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104화 (104/300)

#104. 천만 개의 수갑 (3)

동쪽의 야수왕 훔바라스는 거칠게 트림을 토해냈다.

짧은 시간 막대한 불길을 토해내는 바람에 생겨난 반작용.

그가 습격자와 격돌하는 과정에서 불타버린 초목들이 사방에서 아우성을 쳤다.

“그르르릉.”

훔바라스는 언제나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서 있었다. 그가 있던 세계에서도 셀 수 없이 많은 육식동물들이 활개를 쳤으나 훔바라스 앞에 서면 잿더미가 될 뿐이었다.

훔바라스는 화염을 숨결처럼 내뱉는 짐승이었고, 생물계에서 불타지 않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단단한 근육을 가진 녀석도, 날카로운 부리를 가진 녀석도 작열하는 고온 앞에서 끝까지 살아남을 순 없었다.

그런데,

저 뿔 달린 녀석의 몸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단 말인가.

“미안하지만 마족의 신체는 초열지옥의 불길로 빚어진단다.”

제르비어스는 그 어떤 생물도 멀쩡할 수 없는 불길 속에서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마왕이 가진 여러 특권 중 하나인 화염면역.

때문에 훔바라스의 불길은 그에게 아무런 생채기도 내지 못했다.

“넌 알 리가 없겠지? 마왕성의 목욕탕에는 물이 아니라 석탄이 매일 공급돼야 한다는 걸.”

마족들이 쉴 새 없이 달궈지는 불길로 피부에 달라붙은 묵은 때를 벗겨내기 때문이다.

[마왕군 폭렬마법]

[업화의 쌍장]

샤워를 갓 마친 인간의 보송보송한 얼굴처럼 매끈해진 피부의 제르비어스가 양손에 보라색 불길을 피워 올렸다.

그러자 훔바라스가 만들어낸 화염의 기운이 한 발짝 물러서는 것처럼 보였다.

“딱 대. 최대한 빨리 끝내주마.”

망토를 벗어던진 제르비어스가 거침없이 훔바라스에게 돌격해 들어갔다.

마왕의 공격이 쉴 새 없이 야수왕을 몰아쳤다.

그러나 일격을 서로 교환할 때마다 더 크게 다치는 것은 제르비어스였다.

무지막지한 박치기가 마왕을 뒤로 날아가게 만들었다.

체급이 달랐다.

훔바라스의 신장은 3미터에 체중은 2.2톤. 업화의 쌍장을 두른 주먹으로도 궤멸적인 타격을 입히기가 어려웠다.

반면 화염 공격이 거세된 훔바라스의 일격은 한 방 한 방이 매서웠다.

맷집이라면 마왕성을 통틀어 최강이라 자부하던 몸이었지만 정면대결로는 재미를 보기 어려웠다.

“퉷.”

마족의 검은 피가 대수림의 지면을 달궜다.

제르비어스는 내면에서 넘실대는 초조함을 외면해보지 않기로 했다.

1층 화룡도의 마그마 볼.

연약한 몸으로 자신을 굴복시킨 용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것은 기실 제대로 된 승부라 할 수 없었다. 철구를 분화구에 집어넣는 일종의 운동 경기에서 자신이 수문장의 역할을 하지 못했을 뿐.

‘하지만 그 후로 용사는 계속 강해졌지.’

어느덧 제르비어스가 가진 힘과 기술 못지않게 발전해나가는 용사를 보며 그는 다급해지고 있었다.

머지않아 추월당하게 된다.

어쩌면 이미 추월당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쓸모없어지는 걸까.

용사에게 짐 덩어리가 되는 마왕으로 전락하게 되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하나.

“그럴 수야 없지. 마용파의 두목으로서 체면이 서질 않아.”

엉뚱하게도 이 순간 제르비어스는 층간 구역에서 몰두해 있던 가상의 이야기를 복기하고 있었다.

평범한 소년이 거신병에 탑승하게 되면서 성장하는 그 이야기는 그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철왕전기 제트카이저.

로봇공학의 산물이지만 자신보다 훨씬 출력이 높은 적군들의 앞에서도 절대 물러서지 않았던 제트카이저.

마왕은 이름도 비슷하고, 글자 수도 같은 제트카이저를 본인의 롤 모델로 삼기로 했다.

그 순간, 평생에 걸쳐 습득해온 폭렬마법에 새로운 길이 열렸다.

“자고로 열혈의 사나이는 벽 앞에 주저앉지 않는다.”

혼을 실은 드릴로 그 벽을 뚫어버릴 뿐.

[마왕군 폭렬마법]

제르비어스의 오른손에 맺힌 업화의 불길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하나의 손잡이에 두 개의 검신이 달라붙은 형태.

마왕은 두 갈래의 마기를 맹렬히 회전시켰다.

[특수오의 인피니티 드릴(Infinity Drill)]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회전을 거듭하던 불길이 드릴 형태로 변화하며 거센 파괴력을 내뿜었다.

폭렬마법의 역사에서 수백 년 만에 새로운 기술이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덤벼라, 훔바라스!”

제르비어스가 야수왕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리고 거침없이 무한의 영역을 넘보는 드릴을 상대의 가슴에 꽂아 넣었다.

“내 주먹은 백만 마력으로 불타오른다앗!”

두 맹수의 교착지점에서 보라색 폭발이 피어올랐다.

*

대수림의 북쪽.

야수왕 누겔타의 둥지는 새하얀 설원이었다.

그곳에서 종횡무진 날뛰는 아스티나.

그녀의 은발 머리카락이 만들어내는 궤적은 마치 겨울의 요정이 현신한 것 같았다.

쐐애애액!

누겔타의 등에서 튀어나오는 얼음송곳 다섯 개가 그런 아스티나의 숨통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청룡패웅검이 허공에 잔상을 남기며 그 송곳들을 유려하게 받아냈다.

입김을 내뿜던 누겔타가 육중한 앞발을 들어 지면에 내리쳤다.

콰르르르르!

그러자 매서운 얼음파도가 아스티나를 붙잡기 위해 쇄도했다.

마검사는 그 파도에 저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면으로 뛰어들어 중력 마법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워핑’으로 건너뛰어 버렸다.

미끄러운 빙판 위에 착지하면서도 아스티나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여기서 내가 다치면 의미가 없어.’

그녀의 두 동료와 달리 아스티나에겐 야수를 굴복시키는 정신지배 스킬이 없었다.

상대의 체력을 깎아놓은 뒤 자신 편으로 만들 수 있는 기술에 기댈 수 없다. 자연히 셋 중에서 가장 까다로운 과제를 받아든 것이 아스티나였다.

야수왕을 죽이지 않고, 전투불능 상태로 만들어놔야 하는 것이다.

싸움에 나서기 전에 슈바인은 이렇게 말했다.

‘아스티나, 너는 네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해. 천마 류운학의 타고난 육체, 게다가 마녀 일레인 쿠디슈의 뛰어난 두뇌를 동시에 물려받은 백년기재라고.’

위대한 경지를 달성한 두 남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그녀 또한 그렇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만 세상에 출사표를 던진 순간 설공이라는, 지나치게 뛰어난 강자를 만나 패퇴를 반복하는 바람에 심리적으로 움츠러 들어있어. 그걸 극복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가 추천하고 싶은 방법은 이거야.’

가장 위험하지만 제일 확실한 방법.

‘목숨을 스스로 사지에 던져 강력한 적을 극복해내는 것.’

콰아아아앙!

절대영도를 뿜어내는 누겔타의 원거리 공격은 압도적이었다. 아스티나의 유모이기도 했던 빙결 마법사 록시탄의 그것보다 두 배가 넘는 출력을 제한 없이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조력을 기대할 수 없는 실전이라면 네 재능을 둘러싼 껍질을 강제로 깨부술 수 있다고 생각해.’

주변의 기온이 더욱 낮아졌다.

쿠드드득!

누겔타가 아스티나를 에워싸는 형태로 만들어낸 까마득한 빙벽.

그 투명한 얼음이 그녀의 오랜 트라우마를 반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부술 수 있어.’

아스티나는 그렇게 다짐하며 청룡패웅검의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그 녀석은 언제나 승리와 성공을 이야기했다. 실패했을 때의 가능성을 계산하면서도 언제나 부정적인 예감이 자신을 지배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무공도 마법도 아스티나가 한 수 위였지만,

그 대책 없는 자기확신만큼은 도무지 따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게는 나만의 방법이 필요한지도 몰라.’

아스티나는 삼월초원을 떠나오던 순간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자신을 배웅하는 어머니 일레인의 품 안에는 또 다른 그녀가 자라나고 있었다. 그 아이는 무수한 시간선에서 절망을 거듭해야 했던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성장하게 될 거다.

‘그런데도 그들을 내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시간의 표류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그녀는 이제 새로운 가족을 찾아나서야 하는 게 아닐까.

캉이와 아이들을 돌봐주면서 아스티나는 치유되었다.

그녀의 두 부모가 기적처럼 블랙홀을 만들어냈던 그 순간은 지킬 대상이 생겼을 때였다.

그러니 둘의 피를 이은 아스티나도 할 수 있다.

‘내 손으로…… 캉이를 지켜낼 거야.’

어렵게 만난 가족의 둥지 앞에서 그녀는 결코 물러설 수가 없다.

웅웅웅웅웅웅!

아스티나의 애병, 청룡패웅검이 목 놓아 울었다.

[마도제국학파 중력마법]

[영창진화(詠唱進化)]

[아스트로노미컬 블레이드(Astronomical Blade)]

그것은 참월의 마녀가 딸에게 가르쳐 준 적 없는 술식.

백묘탑의 마법서고에 꽂힌 수천 권의 마법서적에도 적혀있지 않은 마법의 극의였다.

천체파괴검.

빅뱅의 파괴력이 담긴 아스티나의 일검이 빙원 위에 또 다른 수평선을 만들어냈다.

서걱.

수천 개의 얼음이 잘려나갔고,

누겔타의 가슴팍에 붉은 실선이 만들어졌다.

“휴우.”

빙판 위를 걸어가 쓰러진 누겔타를 내려 보던 아스티나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다행히 북쪽 야수왕의 가슴은 미세하게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잘했어. 죽이지 않고 제압했구나.”

네 장의 날개를 펄럭이는 표범. 그 등 위에 슈바인 스트링거가 올라탄 채 싱긋 미소 짓고 있었다.

박살난 얼음의 잔해가 눈보라가 되어 흩날리는 가운데, 아스티나가 엄지를 치켜 올렸다.

*

흔히들 아마존을 가리켜 지구의 허파라고 했다.

행성의 산소 5분의 1을 만들어내는 곳이라고 교과서에 적혀 있었던가. 물론 세계 전체가 숲으로 이루어진 이 대수림에는 걸맞지 않은 비유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이 허파에는 지금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다.

반경 5킬로미터 일대를 내가 깔끔하게 휩쓸어버렸기 때문이다. 대수림의 정수리에 큼지막한 땜통을 만들었다고 해도 좋겠군.

그 인공 평원의 한복판에 두 명의 영장류와 한 명의 마족, 그리고 세 마리의 야수왕이 집결해 있었다.

누겔타의 옆에 선 아스티나.

훔바라스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는 제르비어스.

그리고 파주주를 무릎 꿇린 나.

세 야수왕은 정신지배 스킬의 효과 때문에 순종적인 경비견처럼 부복하고 있었다.

내가 입을 열었다.

“다들 고생해줬어. 하지만 본게임은 지금부터야. 여기서부터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나도 장담할 수 없어.”

그러니 각자의 임기응변도 중요해질 것이다.

아스티나와 제르비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 야수왕과의 격전에서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는지 이전보다 더 단단한 자신감이 얼굴에서 엿보였다.

그때, 저 멀리 대수림의 한가운데에서 빨간 실선이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얼핏 보면 지렁이가 땅 밑에서 솟아난 것 같지만 까마득한 거리를 계산해보면 저 녀석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체고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등반죄수, 슈바인 스트링거. 희한한 짓거리를 일삼고 있구나.”

교도관 증식하는 밀림의 뱀이 내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이렇게나 먼 거리에서도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나는 보란 듯이 귀를 긁적였다.

“어디서 다리도 없는 녀석이 앵앵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희한하네.”

“……빈번하게 교도관을 도발한다는 소문은 틀리지 않았군. 계속 오만하게 굴다간 방금 네놈이 들이마신 들숨이 마지막 한 숨이 될 것이다.”

“그렇게 멀리서 윽박질러봤자 설득력이 없어, 뱀대가리. 정 내가 눈꼴 시러우면 이리 와서 집어삼켜보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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