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103화 (103/300)

#103. 천만 개의 수갑 (2)

왕이라.

그 표현에서 절로 짐작 가는 바가 있다.

파천황 르팔타커스가 이 푸르가토리움을 파죽지세로 등반하면서 얻어낸 유일무이의 칭호.

천공돌파의 수왕(囚王).

‘나더러 죄수들의 왕이 되어달라는 건가, 교도관장.’

그러기 위해서 이렇게 퀘스트를 주고 레벨업을 시키고 있는 걸까.

교도관장이 나를 특별취급한다는 것은 이제 의심의 여지가 없이 분명하다. 그건 내가 대기실에서 르팔타커스의 유해와 접촉해 그의 유지를 물려받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 내가 모르는 이유가 숨겨져 있는 것일까.

어쨌든 이용해주겠다.

왕이 되어야 탈옥할 수 있는 거라면 왕관의 무게를 버텨주겠어.

“나를 따르라!”

100마리의 강력한 야수들을 뒤에 거느린 채 우리는 대수림을 계속 전진했다.

*

5개의 피라미드가 모여 있는 대수림의 중앙부.

동서남북 각각 4개의 피라미드에 총 100마리의 야수들이 위풍당당하게 올라서 있었다. 그 종과 형태는 각각 달랐으나 기다란 태양빛에 번쩍이는 광경은 가슴을 웅장하게 만들어주었다.

중앙 대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나는 그걸 흐뭇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스티나가 갑옷을 해제시키며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이 야수들을 길들여서 캉이와 싸우게 만들 생각이니?”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캉이와 이 야수들은 동시에 변신할 수 없어. 구미호가 은둔에서 해방될 때 야수들은 평범한 인간형 죄수로 돌아오니까.”

포식자와 피식자의 구도가 서로 만날 수 없는 평행선.

구미호로 태어나 인간으로 둔갑하는 캉이와,

인간으로 태어나 야수로 변신하는 죄수들의 근본적인 차이점 때문이다.

“그도 그렇네. 그렇다면 왜 유독 발톱이 긴 야수들을 끌어 모은 거야?”

“전투를 위한 게 아니야. 내가 이 녀석들에게 시킬 것은 전장을 준비시키는 노동에 가깝지. 그것도 단순하기 짝이 없는 청소.”

손가락을 들어 남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100마리의 야수들이 모두 일제히 고개를 쳐들어 내가 가리킨 방향을 주목했다.

저 빽빽한 나무들의 군집.

이젠 지긋지긋하다.

“충직한 사역수들아. 마지막 명령을 내리겠다.”

캉이가 있는 여우굴까지 이어져 있는 울창한 밀림.

나는 그 일대를 깨끗하게 만들어 쳐낼 생각이었다.

“너희들의 발톱으로 저 나무들을 전부 베어내라.”

우두머리의 명을 받은 야수들이 일제히 피라미드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러 수만 그루의 나무들을 할퀴어대기 시작했다.

“캬오오오오오!”

“크르아아아아!”

그것은 압도적인 규모와 파괴적인 속도로 벌어지는 벌목의 현장이었다.

한 그루마다 대여섯 마리의 야수들이 달라붙어 발톱을 휘둘렀다. 밑둥이 무참히 깎여 나간 거목들이 기우뚱 쓰러졌다.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생물의 근육과 발톱만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의 충격적인 광경.

콰아아아아앙!

거목들이 패잔병처럼 쌓여나간다.

산림재해의 단위가 분단위로 넓어지고 있었다.

지구의 환경보호단체가 보았더라면 나를 손가락질하며 블랙리스트에 올렸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여긴 지구가 아니며,

생태계를 통째로 박살낸다 해도 난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을 작정이었다.

대수림의 남쪽 일대가 강제로 밀림에서 평야로 개간되고 있을 때.

캉이에게서 지루해하는 텔레파시가 날아왔다.

- 캉이: 형아, 언제 와? 우리 심심해.

- 슈바인 스트링거: 조금만 참아.

- 캉이: 저 멀리서 쾅쾅 소리가 나는데. 나가봐야 할까?

- 아스티나: 안 돼! 절대 나오지 마.

- 캉이: 누나, 왜?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단 말야. 무서워.

- 제르비어스: 무서워할 필요 없다, 꼬마야. 금방 지나갈 일이야.

- 슈바인 스트링거: 형아랑 누나들이 캉이랑 놀아줄려고 뭘 만들고 있는 거야. 일종의 놀이공원이랄까?

- 캉이: 놀이공원? 그게 뭔데?

- 슈바인 스트링거: 네가 좋아할 만한 거야. 기대하고 있으라고. 알았지?

그로부터 스무 시간 가량이 흘러갔다.

사역수들은 이제 체력을 전부 고갈 당했는지 나무를 더 이상 쓰러트리지 못하고 널브러져 있었다.

“고생했다. 이제 원래 너희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 근처에서 얼쩡댔다간 뼈도 못 추릴 테니까.”

“아우우…….”

기운 빠진 포효를 제각기 외쳐댄 야수들이 터덜터덜 돌아갔다.

[스킬 정신지배 Lv. 4의 유효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한 시간 뒤 자동해제 됩니다.]

아슬아슬했지만 겨우 내가 바라던 스테이지가 완성되었다.

중앙 피라미드에서 남쪽 여우굴까지 이어지는 일대가 탁 트인 공터로 다져진 것이다.

사역수들에게 작업을 일임한 덕분에 나와 제르비어스, 아스티나의 체력과 마력은 꽤 많이 회복된 상태였다.

이번 공략의 두 번째 단계로 나아갈 타이밍이다.

“한 번 더 확인할게. 각자 맡은 야수왕의 이름을 대봐.”

제르비어스가 자신의 가슴을 쳤다.

“동쪽의 훔바라스. 그놈은 내가 맡지.”

“녀석의 둥지는 알아보기 쉬울 거야. 새카맣게 타오른 일대에 터를 잡고 있거든.”

아스티나가 청룡패웅검을 뽑아들며 말했다.

“북쪽의 누겔타. 짐은 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 갑옷을 벗지 않는 걸 추천해. 그 녀석이 있는 곳은 엄청 춥거든.”

이제 남은 야수왕은 서쪽의 파주주.

뇌신 지드의 강림에 이용당했던 야수왕이 내가 사냥할 녀석이다.

3층 대수림이라는 스테이지의 중간보스몹들인 야수왕을 각개격파해야 한다.

일전의 탐사에서 나는 그 세 마리의 야수왕들을 사찰하고 온 적이 있다. 보통의 야수들이 대수림을 정처 없이 배회하는 것과 달리 야수왕들은 자신의 영역에 둥지를 튼 채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그동안 다른 야수들의 도전이 빗발쳤겠지만 여지껏 굳건하다는 것이 그들의 빼어난 전투력을 방증하고 있다.

“방심하면 안 돼. 그 녀석들 하나하나가 삼월초원의 간부들을 넘어서는 무시무시한 놈들이니까.”

세 야수왕의 둥지로 뿔뿔이 흩어져서 각자 맡은 상대를 쓰러트려야 한다.

모두가 힘을 합쳐 협공으로 차례차례 쓰러트리는 것도 가능했겠지만 이번엔 그 방법을 택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이번 3층에서 8층의 초월급 죄수인 뇌신 지드와 르팔타커스 시온의 승부를 지켜봤다.

지금의 내 수준으론 싸움의 진행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할 만큼의 어마어마한 격차가 있었다.

그걸 따라잡기 위해선 편한 길만을 고수해선 안 된다.

강적과 맞붙어 그걸 극복해내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셋 모두에게.

“텔레파시를 항상 신경 쓰고 있어. 동시에 싸우고 동시에 끝낸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등진 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죽지 마. 저기 홀로 남아 있는 아이가 우리의 묘비 앞에서 울게 하고 싶지 않다면.”

*

서쪽의 야수왕 파주주.

표범의 얼굴과 사자의 발톱, 그리고 독수리의 날개 네 장을 등에 단 짐승.

다른 야수왕과 달리 이 녀석만큼은 어떤 방식으로 싸우는지 관찰하지 못했다. 때문에 공략에 대한 힌트를 제르비어스나 아스티나에게 알려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맡기로 한 건데…….’

어쩌면 폭탄을 떠맡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캬오오오오오!”

날개를 단 생물이 지면에 저렇게 바짝 붙어 다가온다는 건 일종의 반칙이다. 이족보행 생활에 맞춰 진화한 인간이 발목 부근에서 공격이 날아오는 것에 익숙해질 리 없으니까.

까가가각!

현무패웅검을 들어 가슴을 할퀴려는 발톱을 막아 세웠다.

일단 정신 없이 날아다니는 파주주에게 의미 있는 타격을 넣으려면 근접전으로 상대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녀석의 날개는 단순히 비행을 위해서 달려 있는 게 아니었다.

휘리릭!

하단 날개 두 장을 땅에 박아 넣은 파주주가 다시 날개를 펼치는 탄성을 이용해 몸을 뒤틀었다. 역관절로 이뤄진 녀석의 뒷다리가 내 복부를 세게 걷어찼다.

“우엑!”

반탄지기로 보호하지 않았다면 내장이 온통 파열될 정도의 괴력이었다.

“이 자식이!”

나는 통증을 억지로 혀 안에 구겨 넣으며 살신참으로 응수했다.

대각선으로 날아가던 참격을 바라보던 파주주는 날개를 갑주처럼 가슴 앞에 교차시켜 방어했다.

투우웅!

저 날개엔 무슨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지 간단하게 살신참을 튕겨내 버린다. 궤적이 뒤틀린 참격이 저 멀리 충돌을 일으키며 흙먼지를 만들어냈다.

“그만 좀 달아나라!”

리버스 그래비티로 몸을 가볍게 해서 달려들었으나 파주주의 비행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게다가 대수림의 나무들 사이로 날아다니며 나와 장애물이 충돌하길 노리는 영리함까지 선보였다.

나는 파주주 대신 나무 한 그루를 쓰러트리며 혀를 찼다.

‘왜 이렇게 집중이 안 되지?’

분명 녀석은 야수왕의 지위에 걸맞게 강력했다. 나를 먹잇감으로만 생각해 달려드는 다른 야수와 달리 공격의 완급도 조절할 줄 알며 속임수를 쓰기도 한다.

짐승이 아니라 뛰어난 무림 고수를 상대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기지 못할 상대는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나는 삼월초원의 마교 서열전을 치렀을 때보다 2배 가까이 강해졌다. 그리고 다양한 상대와 맞붙으며 경험 또한 풍부해진 상태.

원래대로라면 이렇게 속수무책 농락당해선 안 된다.

그렇다면 이유는 심리적인 부분에 있을 것이었다.

‘의식하고 있구나. 그 녀석들에게 최악의 상황이 닥칠지 모르는 것에.’

제르비어스와 아스티나는 각개격파를 하는 게 어떠냐는 내 제안을 일언반구도 없이 받아들여줬다. 일종의 억지라고 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빨리 파주주를 쓰러트린 뒤 순간이동으로 동료들에게 날아가 도와줄 생각이었다. 아스티나도, 제르비어스도 이런 3층에서 잃어버릴 수야 없으니까.

퍼억!

나는 현무패웅검의 손잡이 끝으로 이마를 찍어 눌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물론 파주주는 고개를 갸웃하며 내 자학 행위에 의문을 표할 뿐이었다만.

“정신머리가 틀려먹었어. 눈앞의 상대에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마음이 콩밭에 가 있으니.”

나는 머리를 한 번 턴 다음 파주주를 노려보았다.

“이제부턴 다를 거다, 망할 놈아. 묵사발을 내 주겠어.”

현무패웅검을 있는 힘껏 뒤로 당긴 다음 손을 뿌렸다.

그러자 호쾌한 직선을 그리며 검이 파주주를 향해 날아갔다.

“캬악!”

녀석은 예상대로 날갯짓 한 번에 30미터를 움직이며 공격을 피해냈다. 뒤로 날아간 현무패웅검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나만을 노려보고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 피해낼 수 있을까, 과연?

‘허공섭물.’

나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제자리에서 요란하게 팔을 움직였다. 날아가던 현무패웅검이 되돌아오며 파주주의 비행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쐐애애액!

녀석이 아무리 빠르게 비행한다손 치더라도 막대한 내공이 실린 어검술을 당해내진 못했다. 무엇보다 현무패웅검은 놈의 체중보다 훨씬 가볍기 때문이다.

카앙!

결국 녀석은 비행에 집중하던 날개 한쪽을 휘둘러 현무패웅검을 쳐냈고,

바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나는 진각을 밟았다.

[용사전용기 무극참월공]

[제이식 무영보]

공간을 찢어내는 점멸로 파주주 앞에 당도한 나는 왼손으로 녀석의 날개를 움켜잡았다.

퍼억!

강철을 넘어서는 강직도를 가진 깃털이 손등과 손목을 파고들었다.

화끈한 고통이 신경을 내달렸지만 나는 아랑곳없이 오른쪽 주먹에 ‘업화의 불길’을 피워 올렸다.

“무식한 매타작을 받아봐라, 이 자식아!”

마기가 실린 주먹이 녀석의 눈두덩을 짓뭉개며 파고들었다.

“캬아아아악!”

물론 파주주의 반항도 매서웠다. 두 앞발의 발톱을 세워 나를 할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초근접 거리를 다시 만들어낼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에, 나는 깎여나가는 HP에 신경 쓰지 않고 주먹질에 박차를 가했다.

퍼억! 퍼어어억!

자아, 누가 먼저 부서질까 해 보자고.

튀어 오르는 피가 내 것인지 야수왕의 것인지 헷갈리는 상황에서 나는 있는 힘껏 녀석의 아구창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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