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만철도시 (2)
오랜만에 곰인형을 껴안고 있던 아스티나는 격하게 반항했다.
“절대불가! 안 돼에에! 생사결 할래?”
“내가 교도관장과 긴히 할 말이 있어서 그래. 넘겨주지 않으면 허공섭물로 뺏어버릴 거야.”
“흥. 아직 날 이길 정도는 안 돼.”
“맞아. 그래서 우리가 동시에 허공섭물을 쓰면 그 곰인형이 부욱 찢어지겠지. 그렇게 되길 원해?”
“……힝.”
교도관장이 강림하는 육체인 이 곰인형은 산산조각 나도 금방 원상복구된다. 하지만 아스티나는 그런 걸 몰랐기에 결국 볼을 부풀린 채 곰인형을 놔줘야 했다.
“나와 봐, 교도관장.”
곧 엎드려 있던 곰인형이 두 발로 일어섰다.
“무슨 일이신가요, 수감자여.”
“부탁할 게 하나 있어.”
곰인형이 팔짱을 끼더니 다리를 까닥거렸다.
“그 말씀은 저를 곤란하게 만드는군요. 이미 당신의 사정을 너무 많이 봐주는 것 아니냐는 교도관들의 항의가 매일 쏟아지고 있거든요.”
“아주 간단한 거야. 다른 교도관들이 불평할 만큼의 특혜는 절대 아니지.”
“부탁의 내용을 듣고 판단해 보겠습니다. 뭔가요?”
“이 층간 구역의 어떤 물건을…… 다음 층으로 가져갈 수 있겠어?”
“어렵겠군요. 불가능하다기보단 예의의 문제라서요. 이 장소는 당신의 기억에서 추출된 곳이지만 구성 물질은 전부 교도관장인 저의 권능으로 만들어졌지요. 각 층은 교도관이 설계한 시련의 장소이자 불가침의 성역.”
자신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물건을 교도관들이 결코 반기지 않으리라는 설명이었다.
“네가 이 감옥의 통치자라며? 까라면 까야 되는 거 아닌가.”
“신격 존재들의 위계는 인간들의 그것과 다르게 돌아가지요. 또한 생각해 보세요, 슈바인 스트링거. 아무리 직장 상사라 해도 허락 없이 부하의 책상 위에 벗은 양말을 던져두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요?”
원칙상으로는 안 된다는 거다.
그래서 대수림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곰인형을 품에 안고 나온 아스티나가 망연자실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낙담하긴 이르다.
나는 다른 측면을 공략해보기로 했다.
“내가 가져가고 싶은 물건은 전투에 쓸 수 있는 게 아니야. 탈옥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아이템도 아니지. 그냥 옷가지 몇 벌이야.”
곰인형의 눈빛이 깊어졌다.
내가 무엇을 가져가고 싶어하는지 알아챈 듯하다.
“……호이란의 아들. 그 소년을 위한 선물이라는 거군요.”
“응. 저렇게 계속 누더기 옷을 입고 다니게 할 순 없잖아?”
교도관장은 이 푸르가토리움을 만들고 관리하는 초월자다. 그리고 단탈리온이 흡수 당하고 싶어하는 아카식 레코드의 관리자이기도 하다.
그런 우주적인 존재에게 감정이라는 건 존재할까.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때 곰인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괜찮습니다. 7층의 교도관 ‘영겁에 똬리를 튼 용’께서 다른 교도관들께 선처를 부탁하셔서 일이 쉬웠어요.”
7층 교도관이라면 호이란의 기억 속에서 엿보았던 거대한 세계수 위그드라실에 파묻혀 있던 거룡.
“캉이의 엄마인 호이란은…… 아직 살아 있나?”
“안타깝게도 그것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대가 등반을 계속한다면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알아내실 수 있겠죠.”
“그녀는 너에게 목숨 하나를 부탁했고, 넌 그 목숨을 내게 퀘스트 상품으로 내걸었지. ‘왕이 될 자’에게 준다면서.”
“그랬습니다. 그렇게 대단한 걸 고생 없이 얻으면 재미가 없잖아요?”
“왜 날 왕으로 만들려는 거지?”
나는 목소리를 깔고 진지하게 물었는데, 교도관장은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당신이 저 구미호 소년에게 정신지배를 걸었을 때 호이란의 환영을 만났겠지요?”
“…….”
“원래 소년의 기억 속에는 훨씬 위협적인 방어체계가 각인돼 있었습니다. 정신지배 스킬은 양날의 검. 당신이 그 소년을 지켜주기 위한 목적으로 스킬을 사용했기에 호이란의 방어 술법이 발동되지 않았을 뿐, 만약 못된 마음을 먹었거나 소년의 힘을 악용하려고 했었다면 탈출할 수도 없는 미로에 갇혀 정신이 파괴되었을 거예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늘 그랬듯이 조심하라는 겁니다. 무운을 비는 거죠, 슈바인 스트링거. 당신을 왜 왕으로 만들려고 하냐고요? 질문에 오류가 있습니다, 수감자여. 저는 당신을 왕으로 만들려고 한 적이 없거든요.”
곰인형의 눈빛에 담긴 총기가 희미해졌다. 녀석이 떠나려는 것이다.
“……당신은 단 한순간도 왕이 아니었던 적이 없습니다.”
*
“이걸로 할래!”
캉이가 내 방의 옷장에서 골라든 것은 빨간색 티셔츠와 청바지였다. 아마 대수림에서 계속 붉은 돌을 주워 다녔기에 친근한 색상이라고 여긴 게 아닐까.
제르비어스마저 캉이의 안목을 칭찬했다.
“훌륭하다, 꼬맹이. 철왕전기를 보여준 보람이 있군.”
빨간 티셔츠의 중앙에는 변신로봇 제트카이저의 전신 그림이 인쇄돼 있었다. 애니메이션 방영 당시 애독자 이벤트에 8주 연속 응모해서 끝내 받아냈던 선물이기도 했다.
캉이의 체구는 내가 어렸을 때와 거의 흡사했다. 물론 인간을 홀리는 구미호답게 용모와 기품은 이 당시의 나와 비교할 계제가 아니다.
마치 아동복 모델을 보는 듯하다.
“잘 어울려, 캉이야. 아주 높으신 양반의 권능이 담긴 거라서 찢어지거나 날아가더라도 곧 멀쩡해질 거야.”
캉이에게 NBA 운동화를 신겨주고 있던 아스티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옷이 찢어질 거라고 가정하는데? 애한테 뭘 시키려고?”
“캉이가 원할 때 변신할 수 있는지 확인해 봐야지.”
“에엑! 애한테 싸움을 시키려고 하는 거지? 그거 아동학대다.”
“자기 몸을 지킬 줄은 알아야지. 그리고 캉이의 귀여운 귀와 꼬리에 현혹되지 마.”
얘, 우리가 전부 달려들어도 못 이겼었다고.
아스티나는 투덜대면서도 거실 공간을 운동장 크기로 확장시켜 주었다. 그녀 역시 감옥의 특수성을 생각하면 캉이 또한 전력으로 포함해야 한다는 걸 받아들인 것이다.
“자, 그럼 시작해볼까.”
캉이는 머리를 긁적였다.
“변신,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마음속으로 여우의 모습이 된 자신을 상상하래. 그러면 될 거라고 단탈리온이 말해줬어.”
세 어른이 안전거리까지 물러서자 캉이는 슬그머니 눈을 감았다.
스파아아앗!
붉은 광휘가 터져 나오며 어린 소년의 육체는 온데간데없이 늠름한 구미호가 위용을 내뿜었다.
광기로 폭주하던 눈빛과 달리 온화한 동공으로 캉이가 말을 걸어왔다.
“형아, 기분이 이상해. 막 간지럽고 신나고 그래.”
전투의 고양감일 것이다.
하지만 캉이는 제정신으로 변신한 것이 처음이기 때문에 그것을 표현할 단어를 아직 갖지 못했을 뿐.
나는 200미터 정도 떨어진 식탁 위의 요구르트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걸 맞춰보는 거야. 할 수 있겠어?”
“응. 해볼게.”
캉이가 가슴을 부풀린 후 고개를 살짝 뒤로 당겼다. 그리고 두 앞발로 단단히 지면을 즈려밟은 뒤 여우트림을 내쏘았다.
콰아아아아아아!
거실에 대폭발이 일어났다가,
곧바로 필름이 되감긴 것처럼 원상복구 되었다.
“아스티나. 봤어?”
“정확히 목표물에 맞췄어. 대단한 명중률이야.”
아스티나가 박수를 쳤다.
그녀는 중력 마법으로 시야를 왜곡해서 양궁 경기의 판정 카메라처럼 보고 있었기에 명중 장면을 눈앞에서 본 셈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꼬맹이의 덩치가…… 좀 작은 느낌인데? 우리와 싸웠을 때보다 절반 정도밖에 안 되지 않나.”
제르비어스의 말처럼 캉이의 체고는 대수림에서 폭주했을 때보단 아담한 사이즈였다.
단탈리온에게 연유를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 3층의 교도관은 캉이 님의 힘을 갈취하고 있기도 했으나, 태양이 가려지는 순간에는 힘을 빌려주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교도관의 권능을 제외한, 온전히 구미호로서 가진 본래의 힘만 갖고 계신 거죠.
그렇군.
캉이의 어머니인 호이란이 있는 곳은 7층 세계수의 천공섬. 앞으로 두 개의 층을 더 돌파해야 그곳에 닿을 수 있다.
그동안 꾸준히 캉이를 성장시켜서 본래 구미호가 가진 위용을 갖추도록 만들어주고 싶다.
그게 호이란의 뜻에 부합하는 거겠지.
“이제 다시 돌아와 볼래?”
붉은빛이 또 한 번 번쩍이더니 캉이가 인간 형태로 되돌아왔다. 헐크처럼 옷이 찢어지거나 사라지진 않는 것 같았다. 늑대인간 같은 하급 야수와 달리 변신의 원리가 술법의 영역이기 때문인 듯하다.
아스티나가 다시 거실을 본래의 크기로 되돌렸다.
“응? 이제 특훈은 하지 않는 거냐.”
“어. 지난번 세 달간의 특훈 동안에 이 공간에 있는 마력을 전부 사용해 버렸거든.”
혹시나 교도관이 마음씨 좋게 재충전을 해주진 않으려나 싶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이곳에서 무한정 레벨업하는 것을 일종의 ‘꼼수’라고 판단한 걸까.
“크윽. 아직 이 꼬맹이에게 제트카이저를 3편까지밖에 못 보여줬는데.”
“맞아! 아저씨가 보여준 거 엄청 재밌었어.”
“……그런데 꼬맹아, 왜 용사 놈한텐 형아 형아 하면서 나는 아저씨냐.”
“……어, 그건 내 입으로 말하기 좀 그런데.”
“캉이야, 잠깐 누나 옆으로 가 있어.”
나는 제르비어스와 시시덕거리는 캉이를 뒤로 물린 뒤 냉장고 앞으로 다가갔다.
“왜? 나는 보면 안 돼?”
“응. 애들은 가라. 훠이훠이.”
세 번째로 열어본 냉동칸엔 발목 밑이 잘려나간 발이 있었다.
아무래도 이건 익숙해지기가 힘들겠다. 시체 수거반도 아니고 말이야. 이런 섬짓한 풍경을 캉이에게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캉이가 어리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나긴 시간 동안 대수림에서 자신과 함께 있어준 죄수들의 시체를 뒤져 수갑을 건져 온 녀석이 그때의 슬픔을 떠올릴지도 모르니까.
[르팔타커스 시온의 유해 일부를 되찾았습니다.]
[당신을 가호하고 있는 파천황의 권능이 한층 두터워집니다.]
[권능 ‘친구 좋다는 게 뭐냐’가 한 단계 진화합니다. 당신은 이제 친구의 스킬뿐 아니라 마력도 빌려올 수 있습니다. 상호 간의 동의만 이루어진다면 당신의 마력은 한순간에 친구가 빌려준 만큼 충전됩니다.]
이번에도 권능이 또 한 번 진화했다. 난전 중에 무척 유용한 권능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지금도 ‘천마흡성대법’이라는 MP 강탈 스킬이 있긴 하지만 마력을 뺏어오는 속도가 더딜뿐더러 시전자인 내가 꼼짝도 못 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이 권능이 있으면 MP 소비가 막대한 큰 기술도 거리낌 없이 쓸 수 있겠어.’
나는 다시 한 번 르팔타커스에게 감사를 표한 뒤 냉동칸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새 옷을 얻어 신이 난 캉이와,
곰인형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있는 아스티나와,
……제트카이저의 포스터에 기도를 올리고 있는 제르비어스에게 손짓했다.
“자, 가자. 다음 층으로.”
*
우리가 내려선 곳은 잘 깔려진 포장도로였다.
이전 층에서 밀림의 울퉁불퉁한 땅만 주야장천 밟고 다녔었기에 낯설게 느껴지는 건축의 흔적이었다.
8차선 도로가 부럽지 않을 정도의 너비를 가진 거대한 다리. 어두운 밤하늘 아래 속이 보이지 않는 검은 강물이 찰랑이고 있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아마도 저쪽이겠지.”
다리가 쭈욱 이어지는 방향에 휘황찬란한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어서 오라고 유혹하듯.
저 정도의 광량이라면 모닥불이나 화로의 수준을 한참 넘어섰다. 어쩌면 전기를 사용하는 문명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
“자, 가보자. 이번 층에서도 열쇠를 얻으려면 분명 만만치 않은 시련이 있을…….”
띠링!
그때였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메시지가 눈앞에 출력되었다.
[당신은 방금 4층의 층장이 되었습니다.]
[적법한 절차에 의해 층장의 열쇠가 양도됩니다.]
에엥?
이건 또 무슨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