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112화 (112/300)

#112. 오토마타의 세레나데 (3)

“저도 모릅니다, 관객님.”

“응? 모른다고?”

우리는 모두 아연실색해졌다.

문제를 낸 출제자가 답을 모르고 있다면 결국엔 아무도 맞추지 못한다는 소리 아니야?

하지만 레나스는 내 항의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안에 있는 기계장치는 제 귀가 정답을 듣는 순간 반응하도록 되어 있답니다. 주인님께서 해둔 안배지요. 때문에 그 순간이 오기까지는 저 역시 정답을 알지 못한답니다.”

“그렇다는 건…… 지금까지 아무도 올바른 대답을 맞추지 못했다는 거겠네?”

“그렇습니다. 그러니 관객님께서도 너무 아쉬워하실 필요는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럼 이만.”

레나스와 배우들은 그렇게 장막 뒤로 사라졌다.

“힝, 속상해.”

설마 캉이가 레나스의 노래를 계속 듣기 위해서 4층에 남겠다고 하면 어쩌지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렇게까지 고집을 피우지는 않았다.

“그래도 형아랑 누나들이랑 같이 있는 게 난 더 좋아. 떨어지고 싶지 않은걸.”

“어이구, 기특한 녀석. 형아가 약속 하나 할게. 이 감옥을 탈출해서 지구로 가게 되면 네가 좋아할 만한 무대를 잔뜩 보여준다고.”

“어? 정말? 형아가 있던 세상에도 노래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아?”

“그럼, 물론이지. 저 오토마타 소녀 못지않게 노래를 잘하는 가수도 많고…… 춤도 잘 추는 가수들이 떼거지로 등장하는 무대도 있어. 아이돌이라고 하지.”

“아이돌? 궁금해.”

나는 상큼하게 웃는 캉이의 머리를 헤집어주며 생각했다.

지구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캉이에게 아이돌 콘서트를 보여주는 건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다.

‘아니지. 이 아이의 빼어난 용모와 구미호의 날렵한 몸놀림이라면…… 오히려 아이돌을 시켜볼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인간으로 둔갑한 구미호가 속해 있는 아이돌 그룹이라. 대박은 따놓은 당상일 것 같은데.

“캉이야, 혹시 너 공중제비 같은 거 할 수 있어?”

“응? 그거 못 하는 사람도 있어?”

통로를 걷던 캉이가 갑자기 사뿐한 발놀림으로 객석의 손잡이 위에 올라섰다.

NBA 농구화가 손잡이를 박차고 날아오르는 순간, 구미호 소년은 공중의 정점에서 몸을 둥그렇게 말았다.

“와, 대단한 점프력이다.”

그리고 체공 시간도 엄청난걸?

3초가 지나도 내려오질 않잖아.

……잠깐. 3초가 지나도 안 내려온다고?

캉이는 지상 3미터 위에서 덤블링을 하는 자세 그대로 멈춰 있었다.

“아스티나, 캉이한테 리버스 그래비티라도 걸어줬…… 아스티나?”

캉이를 올려다보며 감탄하던 자세 그대로,

아스티나의 몸이 굳어 있었다. 그 옆에선 제르비어스가 오므린 입술을 손으로 붙잡은 채 조각상처럼 멈춰 있었고.

아마 휘파람을 불려던 것 같은데, 마왕의 입술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니, 그게 아니다.

이상하리만치 오페라 홀 전체에 침묵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뭐야? 다들 괜찮아?”

내가 아스티나의 어깨를 붙잡으려던 그때.

“그러지 않는 게 좋을걸.”

텅 빈 줄 알았던 객석에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극장엔 우리 일행만이 남아있는 줄 알았는데, 한 오토마타가 조용히 앉아 있었던 것이다.

*

‘언제부터 저기 있었던 거지?’

나는 재빨리 현무패웅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검이 뽑혀져 나오는 소리가 지나치게 또랑또랑하게 들렸다.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석상이 된 것 같은 동료들 앞을 막아섰다.

“너는 뭐야? 우릴 노리고 잠입해 있었던 건가.”

오토마타는 예술을 즐기는 귀부인 같은 코트를 입은 채 검은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녀의 입이 달그락 열렸다.

“경계할 필욘 없어, 슈바인 스트링거. 나는 원래 이 오토마타의 눈을 통해서 레나스 양의 노래를 듣는 게 취미거든. 잠입이라는 표현은 불쾌하구나.”

지금까지 내가 사니릭타운에서 만난 오토마타들은 한 명도 예외 없이 나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층장 님, 고객님, 손님 등으로 불렀을 뿐.

게다가 오토마타의 눈을 통했다는 부분이 암시하는 사실은 명징했다.

“너, 본체가 따로 있는 거군?”

“맞아. 위그드라실의 이파리는 구하기가 어려워서 이 오토마타의 신세를 번번이 지고 있지.”

“정체를 밝혀.”

“나는 8층의 죄수 벨리오나야. 톱니바퀴와 시곗바늘의 여신이란다.”

또 8층이냐.

천마 설공에 이어 뇌신 지드, 이번엔 자신을 여신이라고 밝히는 수상한 죄수가 등장했다.

오토마타 벨리오나의 기다란 눈썹에 푸른 광채가 어리었다.

내가 극장 내부를 환하게 밝힐 정도로 강력한 검기를 발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워워, 그러지 말아줄래? 나는 지금 면회 중도 아니야. 이 오토마타는 전투형이 아니라서 그 칼로 찌르면 단박에 고장이 나버릴 거라고. 그럼 나 엄청 곤란해진다?”

“내 친구들을 당장 돌려 놔.”

“어머, 다정도 하셔라. 걱정하지 마. 저들은 지금 완전히 안전해. 너와 나를 제외한 주변의 시간을 잠깐 멈춰 놓았을 뿐이니까.”

시간 정지.

마법을 넘어선 신격의 권능이 발휘되고 있었던 거다.

내 몸속 신경체계의 전기신호를 지배하는 솜씨를 보여주었던 지드에 비견되는, 어쩌면 그보다 더 상위의 기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방법을 써야 다른 죄수들이 너와 나의 대화를 엿듣지 못하거든. 교도관장의 시선만큼은 피할 수 없을 테지만. 놀라게 했다면 미안해.”

“본론이 뭐야.”

“등반죄수인 너와 거래를 하고 싶어. 분명 너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걸?”

“……듣고 있어.”

“8층의 죄수들 중 탈옥을 노리고 있는 녀석들은 크게 세 개의 세력으로 분할된 채 경쟁하고 있어. 첫 번째 세력은 네가 2층에서 마주친 칼잡이 설공이 소속돼 있는 신탁파. 아래층부터 꾸준히 감옥을 돌파해 온 등반죄수들이 모여 있지.”

아스티나를 납치하려 했던 녀석들이다.

“두 번째 세력은 뇌신 지드처럼 8층에 배정받은 토박이 죄수들. 신격을 갖춘 죄수들답게 떼 지어 몰려다니진 않지만 한 명 한 명의 힘이 강력해. 그 녀석들은 자력으로 탈옥을 노리고 있고.”

9층의 문을 두드리려 하는 신격 죄수들.

“마지막 한 세력이 내가 이끌고 있는 기원파야.”

“기원파?”

“파천황 르팔타커스 시온의 애병이었던 ‘기원검’ 네메시스(Nemesis). 그 전설적인 무기를 수복해서 다음 층으로 올라가려는 방법을 추구하는 세력이야.”

뇌신 지드가 심상 세계에서 르팔타커스와 맞붙기 직전에 이런 말을 했었다.

‘영광이오. 파편 상태가 아닌 기원검을 이렇게 견식할 수 있다니.’

르팔타커스가 휘둘렀던 초특급 대검. 나는 그것의 이름이 네메시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파천황이 탈옥에 실패해서 0층 대기실로 내려가 목숨을 끊은 건 알지? 그자는 자신이 돌파했던 층을 거꾸로 내려오면서 기원검의 파편을 이곳저곳에 숨겨두었어. 그중에서 우리가 찾지 못한 파편 중 하나가 이 만철도시에 남아있거든. 흥미롭지 않아?”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일 거다.

심상 세계에서 르팔타커스가 보여준 기원검의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신체가 번개나 다름없는 지드의 육신을 잘라내 버리는 무기였으니까.

“나는 파천황의 간택을 받은 너에게 네메시스의 손잡이를 줄 수 있어. 그러면 너는 푸르가토리움에 흩어져 있는 그 검의 파편을 수집할 수 있게 되는 거고.”

“대신 내가 뭘 해주길 바라는데?”

벨리오나의 오토마타가 어깨를 으쓱였다.

“없어. 그저 네가 꾸준히 등반을 성공하면서 기원검의 나머지 파편을 모아 8층에 도착해주기를 바랄 뿐이야.”

“수상하기 짝이 없는데. 그런 대단한 무기를 수집할 수 있는 물건을 건네주면서 바라는 게 없을 리 없잖아.”

오토마타는 사악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야 네가 8층에 올라오기만 하면 그 검을 우리가 빼앗아버릴 생각이니까.”

“그 싸움에서 내가 살아남으면 기원검의 주인은 내가 될 테고?”

“그렇지. 공평한 제안 아니야?”

결국 자신들이 강탈할 물건을 친히 배달해달라는 얼토당토않은 요구다.

이런 건 고민할 여지도 없다.

“거절한다. 다른 등반죄수를 찾아보는 게 좋을걸.”

“진심이니?”

“나와 친구들은 곧 이 층을 떠날 거야. 이미 4층장의 자격을 얻은 뒤니까. 그리고 어차피 너 역시 내가 8층에 올라간다면 쓰러트려야 할 상대. 미래에 적이 될지도 모르는 녀석들에게 무기를 운반해줄 생각은 없어.”

의외로 벨리오나는 별로 아쉬워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래. 지금은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미래엔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는 거 아니겠니? 내 오토마타를 불러낼 수 있는 호출기를 남겨둘게.”

오토마타의 왼쪽 어깨가 벌컥 하고 열렸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그 안에 들어있던 작은 원형의 물체를 내게 내밀었다.

“이 회중시계의 단추를 누르면 내가 알게 될 거야. 이 층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마음이 바뀐다면 언제든지 누르면 돼. 그러면 거래를 할 의사가 있다고 생각할게.”

나는 허공섭물로 그것을 넘겨받았다.

투명한 크리스탈 케이스 안에 여러 개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고풍스러운 시계였다.

“……내가 이걸 사용할 거라 장담하는 눈친데. 미래시라도 쓸 수 있는 건가.”

“아니. 신탁파처럼 취급하지 말아줄래? 나는 시곗바늘을 멈출 수 있는 권능이 있지만 바늘 위를 벗어나지는 못해. 미래를 엿보는 힘에 의존할 필요도 없고. 그러니 이건 예언 같은 게 아니라 예측이라고 해두지.”

“신격은 자신의 격보다 낮은 자에게 거짓말을 못 한다고 들었어. 이 회중시계가 함정이거나 더러운 수단인 건 아니겠지? 너의 이름을 걸고 맹세해라.”

“깔깔깔. 듣던 대로 재미난 죄수로구나, 슈바인 스트링거. 좋아. 여신 벨리오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게.”

오토마타가 옆 좌석에 놔둔 챙 넓은 페도라를 머리에 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회중시계의 단추를 누르면 금방 달려올게. 그때 다시 시간이 지금처럼 멈출 테니까 너무 당황하지 마려무나.”

오토마타가 통로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검기를 해제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시간의 흐름이 본래대로 되돌아왔음을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텁텁했던 공기의 밀도가 해방되고 있었다.

타악!

덤블링을 마치고 멋드러지게 좌석에 착지한 캉이가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짠. 봤지?”

동시에 제르비어스의 휘파람 소리가 극장 안에 울려 퍼졌다.

순간 백일몽이라도 꾼 것이 아닌가 싶었으나 손에는 벨리오나와의 만남을 증거하는 회중시계의 존재감이 확실했다.

“어라? 슈바인, 왜 워핑을 쓴 거야.”

아스티나의 입장에선 내가 갑자기 객석 뒤로 점멸 마법을 쓴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뇌신 지드와의 만남처럼 높은 층의 죄수에 관한 이야기를 알려줘야 할까.

하지만 나는 벨리오나와 거래할 생각이 없었다.

그 순간이 온다면 그때 설명하면 되겠지. 미리 친구들을 걱정시키고 싶진 않았다.

“캉이가 넘어질까 봐 받쳐주려고 그랬지.”

물론 이렇게 둘러대느라 예비 아이돌 구미호의 볼멘소리를 좀 들어야 했지만.

*

오페라 극장을 나서니 거리는 이전보다 더욱 한산해져 있었다.

나는 일행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제 다시 분수대가 있는 광장으로 돌아가자.”

“…….”

“그렇게 아쉬운 얼굴로 날 노려봐도 소용없어. 밤새도록 충분히 재밌게 놀았잖아? 기억에 오래 남을 공연도 한 편 봤고.”

이제 다시 등반죄수의 본연으로 돌아갈 때다.

만철도시는 분명 흥미로운 곳이지만 쓰러트려야 할 적이나 스킬을 빌려줄 수 있는 다른 죄수도 없는 특수한 곳이다.

즉 퀘스트의 기미도, 레벨업의 건덕지도 없는 무풍지대. 이렇게 평화로운 층의 분위기에 잠식되었다가 늘어져 버리면 곤란하다.

이런 속내를 알았는지 아스티나가 앞장서서 걸었다.

“그래. 다음 층으로 올라가자. 다행히도 내겐 제법 괜찮은 보물이 하나 생겼으니까.”

아스티나의 손바닥엔 뽑기로 따낸 고양이 인형이 다소곳이 올려져 있었다.

행운 1을 올려주는 토템.

“이것만 있으면 계속 이 층을 추억할 수…….”

타악!

그때였다.

아스티나 옆을 날아가던 공중마차의 창문에서 오토마타의 손이 튀어나와 고양이 인형을 낚아챘다.

“어? 어어어어?”

모두가 어안이 벙벙한 채 당황하고 있는 사이 공중마차는 저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뭐야, 방금?

우리 소매치기 당한 거야?

“어떤 새끼가 감히!”

분기탱천한 목소리와 함께 아스티나의 은발 머리카락이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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