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102화 (102/300)

#102. 천만 개의 수갑 (1)

“무작정 다음 일식을 기다리는 건 말도 안 돼. 주기가 너무 길어. 27년이면 지구로 돌아갔을 때 상희가…… 내 고모뻘로 늙어 있을 거라고.”

눈앞이 캄캄해진다.

어디선가 증식하는 밀림의 뱀이 갈라진 혓바닥으로 음습하게 웃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젠장할 교도관 놈. 악의가 느껴지는 설계다.’

구미호는 그 강대한 드래곤과 같은 층에 배정돼야 할 정도로 높은 격을 가진 환수다. 애초에 이 대수림의 야수형 죄수들과 같은 층에 있어선 안 된다.

하지만 호이란이라는 규격 외 존재의 염원과 교도관의 탐욕이 만나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Lv. 99가 만렙인 게임에서 Lv. 299의 DLC 보스몹이 실수로 필드에 풀려나버린 꼴이랄까.

그런 보스몹을 쓰러트리는 레이드에 8분이란 시간제한이 걸려 있고, 한 번 실패할 때마다 28년의 쿨타임을 필요로 한다면 밸런스가 똥망인 게임이란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다.

그래도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알파 테스터였을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보자.

‘시발. 언제는 내가 밸런스 생각하면서 공략했었나.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고야 만다.’

두 번의 등반을 하는 바람에 어느덧 100년이었던 형량은 지금 400년까지 뻥튀기가 되었다.

내 목표는 탈옥이다.

식인 야수들이 우글거리는 밀림에서 영원토록 썩다가 대수림의 거름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

“캉이야, 여기서 뭐해?”

자신의 정체가 구미호 일족이라는 걸 까맣게 모르는 소년, 캉이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터에 홀로 서 있었다.

언제나 우리들로부터 한사코 떨어지지 않으려 했던 녀석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냥. 여기에 서 있으면…… 뭔가 눈물이 날 것 같아. 왜 그럴까, 형아?”

캉이는 근원지를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당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어디에서 출발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캉이가 서 있는 자리는 일곱 개의 수갑이 걸려 있던 묘지였기 때문이다.

‘기억하지 못해도 감정은 남아 있는 거구나.’

자신을 지켜주다가 야수들에게 희생당한 이름 모를 일곱 죄수들.

아니, 일곱뿐만이 아닐 것이다.

28년마다 캉이는 구미호로 변신해 주변을 초토화시킨 다음 기억을 잃어버린다.

당연히 캉이가 희생자들을 추모하던 묘비들도 폭발에 휘말려 매번 사라지게 된다.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캉이가 잃어버려야 했던 ‘어른들’이 몇 명이나 될지 상상하면 아득해졌다.

“뭔가 떠올리려 해봐도 답답한 기분만 들어, 형아. 나무를 탈 때 가지를 붙잡지 못하고 놓치면 가슴이 덜컹하잖아?”

“응. 그렇지.”

“그렇게 덜컹하는 기분이 지금도 들면 이상한 거 아니야? 지금 난 나무를 타고 있지도 않은데 왜 가슴이 덜컹하지?”

놓쳐선 안 될 것을 놓쳐버린 느낌.

캉이가 어째서 우리와 그토록 떨어져 있지 않으려 하는지, 잠시라도 작별하는 기분을 질색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캉이 뒤로 다가가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형아?”

“캉이야, 이 숲을 떠나게 되면 어떤 기분이 들 것 같아?”

“숲을 떠나? 친구들도 같이 가는 거야?”

“……응. 다 같이 가는 거야. 형아도, 누나도, 뿔 달린 아저씨도 다 함께.”

“그럼 괜찮을 것 같아.”

“그렇게 위층으로 계속 가다보면 말이야, 언젠가 캉이의 가족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나는 캉이의 기억에서 확인했다.

태어나자마자 강제로 떨어져야 했던 어머니 호이란이 7층에서 캉이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지금 그 사실을 이야기해 줄 수는 없었다.

내가 목격한 것은 현재가 아닌 오래된 과거. 최악의 경우 7층의 호이란은 이 시점에 살아있지 않을 수도 있다.

부모의 존재와 함께 그 부고 가능성을 알릴 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런데 캉이는 전혀 예상외의 질문을 던졌다.

“가족이 뭔데, 형아?”

이 아이는 애초에 가족의 형태를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누구로부터 왔는지, 원래 어떤 세계의 일족이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그것을 알려줄 부모가 곁에 없었으니까.

나는 최대한 진심을 담아 말해주었다.

“언제든 서로에게 술래가 되어주는 사이를 말하는 거야. 그런 걸 가족이라고 해.”

캉이는 뒤돌아서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청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형아랑 우리는 이미 가족이네, 뭘.”

1층 화룡도에서 나는 친구를 사귀었다.

2층 삼월초원에서는 두 스승을 만나 부모로 이어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3층 대수림에서 나는 이 아이를 만났다.

캉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내 왼쪽 손등에는 파천황 르팔타커스 시온의 의지가 담긴 사자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

그가 내게 친구의 권능을 준 이유.

함께 감옥을 오를 동반자를 만들어나가라고 한 진정한 의미는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닐까.

“그래. 가족을 찾지 못한다면…… 내가 가족이 되어줄게.”

나는 진심을 담아 캉이에게 약속했다.

*

그로부터 사나흘이 흘렀다.

정확히 며칠이 지나간 건지는 모르겠다. 대략 수백 시간이 흘렀다는 감각에 의존하고 있을 뿐, 밤이 오지 않는 세계라는 것은 의외로 시간감각을 훨씬 더 망가트리고 있었다.

때문에 밤낮을 고민해 작전을 수립했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전례 없이 치열하게 내게 주어진 시련을 타파하겠다는 각오 하에 머리를 싸맸다.

내가 직면한 과제는 둘.

8분이라는 일식의 제한시간.

28년이라는 일식의 주기.

처음에는 이것을 따로따로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무한정 벽에 부딪혀야만 했다.

하지만 이 두 개의 과제가 실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는 문제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지금 모든 준비를 마친 채 우리는 굴을 나서는 것이다.

“형아, 꼭 모두 떠나야 해?”

세 어른이 한꺼번에 대수림으로 출정을 나간다는 소리에 캉이와 친구들은 울상을 지었다. 지금도 이렇게 우르르 굴 밖으로 나와서 매달리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한다.

“걱정하지 마. 형아가 알려준 새로운 놀이 기억하지? 친구들이랑 그거 하고 있어.”

“……알았어. 금방 돌아와야 돼?”

새로 알려준 놀이는 별 것 아니었다.

굴 깊숙한 곳에 들어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있는, 이른바 시체놀이였다.

하지만 내 경험상 이 나이대의 아이들은 시체놀이에 금방 질려 한다. 지금껏 어떤 놀이에도 싫증을 내지 않은 캉이의 인내심에 한 번 기대볼 수밖에.

“가자. 숲 속으로.”

나는 제르비어스와 아스티나를 양 옆에 둔 채 북쪽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 거대한 숲 속에는 여전히 우릴 먹잇감으로 생각하는 포식자들이 발톱을 드러낸 채 배회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부로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는 역전된다.”

탐식에 미친 야수들아.

어디 거꾸로 먹잇감에게 쫓기는 기분을 느껴보도록.

*

누가 그랬던가.

초록이라는 색깔은 심신을 안정시키고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어준다고. 눈의 피로를 풀어줄 뿐 아니라 긴장을 해소시켜주는 대표적인 심리치료의 색상이라고.

그 이론에 따르면 이 대수림이야말로 우주에서 손꼽히는 명상 치료의 성역이라 할 수 있을 테지만.

‘그건 사람을 찢는 야수가 숨어 있지 않을 때의 이야기.’

대수림을 내달리는 내 시야는 온통 녹색 실선으로 가득했다.

본래 목표물을 찾아내야 하는 자의 입장에선 이렇게 전력으로 질주하는 방식은 삼가야 한다. 주변을 세심하게 살피지 못하기 때문이다.

- 용사님, 방향이 북동쪽으로 틀어졌습니다. 제가 그려내는 화살표에 주의해주세요.

하지만 뛰어난 정확도의 내비게이션이 있다면 주변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크륵?”

게다가 대수림의 야수들은 각자 세계에서 상위 포식자로 군림하던 강자들.

환경에 맞춰 살아남기 위해 보호색을 갖춰야만 하는 초식동물들과 달리 눈에 확 띄는 화려한 털이나 갈기를 갖고 있다.

“저놈이다. 쓰러트려!”

아스티나가 시위를 벗어난 활처럼 내쏘아졌다.

황토색 털을 가진 개미핥기가 우릴 발견하자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아스티나가 입은 흑기사의 갑옷을 목격하자 펄쩍 뛰며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아스티나의 갑옷은 온통 붉은빛으로 타오르고 있다.

캉이가 ‘빨강이’라 부르는 돌. 그것을 갑옷의 모든 부위에 덧대고 있기 때문이다.

야수들에게 있어 지금 아스티나는 움직이는 ‘트라우마’라 할 수 있다.

[그래비티 슬래시]

굳어 있던 개미핥기의 허벅지에 가공할 중력참이 파고들었다.

뱅그르르 돌며 허공에 떠오른 야수의 몸통. 그것을 뛰쳐 오른 제르비어스가 강력한 스파이크를 때리듯 후려쳤다.

퍼어어어억!

기다란 발톱을 한 번 휘둘러보지도 못한 채 개미핥기가 철푸덕 쓰러졌다.

[대상의 HP가 낮아져 빈사상태에 돌입했습니다.]

[정신지배 Lv. 3를 걸 수 있는 대상입니다.]

나는 공포로 질겁해 있는 개미핥기의 주둥이를 콱 움켜잡은 채 스킬을 발동시켰다.

“너는 이제부터 내 사역수(使役獸)다. 잠자코 우릴 따라와.”

개미핥기의 동공에 힘이 스르륵 풀리더니 반사적으로 몸부림치려던 발톱이 우뚝 멈췄다.

“크륵.”

내 앞에 바짝 엎드리는 야수. 제르비어스 폰타인에게 빌려온 스킬 정신지배의 위력이다.

나는 개미핥기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 준 다음 두 번째 타깃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사역수가 훨씬 많이 필요해.’

각양각색의 형태를 하고 있는 트랜스 야수들 중에서 내가 노리고 있는 녀석들의 기준은 오직 하나였다.

50센티미터 이상의 발톱을 가진 녀석들.

내 작전을 들은 제르비어스와 아스티나는 마치 수족처럼 충실하게 움직여 주었다. 삼월초원에서 설공을 끝내 쓰러트린 내 공략법을 곁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용사에 대한 동료들의 신뢰가 한층 두터워집니다.]

[스킬 ‘만전불패의 체술’이 Lv. 6으로 오릅니다.]

긴 발톱을 가진 야수가 여러 마리의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는 시선을 분산시켜 주었고, 그때 내가 타깃에게 접근해 야수를 제압했다.

사역수의 무리는 곧 10마리가 되었고,

이어 30마리,

50마리를 넘어섰다.

[용사를 따르는 죄수의 무리가 50을 넘어섰습니다.]

[동조효과가 적용된 스킬 ‘정신지배’가 Lv. 4로 오릅니다.]

처음 대수림으로 나섰을 때 우리의 전법은 사냥이었다.

하지만 뒤따르는 사역수들의 숫자가 많아지면서 단순한 물량만으로 야수들을 제압하기가 쉬워졌다.

사냥은 곧 집단전투가 되었고,

집단전투는 이내 전쟁의 규모로 확장되었다.

[용사전용기 무극참월공이 Lv. 6으로 오릅니다.]

[거듭된 승리로 근력과 민첩이 각각 60씩 오릅니다.]

간만에 맛보는 레벨업의 쾌감이 전의를 충만하게 만들어주었다.

어디선가 교도관장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번 대수림에서 또 내가 무슨 짓을 벌이려는지 기대감을 가진 채 말이다.

[용사를 따르는 죄수의 무리가 100을 넘어섰습니다.]

[새로운 칭호 ‘대수림의 남쪽 야수왕’이 추가됩니다.]

야수왕.

알파메일.

나는 어느덧 도시 하나를 가볍게 함락시킬 수 있는 병력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캉이의 기억 속에서 마주친 호이란은 내게 이런 전언을 남겼었다.

‘교도관장은 제 목숨 하나를 받아가면서 허공록의 관리자로서 한 가지 언약을 하였습니다. 제 목숨을 넘겨받을 이는 분명 ‘왕(王)’이 될 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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