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천만 개의 수갑 (5)
“캬아아아아아!”
구미호가 용력을 발휘할 때마다 이쪽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제르비어스는 뒷발을 노리다가 구미호에게 걷어차였고, 아스티나 역시 발톱에 왼쪽 어깨에 치명상을 입었다.
나는 아스티나를 구하려다가 구미호에게 허리를 깨물려 한참을 끌려 다녔다.
어지간해선 쓰지 않으려 마음먹은 파천황의 권능으로 순간이동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상체와 하체가 분리됐을 것이다.
쏴아아아아아!
시야가 흐릿해질 정도로 쏟아지는 폭우.
현무패웅검에서 발출되는 푸른 검기가 빗방울이 닿기 전에 그것을 증발시키면서 내 주변엔 자욱한 푸른 안개가 형성되었다.
오래지 않아 구미호가 제르비어스와 아스티나의 연계 공격에 완전히 적응해 버렸다.
기동력을 멈춰 세우는 것도, 유효한 대미지를 주는 것도 처음에 비해 극도로 어려워진 상황.
인벤토리에서 엘릭서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엘릭서의 효과로 HP와 MP가 완전 회복됩니다.]
나는 예정보다 이르게 둘을 철수시키기로 했다.
“제르비어스, 아스티나. 이제 물러나. 혼자 상대하겠어.”
“괜찮겠나. 아직 저 녀석은…… 쌩쌩해 보이는데.”
“그래. 우린 더 할 수 있어.”
둘은 멈칫거렸으나 나는 단호하게 둘을 물렸다.
구미호가 우리 셋의 협공에 익숙해진 이상 남은 것은 궤멸뿐이다.
애초에 내가 필요로 한 데이터는 힘 대 힘으로 밀어붙였을 때 구미호가 어느 정도의 타격을 입는지였다. 그것을 충분히 파악했으니 두 번째 페이즈로 넘어갈 차례다.
동료들이 멀리 물러서자 구미호는 나와 단독으로 대치했다.
“크르르르르르.”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탐식의 광기.
가까이서 마주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수준이다. 하지만 나는 결코 물러설 수 없었다.
캉이를 저 주박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주는 것이 진정한 구원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마어기행공]
상공 10미터 지점까지 날아올랐다. 구미호의 고개가 내 움직임을 쫓으며 따라붙었다.
폭우 속에서 나는 이렇게 읊조렸다.
“캉이야, 지금의 너는 날 기억 못하겠지.”
나는 엘릭서를 꺼낸 상태 그대로 여전히 인벤토리를 닫지 않았다. 필수적인 아이템을 제외하면 빈 칸 투성이였던 보관함은 현재 가득 차서 시야의 절반을 반투명하게 가릴 정도였다.
“하지만 형아가 가르쳐줬던 놀이는 잊지 않았기를 바라.”
내가 나뭇가지를 움직이면 그걸 새총으로 맞추면서 까르륵 웃었던 소년의 얼굴이 구미호의 그것과 겹쳐진다.
놀이공원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으니,
이제는 그 약속을 지킬 차례다.
자, 이 타이밍에서 한 가지 퀴즈.
100마리의 야수들이 장시간에 걸쳐 베어냈던 대수림의 거목들.
나라 하나를 불태울 수 있을 만큼 많았던 그 장작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인벤토리 해방.”
전부 아이템 수납으로 내가 챙겨두었었지.
내 머리 위의 하늘에 수천 그루의 잘려진 거목들이 소환되었다.
구미호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느닷없이 하늘을 가득 메운 통나무들의 출현에 놀란 것이다.
손가락을 앞으로 튕겼다.
그러자 통나무 한 그루가 베팅볼처럼 쏘아져나갔다.
‘자, 기억하고 있지?’
통나무는 구미호의 정면으로 쏘아지지 않았다. 그저 녀석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그럼에도 구미호의 입은 반사적으로 열렸다.
콰아아아아아!
여우트림. 쩍 벌린 입에서 나온 광선포가 통나무를 분쇄시켰다.
빠직!
재빠르게 날아가는 물체를 정확히 맞춘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숙련된 솜씨와 경험이 누적되어 장기 기억으로 변환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저 구미호 속에 있는 캉이는 분명 내가 가르쳐준 놀이를 무의식중에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자, 그러면 본격적으로 놀아볼까.”
나는 동시에 열 그루의 통나무를 구미호의 주변으로 퍼트렸다. 독립된 주체처럼 움직이는 목표물들에 녀석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
“호오?”
구미호의 아홉 꼬리가 급격하게 줄어들더니 주변에 사이즈가 조금 작은 분신이 출몰했다.
본체 옆을 수호하는 아홉 마리의 분신.
총 열 마리의 구미호가 여우트림을 내쏘았다. 열 기의 대공포가 상공의 비행선을 격침시키는 듯한 모습이었다.
분신은 이윽고 사라졌고, 구미호는 다시 엉덩이에서 늘어난 꼬리를 살랑였다.
더 해달라는 소리였다.
“좋아. 질릴 때까지 놀아주마.”
막대한 양의 마력이 소진되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고 나는 집중력을 발휘해서 통나무를 날려 보냈다.
콰앙! 콰아아아앙! 쾅!
구미호는 단 한 그루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며 모든 방향을 감당해냈다.
무참하게 동강나는 통나무들이 진흙탕에 처박힌다.
나는 속눈썹에 달라붙는 빗물을 닦아내며 떠올렸다.
아주 오래전, 그리웠던 나날의 어떤 편린을.
- 아빠! 왜 내가 벌을 서야 돼요?
- 네가 동생을 아프게 했으니까. 얼마나 세게 쥐어박았으면 상희 머리에 혹이 났겠어.
- 쟤가 먼저 내 머리카락 잡아당겼단 말예요!
- 상희는 이제 겨우 세 살이야. 왜 그랬겠니?
- 오빠가 미워서?
- 아니야. 아이들은 놀고 싶을 때 그렇게 관심을 끄는 거야. 오빠와 제대로 노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지.
- 날 아프게 하려고 한 게 아니라고요?
- 애들은 원래 그래. 네가 오빠인데, 동생이 같이 놀자고 덤벼드는 걸 갖고 울컥해서 쥐어박았으니…… 잘못했어, 안 했어? 응?
- 자, 잘못했어요.
- 그래. 그럼 이제 가서 동생 한 번 안아줘.
나는 그 날 두 가지 사실을 배웠다.
아이들은 본래 힘 조절을 못하게 마련이며,
동생을 때린 오빠는 꼭 사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 아이들은 욕망만 있을 뿐, 그것을 타인과 함께 해소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런 방법은 형이나 누나로부터 배우는 거지. 혹은 친구들로부터.
하지만 저 구미호는 줄곧 이 대수림에서 홀로 외로워했다.
해가 뜨면 변신하는 야수들은,
해가 져야 변신하는 자신과,
영원히 닿을 수 없는 평행선을 그리며 대립해 왔다.
간혹 자신처럼 해가 질 때 변신하는 종족이 캉이를 찾아와도 금방 작별해야만 했다.
그 긴 시간 동안 캉이의 소원은 아마도 단 하나뿐이었을 것이다.
‘죽지 않고 나와 놀아주기를.’
그리고 캉이를 3층에 내려 보낸 구미호 호이란 역시 같은 염원을 갖고 있었겠지.
투두둑.
마지막으로 날려 보낸 통나무를 캉이가 뛰어 올라 깨물어서 박살냈다.
경쾌하게 움직이던 꼬리가 현저하게 느려졌다.
기어코 내가 녀석을 지치게 만든 것이다.
[MP: 2,012/9,999]
물론 그 과정에서 나 역시 탈진에 가까운 마력을 소진했으나, 다행히 최후의 일격을 날릴 만큼은 되었다.
“덤벼라, 캉이야.”
이 형아가, 죽지 않고 너와 계속 놀아줄 테니까.
인벤토리에서 SS급 한손검 아론다이트를 꺼냈다.
지금의 내 근력수치로는 집어들 수 없는 용사전용무장.
나는 이 특성을 이용해 제르비어스를 마그마 볼에서 무력화시키기도 했었다.
찬란한 빛을 내뿜는 아론다이트가 자유낙하를 하다가,
허공에서 우뚝 멈춰 섰다.
‘손으로 집어들 순 없어도, 날아오르게 할 순 있지.’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용사가 다루도록 허용되지 않은 아론다이트. 이것을 허공섭물로 조종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대가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차근차근 여기까지 온 이상 절대 빗나가지 않는다.
[용사전용기 무극참월공]
[제사식 비천성검(飛天聖劍)]
쐐애애애액!
맹렬하게 쏘아진 아론다이트가 구미호의 가슴에 충돌하며 황금빛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아앙!
아, 맞다. 사과를 해야지.
미안해, 캉이야. 좀 많이 아플 거야.
*
제르비어스에게 예고했던 필살기.
용사전용기 비천성검의 위력은 엄청났다.
구미호의 육신과 충돌하여 성력을 폭발시켰고, 그 충격파로 여우의 거체를 한참 멀리 날려 보낸 것이다.
“씨이익. 씨익.”
비틀비틀대다가 쓰러진 구미호가 결국 턱을 땅에 댄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는 아론다이트를 인벤토리에 수납한 뒤 천천히 걸어갔다.
[고강한 대상이 완전히 탈진했습니다.]
[정신지배 Lv. 4를 걸 수 있는 상태입니다.]
수박보다 더 큰 구미호의 눈동자가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녀석을 자극하지 않도록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손바닥을 올려 콧잔등을 어루만졌다. 눈부신 하얀 털이 빗물에 젖어 회색으로 덧칠한 듯 느껴졌다.
“다 끝났어, 캉이야. 이제 쉬어도 돼.”
나는 눈을 감고 스킬을 시전했다.
[친구 제르비어스 폰타인의 스킬을 빌려옵니다.]
[정신지배 Lv. 4]
[봉인된 의식의 내면에 접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처음에는 무수한 언덕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줄 알았다. 칠흑 같은 표면을 가진 수 백 개의 언덕.
“캉이야?”
나는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자 내가 옮겨진 곳이 결코 평범한 언덕이 아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절그럭.
발에 채이는 것은 수갑과 족쇄. 이제는 그 주인을 알 방법이 없는 구슬픈 잔해가 온 천지를 뒤덮고 있었다.
그 수갑들에 파묻힌 소년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형아? 왜 여길 온 거야?”
“……왜긴 인마. 널 데리러 온 거지.”
나는 수갑으로 만들어진 언덕을 힘겹게 내려갔다. 무릎까지 차오르는 쇳덩이들이 계속 내 전진을 방해했다.
천만 개에 달하는 수갑. 잠깐 엿보는 것만으로도 아득해지는 숫자다.
‘그동안 이렇게나 많은 죄수를 잃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이것은 캉이의 심상 세계. 끝내 함께하지 못하고 잃어야만 했던 어른들에 대한 죄책감이 이렇게 표현된 것일 터다.
“난 여기서 못 나가, 형아.”
캉이의 눈앞에 서자 소년은 메마르게 웃었다.
“어째서?”
“내가 여기서 나가면 누가 이걸 기억해주겠어? 안 그래?”
“이곳이 사실은 진짜가 아니라 너의 마음 속 풍경이라고 해도?”
“응. 이제는 어떻게 나가는지도 모르겠고.”
강제로 캉이를 이곳에서 데려나가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정신지배 스킬은 아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러는 대신에 손을 내밀었다.
“바깥으로 나가자, 캉이야. 그러면 내가 이 감옥을 완전히 탈출해서…… 이분들의 진짜 묘지를 함께 만들어줄게.”
“진짜 묘지?”
“응. 그리고 다시는 누구와도, 작별하지 않도록 할 거야.”
너만 허락해 준다면 말이지.
캉이는 한참을 고민했다. 양손 가득 안고 있던 수갑 뭉치를 내려다보며.
“……내가 그래도 될까?”
“물론.”
“나는 너무 오래 혼자서 살아남았어. 나를 거쳐 간 아저씨, 아줌마, 형, 누나…… 누구도 돌아오지 않았어. 영원히 이곳을 지키는 게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
“캉이야. 옛날옛적에 부러진 다리로 움직이지 못하던 한 소년이 있었어. 아마 스스로의 힘으로는 다시 일어서지도,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했을 거야.”
하지만 그 소년에겐 뒤를 밀어주는 손길이 있었다.
그러니 이번엔 내가 이 소년의 등을 밀어주고 싶다.
“같이 나아가자. 무엇도 버리지 않아도 돼. 너는 이만큼이나 넓은 마음을 갖고 있는 아이니까.”
캉이의 여린 손이 내 손위로 올려졌다.
그러자 캉이의 손등에 있던 붉은빛 열쇠가 내 손등으로 옮겨졌다.
우리를 둘러싼 수갑들이 사르락 먼지가 되어 날아올랐다.
그 풍경들에서 나는 수천 개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드디어 우리가 기다리던 순간이 왔군요.’
‘고맙습니다, 죄수여.’
‘부디, 이 아이를 잘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