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107화 (107/300)

#107. 만철도시 (1)

“캉이야!”

눈을 뜬 캉이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축축한 얼굴을 닦아내는 것이었다.

비가 그치고 있었다.

“누나, 이게 빗물이야? 그런데 빗물은 원래 이렇게 짜?”

“아니. 그, 그렇지 않아.”

아스티나는 지금까지도 계속 오열했었던 건지 훌쩍이고 있었다. 아마 캉이를 껴안은 채 계속 울고 있었나 보다.

제르비어스가 설명해주었다.

“캉이가 계속 숨을 쉬지 않고 있었거든. 혹시…… 용사 놈의 마지막 일격 때문에 다신 깨어나지 않는 줄 알았던 거야.”

아스티나가 눈을 부릅뜬 채 나를 노려보았다.

“그래! 그냥 천마회풍일섬 같은 거 썼으면 됐잖아. 꼭 그런 무지막지한 기술을 이 어린애한테……!”

뭐야. 겁나 억울하다.

“아니! 그거 안 썼으면 우리 다 작살났었다고! 내가 다 치밀한 계산 하에 설계하고 응? 완벽한 전략 수립을…….”

“왜에? 형아가 나한테 뭐 했어?”

캉이는 아마 구미호였던 순간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듯 보였다. 나는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어허. 누나 말 듣지 말어.”

그때, 캉이의 머리에서 하얀 귀가 솟아올랐다. 엉덩이에서도 아홉 개의 꼬리가 생겨났다.

처음에 캉이는 그걸 신기해하다가, 이내 차분하게 받아들였다.

“그렇구나. 나는 형아랑 위로 올라가기로 약속했어. 맞지?”

천천히, 느린 속도로 봉인되었던 기억이 다시 돌아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못다 한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해도 되니까. 과거를 무리하게 떠올릴 필요는 없어.”

캉이는 아스티나의 무릎에서 머리를 들어 올리더니 진흙탕에 지저분해진 꼬리를 하나하나 어루만졌다.

“얘네가…… 지금까지 내 친구들이었구나. 몰랐어.”

지금은 혼란스러울 것이다.

생명체의 의식은 주체와 객체를 분리시킨다. 그런데 지금 하나로 융합되기 시작한 캉이의 기억에는 객체로 살아왔던 아이들과 주체인 캉이의 시점이 혼재되어 있을 테니까.

아홉 개의 목숨을 갖고 태어나는 구미호이니만큼, 평범한 인간의 정신보다 더 튼튼하기를 믿는 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지금까지는 그런 듯 보인다.

“어어? 형아, 하늘에 저게 뭐야.”

우리 셋은 모두 캉이의 손가락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탁 트인 평원의 하늘 위로 일곱 빛깔의 호선이 아름다운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비가 온 뒤 맑게 갠 하늘에만 허락되는 자연의 축복.

“아아, 저건 무지개라고 하는 거다.”

“무지개. 예쁘다.”

“나도 저런 건 처음 봐.”

역시 감옥에서만 평생 살아온 아스티나 또한 캉이의 감탄에 동참했다.

감격스러운 순간에 어울리게도 기다리던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띠링!

[메인퀘스트 #2. ‘열쇠 수집’을 3/9 완료하였습니다.]

[보상을 고를 수 있게 됩니다. 스탯 하나의 x2 효과, 혹은 스탯 하나의 한계돌파]

지금까지는 근력과 민첩 수치를 2배로 곱하는 보상만을 선택해 왔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상대와 끈기를 두고 싸우는 초장기전이 많아질 수도 있어.’

오늘처럼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강한 상대와 장시간 혈투를 벌여야 한다면 지금의 마력량으로는 아쉬움이 남는다.

나는 고민 끝에 선택했다.

[MP 수치의 한계가 사라집니다.]

[그동안 제한되어 있던 성장 수치가 반영됩니다.]

[MP의 한계치가 4,200 오릅니다.]

호오, 이런 씀씀이라면 사양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마치 있는지조차 몰랐던 적금 통장을 서랍에서 발견한 기분이다.

나는 오랜만에 상태창을 열어 내 현재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슈바인 스트링거]

[칭호: 마그마 볼의 우승자, 무한쟁패의 종결자, 대수림의 남쪽 야수왕]

[HP: 9,999], [MP: 14,199], [근력: 610], [민첩: 640]

이전 층의 시련을 마쳤을 때보다 비교할 수 없이 강해졌다. 게다가 세 개의 층을 오르며 얻어낸 스킬들 또한 더할 나위 없이 든든했다.

전투 경험과 강적을 극복해낸 고양감처럼 수치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까지 포함한다면 이젠 정말 용사에 어울리는 수준까지 성장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녀석이 있었다.

“등반죄수 슈바인 스트링거. 네놈을 진작 씹어 먹었어야 했는데.”

평원에 드리워지는 그림자.

증식하는 밀림의 뱀이 얼굴을 내밀었다.

녀석을 처음 보는 나머지 셋은 거리감을 상실시키는 뱀의 머리가 등장하자 흠칫 놀랐다.

제르비어스가 아스티나와 캉이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고 있었다.

“뭔가 불평할 거리가 있어?”

“……분하게도 없다. 나의 패배를 인정한다.”

뱀의 갈라진 혀가 쉭쉭거렸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녀석과 처음 마주쳤을 때, 그리고 뇌신 지드와 신경전을 벌였을 때의 모습과 확연히 달라진 점이 있었다.

분명, 크기가 줄어들고 비늘의 색깔도 어딘가 희미해졌다.

‘약해지고 있구나.’

교도관의 화신체가 약해지는 원인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지금껏 호이란과의 거래를 통해 빌려 쓰고 있던 구미호의 힘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캉이가 봉인으로부터 자유로워졌기 때문에.

“이봐, 뱀대가리. 다음 층으로 올라가기 전에 너한테 선물이 있어.”

“선물?”

“응. 8층으로부터 내려온 선물이니까 피하지 말고 달게 받아라.”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선 후 위턱과 아래턱을 최대한도로 벌렸다.

될까? 될 것이다.

[친구 캉이의 스킬을 빌려옵니다.]

[여우트림 Lv. 1]

가슴에서 화끈한 기운이 용솟음친다. 세상을 다 부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고양감.

곧 내 입에서 쏘아진 붉은 광선포가 교도관의 아래턱에 적중했다.

꾸아아아앙!

“크허억!”

증식하는 밀림의 뱀. 녀석의 거대한 대가리가 여우트림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땅에 처박혔다.

우르르르릉.

지진에 가까운 진동이 평원 가까이 울렸다.

나는 저벅저벅 녀석에게 다가가 으르렁거렸다.

“꼴좋다, 교도관 새끼.”

“이노옴…… 그 르팔타커스와 똑같은 짓을 하는구나.”

“뇌신 지드가 해 준 얘기가 있어. 신격인 존재는 그 위엄을 잃어버리는 순간 큰 피해를 입는다고. 너는 르팔타커스에게 패하면서 신격의 일부를 잃었겠지.”

그래서 그 빈 곳을 채울 강력한 존재를 갈구해왔을 것이다.

캉이를 뱃속에 품은 호이란이 연옥의 문 앞에 섰을 때 옳다쿠나 했겠지. 덕분에 이토록 긴 시간 동안 구미호의 힘을 훔쳐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야 설명이 돼. 어째서 캉이가 구미호로 변신했을 때 네놈이 화신체를 유지할 수 없었는지가.”

“고작 그런 추측만으로 교도관을 공격한 것인가. 네놈의 강심장에 어이가 없군.”

교도관의 거체는 그 이빨 하나가 신전의 기둥에 필적할 만큼 압도적이었으나, 지금은 그것을 내게 들이대지 못하고 있었다.

층장의 열쇠를 획득한 자를 건드릴 수 없는 것이다.

“네놈을 계속 지켜보겠다. 파천황 르팔타커스가 9층을 넘지 못하고 타천했듯, 너 역시 높은 곳에서 추락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때 네놈이 지르는 비명을 즐겁게 감상해주마.”

“흥. 이 감옥엔 어디서 패잔병들의 대사를 가르쳐주는 학원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진부한 소리 읊지 말고 꺼져.”

뱀의 육중한 머리가 점차 희미해지더니 이윽고 스르륵 사라져 버렸다.

[다음 층으로 향하는 포탈이 생성됩니다.]

그런데,

녀석이 사라진 자리에 무언가가 떨어져 있었다.

“어라? 이건 또 뭐야.”

나는 경계를 풀지 않은 채 교도관이 사라진 자리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향해 다가섰다.

무지개가 걸린 하늘 아래 번쩍이는 것.

바로 여우트림에 의해 잘려나간 녀석의 비늘이었다.

띠링!

그것에 손을 뻗자,

흥미롭기 짝이 없는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이름: 탐식하는 신화종의 비늘]

[등급: S급]

[사용횟수: 3/3]

[차원감옥의 한 층을 관리하는 신격 존재로부터 떨어져나온 파편입니다. 이 비늘을 사용하면 B등급 이하의 아이템을 무한히 증식시킬 수 있습니다. 중지를 외치기 전까지 복제가 멈추지 않으니 주의하십시오. 증식한 아이템의 유지 시간은 24시간입니다.]

‘흐음. 이건 굉장히 유용하겠는걸.’

인벤토리를 열었다. 이제 고작 3개밖에 남지 않은 만능치료제가 그 안에 있었다.

엘릭서.

만약 이걸 무한히 복제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적도 두렵지 않다. 일격에 즉사만 당하지 않는다면 엘릭서를 벌컥벌컥 마시면서 상대가 뒈질 때까지 달라붙으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엘릭서의 등급을 판별해 본 나는 곧 시무룩해졌다.

A등급.

‘그럼 그렇지. 내가 너무 도둑놈 심보였어.’

신화종의 비늘은 B급 이하의 아이템만 복제할 수 있다고 했으니 A급 아이템인 엘릭서를 무한정 늘리는 건 불가능했다.

아쉽다.

빨간 물약이라도 하나 남겨놓을걸.

화룡도에서 제르비어스와 치고받을 때 체력 회복약을 다 써버린 것이 못내 아쉬웠다.

“뭐냐. 왜 갑자기 날 노려보는 거냐, 용사.”

“……그냥 열 받아서. 주먹 한 대만 맞아줄래? 관자놀이 쪽으로다가.”

“어지간하면 맞아줄 텐데, 너 이제 많이 세져서 그랬다간 내 얼굴이 아작 날 테니 안 된다.”

*

층간구역에 들어서자 익숙한 거실 풍경이 우릴 반겼다.

“우우와. 여기가 뭐 하는 데야?”

내가 어릴 적 살았던 이층집을 둘러보는 캉이의 눈빛엔 호기심이 가득했다. 내 기억에서 재료를 끄집어내 만들어진 공간이라는 설명을 이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형아, 나 이거 만져봐도 돼?”

“어, 응.”

캉이가 집어 든 것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BB탄 권총이었다. 내가 간단한 사용법을 알려주자 아이는 까무러칠듯 좋아했다.

덩달아 신이 난 나는 거실 끝에 있는 요구르트병을 가리키며 캉이에게 말했다.

“저거 한 번 맞춰볼래? 형아도 어릴 때 그러고 놀았거든.”

“여기를 누르면 발사되는 거야?”

“그래. 물론 처음부터 잘할 순 없겠지만…….”

팅! 팅! 팅!

캉이는 BB탄의 방아쇠를 당겨 총 세 개의 빈 요구르트병을 날려버렸다.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엄청 쉬운데?”

“……굉장하구나, 우리 캉이.”

캉이가 가진 스킬 중 하나인 새총 쏘기 Lv. Max의 영향인 걸까. 난생 처음 잡아본 무기임에도 불구하고 저격 실력이 완벽에 가까웠다.

평생을 숲에서만 자라온 캉이에게 있어 2000년대 대한민국의 가정집은 신기한 것투성이였다.

정수기 버튼을 누르면 물이 나오는 걸 알고 거실을 홍수로 만들 기세였고, 뱅글뱅글 돌아가는 선풍기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가 날개를 박살 내먹었다.

나는 캉이가 다쳤을까 전전긍긍했는데, 손가락은 멀쩡했다.

기억의 봉인이 해제되고 귀와 꼬리가 생겨나면서 본래 환수가 가진 단단한 육체를 되찾은 듯이 보였다.

이 층간구역에서 캉이에게 몇 가지 테스트를 해 볼 수 있겠다고 생각한 참이었으나,

“어이, 꼬맹이. 뿔난 아저씨가 가장 신기한 걸 보여줄 테니 따라올 테냐?”

“엇? 그런 게 있어요?”

“그래. 거신병이 우주의 괴물을 때려잡는 모험담으로 너를 초대해 주지.”

제르비어스는 BB탄 총을 손에 든 캉이를 데리고 내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하여간 오타쿠 마왕 자식. 철왕전기 제트카이저를 함께 시청할 대상을 드디어 찾았다는 거겠지.

캉이가 입고 있던 낡고 해진 옷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신발도 없어서 맨발로 계단을 뛰어 올라가던 모습.

나는 뭔가를 결심하고 소파에서 뒹굴고 있던 아스티나를 불렀다.

“아스티나, 그 곰인형 잠깐 내려놔 봐. 교도관장에게 할 말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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