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망국의 짐승 (4)
‘거래’라는 말에 두 교도관이 언쟁을 멈추었다.
[두 교도관이 수감자에게 방금 꺼낸 말의 진의를 묻습니다.]
호이란이 자신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궁금하다는 듯이.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이 궁금한 사람은 여기에도 있었다.
“내가 그대들에게 줄 것은…….”
나는 호이란의 입으로 시야를 집중시켰다.
분명 지금의 거래가 캉이의 비밀과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파아아아아앗.
그런데 기억은 또다시 풍경을 뒤바꿔 버렸다.
*
그것은 아득한 크기를 자랑하는 물푸레나무였다.
우주의 탄생부터 존재해왔다는 세계수 위그드라실.
까마득한 곳까지 가지를 넓히며 일곱 빛깔로 영롱하게 빛나는 나무의 중앙에…….
웅혼한 존재감을 내뿜는 거룡이 있었다.
그가 바로 7층의 교도관 ‘영겁에 똬리를 튼 용’의 화신체라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무사한가?’
나는 화신체의 존재감에 감탄하는 것을 멈추고 시야를 확장했다. 거룡의 콧구멍 크기만 한 구미호 호이란이 그 앞에 인간 형태로 둔갑한 채 서 있었다.
호이란의 품에는 작디작은 여우 한 마리가 안겨 있었다.
‘캉이.’
어미는 새끼가 사랑스럽기 그지없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인간에 불과한 아비가 아낌없이 목숨을 바쳐 지켜내었던 자식. 그리고 이 감옥에 불려온 어미가 교도관과의 거래를 이뤄내 지켜낸 새끼 여우이기도 했다.
영겁에 똬리를 튼 용이 고했다.
“때가 되었다, 호이란. 이제 너의 새끼를 3층 대수림으로 내려 보내야 한다.”
“하루만…… 하루만 더 함께 있을 순 없겠는가, 교도관.”
“그것은 곤란하다. 신적인 존재와 맺은 언약. 지키지 않으면 그 어린 녀석에게도 신벌이 돌아갈 터.”
“……알았다.”
호이란은 아쉬운 탄식을 내뱉은 다음 잠들어 있는 여우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어째서인지 전지적 시점을 갖고 있는 나에게도 그 귓속말은 들리지 않았다.
호이란이 캉이를 내려놓자 위그드라실의 이파리가 뻗어와 새끼 여우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번쩍이는 빛과 함께 사라졌다.
호이란은 한참 동안이나 캉이가 사라진 자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룡이 다시 입을 열었다.
“비로소 거래는 완료되었다, 수감자여. 이제부터 그대는 미뤄놓았던 운명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호이란이 고개를 돌려 세계수를 둘러싼 풍경에 눈을 돌렸다.
수천 개의 천공섬이 구미호의 동공을 가득 채웠다.
그 섬 하나하나마다 압도적인 힘을 자랑하는 고룡, 마룡, 환수들의 둥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새끼를 낳을 때까지 그대를 용들로부터 지켜달라는 대가로 나는 목숨 3개를 받았다. 그리고 3층의 뱀 녀석도 그대를 내게 양보하는 대가로 목숨 2개를 받아갔지. 이제 그대의 목숨은 4개뿐이다.”
그러자 호이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정확히는 3개다. 1개는 이 감옥의 최고통치자에게 건네었거든.”
고룡이 콧김을 내뿜었다.
“교도관장과도 거래한 것인가. 그대는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나 보군.”
“아니. 아깝다. 그리고 앞으로도 내 목숨을 아끼고 아껴…… 내 자식이 다시 내 품으로 돌아올 때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교도관.”
천공섬에서 무수히 많은 숫자의 용들이 날아올랐다.
세계수의 가호를 받는 것은 오늘로서 끝.
이제 호이란은 자신을 노리고 달려드는 용들의 습격을 버텨내야 한다.
까마득한 아래층으로 내려 보낸 새끼가…… 태어난 둥지로 되돌아올 때까지.
*
새하얀 백색 풍경에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놀랍게도 호이란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었다. 지금까지 그녀의 기억을 엿보기 하는 동안 한 번도 내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는데도 말이다.
“놀랄 것 없습니다, 이름 모를 죄수여.”
“……이건 당신의 술법이로군요, 호이란.”
“네. 자격을 갖춘 이가 제 아들의 기억에 접촉했을 경우 발동되도록 숨겨놓은 서신 같은 거랍니다.”
자격이라.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러자 묻지 않았음에도 호이란은 내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지금 저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교도관장에게 제가 넘긴 ‘담보’를 그대가 넘겨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저와 연결되었다는 것은 여우의 ‘목숨’ 하나를 갖고 있다는 의미일 테니까요.”
여우의 목숨?
설마 그건가.
2층 삼월초원에서 설공을 처치하는 돌발퀘스트. 그 보상으로 교도관장이 내게 주었던 1코인의 추가 목숨. 그것은 교도관장의 특혜가 아니라 구미호 호이란의 안배였던 것이다.
망할 교도관장 새끼. 제 선물도 아니면서 그렇게 생색을 내다니.
하지만 지금은 내 분노를 터트릴 때가 아니었다.
자신의 기억을 공유해 준 호이란의 술법이 이제 곧 끝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호이란, 당신의 아들은…… 무사히 대수림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그렇군요. 저의 본체가 그 소식을 알았다면 지금의 저만큼 기뻐했을 테지요. 하나 제 본체가 여지껏 살아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에게 어려운 부탁을 해야 할 것 같군요.”
나는 그 부탁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제 아들을 7층까지 데려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대신 제가 줄 수 있는 것이라곤…… 층장의 열쇠뿐입니다만.”
“그 전에 질문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하십시오. 제 지식 안에서라면 답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어째서 캉이…… 아니, 당신의 아들이 죄수가 아님에도 3층의 층장이 된 겁니까.”
“그것이 3층 교도관이 제게 제안한 거래의 조건이었기 때문이지요. 자신이 3층 죄수에게 내리는 시련에…… 제 아들을 이용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시련을 깨트리는 등반죄수가 나타날 때까지.”
“그렇군요.”
많은 의문이 풀렸다.
3층 대수림의 시련. 야수로 변하는 초능력을 이용해 많은 이들을 살해해 온 죄수들에게 거꾸로 ‘잡아먹히겠다는 공포’를 안겨주는 층장.
캉이는 그렇게 이용되고 있었다.
호이란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제 아들이 당신을 만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을 홀로 지내야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와 작별한 기억은 잊도록 술법을 걸어놓았지요.”
“그 술법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내 절박한 질문에 호이란이 답했다.
“아직 어리긴 해도 구미호는 봉래산 최강의 영물. 그대는 구미호 상태의 제 아들을 완벽히 제압해야 합니다.”
*
호이란의 기억을 엿보는 시간이 끝났다.
내 의식이 다시 대수림의 여우굴로 돌아왔을 때, 캉이는 아스티나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었다. 머리에 생겨났던 귀와 아홉 개의 꼬리는 사라진 상태.
“그렇다면?”
캉이의 아홉 친구들이 내 등 뒤에 일렬로 서 있었다. 마치 애초에 사라진 적이 없었다는 듯이.
“용사, 무엇을 보고 왔나.”
제르비어스가 초조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캉이의 엄마를 만나고 왔어.”
나는 구미호 호이란의 일생을 엿보고 온 것과 그녀가 처음 푸르가토리움에 발을 내딛으며 난동을 피웠던 사건, 두 교도관과 거래해 캉이를 이곳 대수림으로 내려 보낸 경위를 전부 털어 놓았다.
아스티나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 목숨을 내놓은 거구나.”
아홉 번 죽을 수 있다고 해서 목숨이 덜 아까울 리는 없을 것이다. 호이란은 캉이의 생존을 위해 말 그대로 여섯 차례의 죽음을 감수한 것이다.
천마와 마녀가 목숨을 희생해가며 블랙홀로 떠밀어 살려낸 딸인 아스티나에게 있어 호이란의 이야기는 마치 자신의 일생처럼 느껴질 것 같다.
“캉이의 기억에 술법을 건 것도 호이란이었어. 그녀가 말하기를 층장의 열쇠를 내가 정식으로 건네받기만 하면 캉이는 본래의 힘을 되찾게 된다더군.”
외로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무의식중에 분신을 만들어내는 일도,
변신 때마다 자아를 지키기 위해 슬픈 과거가 삭제되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스티나와 제르비어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내가 이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단, 구미호 상태의 캉이를 완벽히 제압해야 해.”
과연 가능할까.
단 한 번 상대해봤지만 구미호로 변신해 이성을 잃은 캉이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꼬리로 날아오를 수도 있으며 앞발로 할퀴는 것에 직격으로 당하면 뼈가 으스러질 정도였다.
무엇보다 드래곤의 브레스처럼 입에서 내쏘는 광선포인 ‘여우트림’은 지금껏 푸르가토리움에서 내가 목격한 스킬 중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캉이의 폭주를 멈춰 세워야 한다.
심리전이 통할 상대도 아니다. 나와 아스티나, 제르비어스를 귀염성 있게 졸졸 따르는 캉이와 달리 환수 구미호는 우릴 기억하지 못한다. 감정에 호소하며 사정을 봐 달라 애원한다 한들 먹힐 리 없다.
꼼수나 속임수 없이 오직 실력으로 쓰러트려야 한다.
“우리 셋만으로 할 수 있을까?”
아스티나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선 낙관적인 소식을 먼저 꺼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번에는 아무런 대비 없이 당한 거잖아. 그때 우린 전조 없이 시작된 일식에 당황했고, 텔레파시가 통하지 않는 바람에 우왕좌왕 했어. 싸워야 할 대상이 분명하고 그 전에 준비할 수 있는데다 이번엔 제르비어스도 전력에서 이탈하지 않을 테니까 결코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야.”
다만,
극복해야 할 커다란 장애물이 하나 있었다.
바로 일식의 유지시간.
“태양이 달에 가려지는 일식이 시작되고 끝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무척 짧았어. 교도관장이 내게 내린 퀘스트의 설명문에 따르면 고작 8분에 불과하다고 해.”
구미호가 된 캉이와 마주쳤을 때, 그 짧은 유지 시간은 나와 아스티나에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사태가 더 지속되었더라면 크게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번엔 입장이 달라. 8분은 짧아도 너무 짧거든.”
게임으로 치면 타임 어택이 달성 조건으로 붙어 있는 셈이었다. 상대가 우리보다 막강하다는 점에서 극악의 난이도라 할 수 있었다.
강적을 거꾸러트리는 정석적인 방법은 당연히 초장기전이다.
싸움이 길어질수록 변수가 많아지고, 그 변수들의 조합이 다양해질수록 약자가 강자를 앞설 수 있는 확률이 올라간다.
“아무리 생각해도 막막하네. 80분도 아니고 8분.”
생각할 수 있는 전략의 가짓수가 시작부터 썩둑 잘려나가는 기분이다.
게다가 우리가 걱정해야 할 건 일식이 너무 빨리 끝난다는 점뿐만이 아니었다.
그 천문현상이 ‘언제’ 다시 돌아오느냐가 훨씬 더 큰 문제였다.
“27년 4개월이라고?”
나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단탈리온을 노려봤다.
하지만 전지의 마도서가 던져준 답변이 틀린 적은 지금껏 없었다.
- 그렇습니다. 대수림의 위성인 달의 공전궤도와 태양이 겹쳐지는 ‘개기일식’의 다음 차례는 정확히 10,000일 남았습니다.
그렇다는 건 구미호 상태의 캉이와 만나게 되는 시점이 까마득하게 멀리 남았다는 소리다.
“설마 한 번의 시도가 실패할 때마다…….”
- 네. 용사님은 또 다시 27년하고도 4개월을 기다려야 하겠지요. 푸르가토리움의 자연현상은 모두 교도관의 통제 하에 연출되고 있습니다. 일식을 앞당기는 건 교도관 본인이 아니고선 불가능합니다.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
아랫배에서 끓어오르는 분노가 눈에서 불똥이 튀도록 만들었다.
“빌어먹을 뱀대가리가 아주 재미난 시련을 준비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