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오토마타의 세레나데 (1)
“이제야 알 것 같아.”
내가 왜 이 층에 도착하자마자 층장이 될 수 있었는지.
“층장이 될 수 있는 후보가 나밖에 없었던 거야.”
살아 있는 죄수가 단 한 명도 없는 층.
올라가자마자 무료급식판의 콩나물처럼 층장의 지위를 퍼주는 파격적인 층.
“기분 나쁘구나, 마용파의 두목인 나를 놔두고 왜 너를 층장 시켜주는 거냐.”
제르비어스의 투덜거림에 반응한 건 캉이였다.
“그거야 슈바인 형아가 우리 대장이라서지. 제트카이저의 파일럿 훈이가 철왕전대의 대장인 것처럼. 그것도 몰랐어?”
“……뜬금없이 정곡을 짚지 마라, 여우 꼬마놈.”
“꼰대 마왕.”
“누가 그런 표현 가르쳐줬냐. 응?”
“대장님이지.”
뿔 달린 마왕과 꼬리 달린 소년이 티격태격하는 사이에 아스티나가 의견을 물어왔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어, 그게 말이지…….”
솔직히 모르겠다.
눈앞의 포탈에 몸을 던지기만 한다면 나는 최단 시간에 감옥의 한 층을 통과하는 셈이 된다.
머리를 싸매가면서, 목숨도 걸어가면서 시련을 돌파해온 지난 층처럼 아등바등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그것이 ‘나에게 이득인가’ 하는 점이다.
[4층의 교도관 ‘침묵으로 통곡하는 검’이 수감자의 선택을 지켜봅니다.]
나는 지금껏 푸르가토리움을 등반하면서 교도관을 게임의 보스몹처럼 생각해왔다. 아니면 던전의 최종 퍼즐처럼 취급했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이 층의 교도관은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만 있다. 찝찝하기 짝이 없다.
나는 몇몇 게임들 속에서 플레이어들을 악몽 속으로 빠트렸던 몬스터 ‘미믹(Mimic)’을 떠올렸다.
미믹은 보물상자로 의태해서 던전 깊숙한 곳에 숨죽이고 있다가 다가오는 모험가를 덥썩 삼켜버리는 종류의 괴물이다.
어쩌면 이 포탈이 미믹 같은 걸 수도 있지 않나.
“단탈리온, 이건 신종 함정이야?”
- 아닙니다, 용사님. 저 포탈은 지금까지 건너오신 포탈들과 동일한 효과를 갖고 있습니다. 타고 넘어가면 5층으로 이어지는 층간구역으로 진입하시게 될 겁니다.
함정도 아니라는 건가.
“아스티나, 네가 그랬었지? 교도관장은 날 단순히 꼭대기층으로 올려보내는 것만이 목적이 아닌 것 같다고.”
“어, 맞아. 그러기엔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으니까.”
“그걸 이 자리에서 확인해 보자.”
나는 거침없이 포탈에 손을 뻗었다.
포탈의 푸른 표면이 내 손바닥에 닿으려는 그때,
띠링!
눈앞에 퀘스트가 떴다.
[보너스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보너스 퀘스트 #1. ‘도시 유람’]
[용사는 푸르가토리움 4층의 만철도시 사니릭타운에 도착했습니다. 당신은 이곳의 층장이므로 도시의 모든 곳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습니다.
상인들은 당신을 환대해 줄 것이며 도시의 치안을 맡고 있는 기사단이 안전을 지켜줄 것입니다. 그동안 쌓인 여독을 풀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겠지요?
물론 용사는 광장의 분수대에 있는 포탈을 통해 언제든지 다음 층으로 건너갈 수 있습니다.
부디 즐거운 시간 되시길.]
[기한: 없음]
[보상: 정당하게 획득한 모든 아이템의 소유권]
[실패 시: 처벌 없음]
아스티나의 말이 맞았다.
이로써 교도관장이 내가 타임 어택하듯 푸르가토리움을 올라가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명목상 퀘스트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사실은 내게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층을 그냥 통과하지 말고 돌아다녀 보라고.
아스티나를 살해하는 퀘스트를 통해 강력한 적수인 설공의 강림을 경고했던 때와 정반대 상황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교도관장이 말하길…… 이 층에서 마음껏 놀다 가라는데?”
동료들은 삼 년 내내 수험 공부에 시달리다가 갑자기 휴양지에 내던져진 학생들의 표정이 되었다.
특히 캉이는 퍼레이드를 구경하면서 가보고 싶었던 곳들을 미리 점찍어두었다며 눈을 빛냈다.
“왜 그리 표정이 어두운 거냐, 용사야?”
나는 내가 돌아가야 할 지구를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 지구에 모든 가족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을 여동생 상희의 어깨를 떠올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일분일초도 낭비하는 시간은 없었다.
더 강해지기 위해 자신을 단련하고, 스킬의 숙련도를 올리고, 공략법을 궁리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휴식을 취하라고?
“지금까지의 여정이 과도한 강행군이었다, 용사. 네 정신력이 얼마나 부수기 힘든지 이 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만…… 때로는 쉬어갈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계속되는 긴장 속에서 심신이 혹사당해왔다는 걸 부정하진 않겠지?”
제르비어스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물론 네놈의 몸뚱이야 튼튼하기 그지없지. 푸르가토리움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육체와 마력이 자동 수복되는 곳이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이 감옥 안에서 정신병이야말로 최악의 위협이라 할 수 있을 거다.”
긴장의 끈을 풀어줄 필요도 있다는 건가.
나는 아스티나와 캉이를 돌아보았다.
녀석들은 기계 문명으로 이뤄진 이 도시를 구경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처음으로 숲을 벗어난 시골 꼬마인 캉이야 그렇다 치고…… 아스티나, 너는 설공의 목을 따기 위한 복수의 화신 아니었냐?”
“큼큼. 이건 캉이를 위해서야. 그를 위해서 내 복수가 며칠 미뤄지는 걸…… 받아들일 만큼의 도량은 있어.”
“하여간 솔직하지 못하긴.”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 몰랐네.
“좋아. 이 포탈이 여기에 계속 존재하고 있다면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도 좋겠지. 다만 이것 역시 어디까지나 퀘스트의 일환일 뿐이야. 지나치게 긴장이 풀어지면 곤란…….”
“아싸! 나 저기부터 가볼래!”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세 녀석은 모두 도시의 불빛 속으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
19세기 런던 빅토리아 시대.
만철도시의 건축양식은 그 고풍스러운 당시를 연상시켰다.
물론 이런 도시 풍경이 내게 익숙한 이유는 마녀와 뱀파이어, 늑대인간 등이 출몰하는 고딕풍 액션게임들을 플레이해온 경험 덕분이었다.
빌딩과 빌딩을 연결하는 금속 모노레일. 광고판을 띄운 애드벌룬. 정각마다 튀어나오는 시계탑의 에메랄드 뻐꾸기 등.
명백한 계획도시다.
구역과 구역을 나누는 교차로마다 철제 기둥이 깔려 있고 그 기둥 한가운데엔 에너지를 뿜어내는 마정석들이 박혀있었다.
전기를 퍼트리는 것이 아니니 전신주가 아니고 ‘마신주(魔信柱)’라고 해야 할까.
전기가 아니라 마법이 극도로 발달한 문명의 한가운데를 우리는 거닐고 있었다.
“층장 님이시군요! 우리 가게에 오세요. 만철도시 최고의 요리를 선사하겠습니다.”
“아리따운 은발의 레이디시여. 숙녀분의 기품을 한층 돋보이게 해 드릴 드레스를 맞춰 드립니다.”
“위풍당당한 흑갑의 기사분. 그 갑옷에 광택은 필요 없으십니까?”
수많은 오토마타 시민들이 우리가 걸어갈 때마다 경쟁적으로 호객을 했다. 얼굴에는 친절한 미소를 띤 채 상냥한 태도로 대접해주었다.
내 손등에 있는 불빛을 보여주면 어느 건물이든지 출입하지 못할 곳이 없었다.
마치 도시 전체가 향락과 휴식을 위한 유원지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이곳에서 나만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을 것이다.
“용사야! 저 마술사가 입에서 불을 뿜는다.”
이곳에서 나만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을 것이다.
“형아! 나 저 애드벌룬 타볼래. 태워줘! 응?”
나만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을 것이다.
“슈바인, 이걸 구슬 아이스크림이라고 한대. 혓바닥에 올려놓으면 사르르 녹아. 왜 안 먹어봐?”
긴장의 끈을…… 이이이익!
에라, 모르겠다.
나는 아스티나의 손에 들려 있는 구슬 아이스크림을 한 스푼 퍼먹었다.
짜릿할 만큼 달콤한 맛이었다.
감옥에 붙잡혀 온 이래 내 혀가 가장 호강하는 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우리는 모노레일을 탄 채 도시의 빛무리가 펼치는 무도회를 감상했다.
인형 앵무새가 짹짹거리는 정원을 누볐으며,
비행선 레스토랑에서 산해진미의 음식을 맛보고,
금속 준마들이 필드를 내달리는 스포츠 경기를 관람했다.
그런 와중에 나는 한 가지 흥미로운 요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만철도시의 모든 장소에 출입할 때 우리는 돈을 지불할 필요가 없었다. 대신에 가게 종업원이 제안하는 ‘게임’에서 이겨야만 했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기거나, 카드를 펼쳐서 높은 숫자가 나오면 들여보내 주거나 음식을 고를 수 있는 식이었다.
캉이는 노점상에서 파는 솜사탕을 얻기 위해서 주인과 물구나무 대결을 펼치기도 했다.
물론 패배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우리가 이길 때까지 종업원들은 계속 상대해주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우리 일행을 가장 매료시켰던 것은 큰 규모를 자랑하는 액세서리 숍이었다.
“여기서 인형을 뽑아가면 된다고요?”
“그렇습니다. 정밀한 컨트롤과 차가운 심장을 갖고 있어야만 하는 게임이지요.”
콧수염이 멋들어진 액세서리 숍의 주인은 자신의 가슴을 툭툭 치며 말했다.
그의 앞에는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직육면체의 상자가 있었는데, 상자 전면에는 두 개의 빨간색 레버가 달려 있었다.
“이거…… 인형 뽑기잖아?”
기계 상단에 네 개의 발을 가진 집게가 달려 있었고 레버로 이것을 움직여서 인형을 뽑아내는 일종의 게임머신이었다.
곰돌이 인형성애자라 할 수 있는 아스티나가 상기된 얼굴로 덤벼들었다.
하지만 열 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인형도 뽑아내지 못했다.
집게로 인형을 포착하는 데까진 쉬웠다. 그런데 중간중간 빨대가 튀어나와 바람을 불어 인형을 떨어트리는 방해꾼 역할을 했다.
“……이거 부숴버려도 돼?”
발끈한 아스티나가 청룡패웅검의 손잡이를 움켜쥐는 걸 내가 막아섰다.
“골라 봐. 뭐가 갖고 싶은데?”
“어? 네가 뽑아줄 수 있다고?”
나는 거만한 동작으로 손바닥을 털며 말했다.
“이 감옥에 붙잡혀 오기 전에 나는 온갖 컨트롤러를 정복했던 알파 테스터였어.”
“그게 뭔데?”
“쉽게 말해 이런 게임의 전문가라 이거지.”
내가 레버를 잡자 공기가 달라졌다. 숍을 둘러보던 오토마타들이 호기심을 빛내며 층장의 솜씨를 구경하러 모여들었다.
나는 거침없이 집게발을 움직였다.
곧 무수한 인형들에 파묻혀 있던 하얀 고양이 인형을 집게발이 덥썩 움켜쥐었다.
인형의 머리와 왼쪽 어깨 사이의 공간, 그리고 두 다리에 집게발이 완벽히 걸려들었다.
‘절대 실패하지 않아.’
이미 빨대가 튀어나오는 위치와 바람의 강도는 모두 파악했다. 쫀득한 레버의 탄성과 내 손바닥을 밀어내는 강도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빰빠라밤!
내가 하얀 고양이처럼 생긴 인형을 뽑는 데 성공하자 샹들리에에서 폭죽이 터졌다.
아스티나는 고양이 인형을 품에 안으며 싱글벙글 웃었다.
“이건 다음 층으로 가도 사라지지 않는 거겠지, 슈바인?”
“응. 퀘스트엔 이 층에서 얻은 모든 물건을 가져갈 수 있댔어.”
내가 인형의 수염을 쓰다듬자 띠링! 하며 아이템 설명창이 생겨났다.
[이름: 깜찍한 고양이 토템]
[등급: D급]
[인형의 귀여움으로 소지자의 기분을 들뜨게 만들어 줍니다. 인벤토리에 넣으면 행운 스탯을 1 올려 줍니다.]
행운 스탯?
지금까지 그런 스탯은 내 상태창에 한 번도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