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천만 개의 수갑 (4)
‘용사, 이 자식아!’
제르비어스가 양손을 X자로 교차하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약 올리다가 정말 교도관의 화신체가 깽판을 놓으면 어떡하냐는 듯이.
괜찮다.
교도관은 지극히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직접 죄수에게 개입할 수 없다.
녀석이 본래의 힘을 휘두를 수 있는 경우는 아마도 시련의 룰을 어겼을 때 정도. 그래서 대수림의 상공으로 날아올랐을 때 내 비행을 제지시킨 것이다.
“지금 나를 지켜보는 교도관이 한둘이 아닐걸. 멍청이가 아닌 다음에야 내가 이제부터 층장의 열쇠를 쟁취하려 하는 걸 알 테니까. 그러니 뱀대가리, 네가 그토록 멀리서 나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도 설명이 되지.”
증식하는 밀림의 뱀은 짜증을 숨기지 않았다.
“나 또한 다른 죄수였다면 병 속의 티끌처럼 널 대했을 것이다. 하나 어쩔 수 없이 나는 네놈을 지독하게 증오할 수밖에 없다.”
엥? 어째서지.
내가 의문을 나타내자 대답은 단탈리온이 해주었다.
- 3층의 교도관은 죄수들의 고통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취미를 갖고 있다가 오래 전 규격 외의 죄수에게 힘으로 패퇴당한 적이 있습니다. 푸르가토리움의 역사 최초로 죄수에게 제압당한 교도관이 되었지요.
어찌된 영문인지 알겠다.
“너, 수왕 르팔타커스 시온한테 개겼다가…… 깨갱했구나?”
“너는 그자의 유지를 잇고 있는 죄수. 절대 다음 층으로 올려 보내주지 않겠다.”
“흥. 지켜보라고. 정확히 ‘네가 정한 룰을 지키면서’ 시련을 박살내 버릴 테니까.”
*
[세 야수왕의 정신지배 유효시간이 58분 남았습니다.]
사역수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시간은 그 대상의 강력함에 비례했다.
나는 시간을 알뜰하게 사용해야 했기에 지체 없이 녀석들을 본격적으로 장기말처럼 휘둘렀다.
첫 번째는 고드름을 등에 달고 있는 북극곰.
녀석의 거대한 앞발이 쿵 하고 지면을 내리찍었다.
“누겔타, 덥지?”
두꺼운 살가죽과 뙤약볕을 그대로 흡수하는 백색의 털을 가진 누겔타로서는 지금의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햇빛을 가려줄 나무들의 수관부마저 전부 잘려나간 상황이니까.
“네 힘을 마음껏 해방해 봐라.”
“구워어어어어어!”
누겔타는 앞발로 가슴을 두드리며 포효하고는 서늘한 냉기를 주변에 퍼트리기 시작했다.
건조하기 짝이 없던 땅에 하얀 서리가 끼고, 드문드문 자란 잡초에 고드름이 덧씌워졌다.
백색의 원이 빠른 속도로 확장되었다.
나와 아스티나는 극도로 얇은 포스 필드를 몸 위에 둘러 살을 파고드는 냉기를 차단할 수 있었지만, 제르비어스는 그렇지 못했다.
“으으으, 춥다. 용사야, 나는 추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마왕은 이빨을 딱딱거리며 양팔을 쉴 새 없이 쓸어내리고 있었다. 용암이 넘실대는 화룡도의 층장 출신다운 모습이었다.
“아주 잠깐만 참으면 돼.”
일시에 모든 힘을 소진한 누겔타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평원의 3분의 2에 달하는 초거대 빙판이 완성되었다. 아이스링크 300개 정도가 들어갈 수 있을 만한 사이즈.
“훔바라스, 보이는 모든 얼음을 녹여라.”
바톤터치하듯 누겔타와 훔바라스의 위치가 바뀌었다.
지금이야 정신지배의 영향에 있어서 서로에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본래 두 야수왕을 붙여놓으면 앙숙이 되지 않으려나.
잠시 딴생각을 피우던 나는 훔바라스의 포효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크워어어어어어!”
야수왕의 가슴에 있는 입이 쩍하고 벌어졌다. 제자리에서 회전하는 훔바라스가 순식간에 고열지옥을 연출해냈다.
화르르르륵!
이 불길에는 명백한 마법적 원리가 담겨있는 모양인지 본래 자연에선 일어나기 힘든 광경이 연출되었다.
빙판 위로 수십 갈래의 불길이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장작을 필요로 하지 않고 스스로 확산하는 탐욕스러운 불길이었다.
소용돌이 모양으로 뻗어나가는 불길이 빙판을 사르르르 녹여 버린다.
자연히,
거대한 수증기가 일대의 시야를 자욱하게 만들었다.
거목들을 모조리 잘라내 버린 덕분에 그 수분을 흡수할 나무는 주변에 한 그루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스티나, 부탁해.”
7서클의 중력 마법을 달성한 마검사가 마법진을 펼쳤다.
[마도제국학파 중력마법]
[그래비티 프레셔(Gravity Pressure)]
아스티나가 평원 일대에 섬세한 중력장을 펼쳐냈다.
훔바라스의 불길로 온도가 높아진 대기에 아스티나가 압력을 가해 기압을 높이는 것이다.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단열압축.
대기의 공기 덩어리 부피가 줄고 온도 상승의 속도가 높아진다.
그렇게 가득히 높아진 온도가 일정 수준에 다다르자 아스티나의 마법진이 반대방향으로 회전했다. 이번엔 중력장을 거꾸로 잡아당겨 기압을 극도로 낮춘다.
단열팽창.
주변의 수증기가 한층 자욱해졌다.
그리고 달아오른 지면의 뜨거운 열기에 위로 올라가려는 힘이 더해져 일대는 안개가 낀 듯이 자욱해졌다.
‘아직 부족해.’
마지막 단계.
수증기가 물이 되려면 상승기류를 가속시켜야 한다.
“질풍을 일으켜라, 파주주!”
네 장의 날개로 온몸을 감싼 야수왕이 날개를 해방시키자 아홉 개의 소용돌이가 동시에 평원을 집어삼켰다.
정신지배 상태에 놓이면 마력 회로의 리미트가 해제되기라도 하는지 나와 맞붙었을 때보다 훨씬 강력한 장악력이었다.
파주주의 활약은 실로 대단했다.
종횡무진 평원의 공기를 찢으며 비행하는 네 쌍의 날개.
그것이 거인의 부채처럼 신풍을 일으켜 수증기를 하늘로 밀어 올렸다.
화아악 올라가던 공기 덩어리가 결국 대수림 상공의 이슬점에 도달했다.
1,500미터 지점의 응결고도에서 벌어지는 기적.
먹구름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수천 배로 빨리 감은 것처럼 대수림의 천장에 어둠이 드리워졌다.
쿠르르르릉.
두터운 적운형 구름이 완벽하게 만들어졌다.
“용사야, 대체 이런 걸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냐.”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진 제르비어스가 감탄했다.
학교에서 배웠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래서야 양심에 좀 찔린다.
나는 그저 비를 내릴 수 있을 정도의 먹구름을 만들어내면 그 구름의 적운층이 햇빛을 차단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발상을 떠올렸을 뿐이다.
단열압축이니 단열팽창이니 하는 원리는 단탈리온이 풀어서 설명해준 거다.
혹시나 공기가 상승하는 이치를 교도관이 통제해서 방해하면 어쩌지 걱정했으나 다행히 그렇지 않을 거라 했다.
- 교도관의 권능은 층 전체의 야수들을 트랜스시키는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본인이 화신체를 계속 유지시키고 있기 때문에 실시간으로 용사님께 반칙에 가까운 제약을 가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3층 대수림의 교도관이 내건 시련은 두 가지.
일식의 짧은 유지시간과 긴 반복주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나는 ‘일식’을 거부하기로 했다.
달이 태양을 가려주기를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이 대수림에 오직 전략과 마법, 무엇보다 과학의 원리로 ‘암막커튼’을 쳐버린 것이다.
“뭐야! 당신들은?”
“날 어디로 납치해온 거지?”
세 명의 죄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패닉에 빠져 있었다. 트랜스를 강제로 유발하는 햇빛이 차단되자 세 야수왕이 인간 형태로 되돌아온 것이다.
자연히 정신지배 스킬의 효과도 사라져 버렸을 터.
저들은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선의를 담아 보답했다.
“지금부터 내가 가리킨 쪽으로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쳐. 그렇지 않으면…….”
툭. 투둑.
굵은 빗방울이 떨어져 현무패웅검의 검신을 적시기 시작했다.
남쪽 여우굴에서 붉은 광휘가 터져 나오며 또 한 번의 재앙을 예고했다.
“폭주하는 구미호에게 밟혀서 뒈질 테니까.”
*
사람들이 흔히 하는 오해가 있다.
봉래산의 구미호는 보름달이 떠오르는 날 모습을 드러낸다고.
하지만 그 믿음은 틀렸다. 이 신묘한 영물의 백색 체모가 달빛을 받으면 요사스럽게 빛나기 때문에 유독 보름달이 떠오르는 날 자주 목격되었을 뿐이다.
구미호는 다만 햇빛을 기피하는 습성을 갖고 있다. 일족의 주술이 어둠 속에서 진면목을 발휘하기 때문에.
자신의 기원이 봉래산이라는 환상 속의 터전인 줄도 모르고 있는 한 어린 여우가,
지금 푸르가토리움 3층에서 본 모습을 해방시켰다.
“캬아아아아아!”
아홉 개의 꼬리가 비산하는 돌무더기를 쳐내었다.
구미호가 그 거체를 일으킨 곳은 그의 육신을 담아내기엔 터무니없이 작은 굴에 불과했다.
한없는 답답함과 갈증이 이 어린 환수를 자극했다.
기다란 콧잔등에 떨어지는 빗방울의 감촉.
순간 구미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세상에 태어난 이래 처음 맞이하는 기상현상이었기 때문이다.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 정도의 폭우.
구미호는 간질거리는 설렘과 함께 날아올랐다.
*
“온다! 흩어져!”
대수림의 남쪽에서 껑충껑충 뛰어오는 구미호가 포착되었다.
아스티나와 제르비어스는 내 좌우 방향으로 잽싸게 몸을 날렸다.
아직은 충분히 거리가 있다.
나는 인벤토리를 열어서 준비물이 제대로 나열돼 있는지 확인한 후,
심호흡을 했다.
“단탈리온, 내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나 되지?”
- 현재 적운형 구름의 소멸 예상 강수시간은 3시간 28분 뒤입니다. 안전하게 용사님의 작전을 달성하려면 3시간 이내에 구미호를 쓰러트리는 게 좋을 거예요.
고작 8분이던 제한시간이었다.
그것이 지금은 3시간으로 늘어났다.
“충분해. 그 안에 캉이에게 정신지배를 때려 넣을 거다.”
콰지이이이익!
무대에 쳐진 장막을 찢어버리듯, 구미호가 평원과 대수림의 경계에 모여 있는 거목들을 쓰러트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이 지면을 박찰 때마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진흙이 드높게 비산했다.
“자, 2차전을 시작해 보자고.”
청룡패웅검의 검기가 5미터에 가깝게 늘어났다.
인간형 적수를 상대할 때는 결코 효율적이지 않은 극단적인 길이.
하지만 체고가 20미터가 넘는 야수를 상대하려면 상식 바깥의 전법을 쓸 필요가 있다.
“캬아아아아아!”
내 존재를 발견한 구미호가 과감히 돌진해오고 있다. 녀석의 앞발과 뒷발이 땅을 내딛는 타이밍을 계산해서 나는 살신참을 날렸다.
평소보다 훨씬 폭이 넓은 참격이 반월형을 그리며 날아갔다.
구미호는 장애물을 사뿐히 뛰어넘는 경주마처럼 뛰어올랐다. 그리고 진짜 경주마처럼 양 옆에서 덤벼들어오는 두 존재를 깨닫지 못했다.
보라색 마기가 주욱 늘어나 채찍처럼 구미호의 목을 휘감았다. 상승하던 구미호의 몸이 허공에서 잡아채졌다. 근육을 잔뜩 팽창시킨 제르비어스가 지면에서 버티고 있는 것이다.
반대쪽에서 날아온 아스티나가 마법진을 가동시켰다. 그래비티 블래스트. 세 개의 중력탄이 구미호의 옆구리에 작렬했다.
퍼어엉! 펑! 퍼엉!
충격을 받고 허공에서 몸을 뒤집은 구미호는 이내 동물적인 감각으로 꼬리 세 개를 땅에 박아 넣어 버텼다.
그리고 나머지 꼬리 중 두 개를 휘둘러 제르비어스와 아스티나를 노렸다.
마왕은 마기로 방어막을 둘러 막아내려 했으나 튕겨져 나갔고, 아스티나는 워핑으로 꼬리를 피해냈다.
“힘으로 상대하지 마! 못 막아!”
나는 이렇게 외치면서 정면으로 돌진했다.
큼지막한 공격을 날려 구미호의 시선을 교란시키는 것은 내 몫이었다.
제르비어스는 빈틈이 생길 때마다 구미호의 날랜 동작을 봉쇄시키는 것에 목숨을 걸었고, 아스티나의 쾌검이 구미호에게 타격을 입혔다.
“이야아아압!”
싸움을 통한 구원에서 물러섬이란 있을 수 없다.
이건 캉이의 운명을 건 혈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