로서 생명과도 같은 무기를 타인에게 내어주라고요? 웃기지 마십시오.”
“타인이라니, 그거 내 거라니까! 정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하아,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를 건드렸다간 검궁 기사단 전체를 상대하게 된다는 사실만 명심하시고요.”
“이이이익!”
여기서는 개미처럼 작게 보이는 제르비어스였으나 뿔을 부여잡고 울분을 참는 모습은 또렷하게 보였다.
극단적인 방법이라.
말은 저렇게 해도 마왕은 어지간해선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하진 않는 녀석이다.
차라리 상대가 피도 눈물도 없는 마피아였다면 모를까, 도시의 무고한 시민들을 지키는 기사단에게 냅다 싸움을 걸 성미가 못 되는 것이다.
나라고 해서 난처한 상황에 빠진 제르비어스를 두고 놀려줄 처지도 못 되었다.
이 감옥 안에서 강해지기 위해 줄곧 발악하고 있는 나는 녀석의 절박한 몸부림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직도 저러고 있어?”
테라스로 나온 아스티나가 팝콘 접시를 손에 든 채 혀를 찼다.
나는 초콜릿 팝콘을 한 움큼 집으며 대꾸했다.
“저대로 놔뒀다가는 정말로 기사단을 향해 전쟁이라도 선포할 기세야.”
아스티나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지금 제르비어스의 채찍을 훔쳐다 줄 생각 하고 있지?”
“……중력 마법에 독심술은 없을 텐데.”
“그냥 네 얼굴에 써 있어.”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네. 사이브리즈를 몰래 빼내서 채찍을 빼앗은 다음 포탈로 튀면 어떨까. 여기서 분수대까지는 별로 멀지도 않아.”
“도둑질은 나쁜 거라는 뻔한 말은 하지 않을게. 하지만 기사단이 가만있을 것 같지 않은걸. 몇 시간 동안 숫자를 세어보니까 검궁 기사단의 숫자는 육백이 넘어.”
“그렇게나 많아?”
“응. 백묘탑의 마법사들보다 백 명이나 더 많은 거야. 모두 강력한 무기를 든 건 말할 것도 없고.”
“게다가 오토마타라서 육체가 자동 수복하지.”
아무리 상대의 숫자가 많고 강하다 하더라도 방법은 있게 마련이다.
몇 가지 제반 조건을 갖춘 다음 기만전술을 끼얹는다면 기사단으로부터 사이브리즈를 떼어놓는 것도 가능은 할 것이다.
그런데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이 나를 망설이게 했다.
‘나는 지금 보너스 퀘스트 수행 중이지.’
교도관장이 내게 주었던 퀘스트는 만철도시에서 마음껏 휴식을 취하라는 거였다.
그리고 정당하게 획득한 모든 아이템의 소유권을 보상으로 준다고 했다.
거꾸로 말해서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얻은 아이템이라면 다음 층으로 가져갈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나는 제르비어스에게 귓속말을 걸었다.
- 마왕아, 스토킹 그만하고 일단 돌아와라.
- 나더러 단념하라고 말하려는 거라면 너야말로 단념해라.
- 그건 제트카이저 파일럿 훈이의 대사…… 됐고, 일단 돌아와. 채찍을 되찾을 방법에 대해서 같이 고민해보자고.
마왕은 어찌나 급했던지 엘리베이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텔 벽면을 달려서 테라스까지 올라왔다.
“헉. 헉. 방금 한 말 진심이겠지.”
“2층에서 만난 설공을 기억하지? 그 녀석은 분명히 목검이 아니라 무림 세계에서 사용하던 본래의 검을 들고 있었어.”
그 당시엔 어찌 된 영문인지 알지 못했으나 이제는 알 것만 같다. 설공 또한 등반을 하다 이 만철도시에 다다랐고 이곳에서 자신의 검을 회수해간 것이다.
그렇다면 제르비어스 역시 오메가 위프를 되찾을 방법이 있을지 모른다.
“선례가 존재한다는 걸 알았으니 검색을 해 봐야지.”
나는 단탈리온을 펼쳤다.
- 만철도시의 무기를 오토마타로부터 되찾는 정당한 방법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용사님께서 그걸 들으시려면 잠깐 기다리셔야 할 듯하네요.
“어째서? 가격이 비싼가.”
- 아니오. 4층의 교도관 ‘침묵으로 통곡하는 검’께서 용사님께 직접 말씀드리고 싶다고 뜻을 전해오셨습니다. 그분은 지금 화신체를 만들어낼 수 없는 상황이라며 대신 전령을 보내겠다고 하시는군요.
그로부터 잠시 후.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 도달했고, 곧이어 스위트룸의 문을 정중하게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너는?”
교도관이 보낸 전령은 우리가 아는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