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망국의 짐승 (3)
황궁의 경비를 책임지는 황궁호위관의 천인장.
그는 인간으로 둔갑한 호이란과 사랑에 빠져 혼인의 약조를 맺은 사내였다.
“소첩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사옵니다. 황궁에 사악한 여우가 숨어들었다는 황실 주술사의 말만 믿고, 병사들이 소첩을 잡아들이려 하지 않사옵니까.”
“나도 그 뜬소문을 들었소. 하지만 궁녀를 비롯한 황실의 모든 여인이 주술사의 시약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황후와 후궁들마저 그리 하였소.”
“소첩은 결코 따를 수 없사옵니다.”
그 시약을 흡입했다간 숨겨둔 아홉 개의 꼬리가 들통 날 것이 뻔했다.
호이란은 외통수에 갇혀버린 것이다.
하지만 남편에게는 달리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해할 수 있는 그 어떤 수작도 소첩은 허락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설령 그것이 지엄한 낭군님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받아들일 수…….”
“오해를 하고 있군요, 부인.”
사내가 한 발짝 다가서자 호이란은 흠칫 놀라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금슬 좋았던 혼인 생활 동안 한 번도 볼 일 없었던 경계심.
그것을 본 사내의 속눈썹에 짙은 슬픔이 어리었다.
“나는 부인이 천년 묵은 구미호라 하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소이다. 다만, 부인이 혹여 다치기라도 했을까봐 이리 달려왔을 뿐.”
호이란의 동공이 흔들렸다.
인간 세상에 둔갑해 내려오길 수백 년.
우연이라도 자신의 꼬리를 본 자들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그녀를 두려워하거나 죽이려 들었다.
“……구미호는 망국의 징조를 불러오는 짐승이라 하옵니다. 낭군님은 황궁의 호위를 책임지는 무사장. 그런데도 불구하고 구미호라 의심받는 이 소첩을 지키시겠다는 말씀이옵니까.”
“자신이 선택한 여인 하나도 지키지 못하는 자가 어찌 일국을 지켜낼 수 있겠소이까.”
사내는 말하고 있었다.
온 세계가 자신을 괴물이라 말해도 상관없다고.
“부인은 내게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아내였지 않소이까. 그리고…… 역시 어진 어머니가 될 것이라고도 믿어 의심치 않소. 그러니 달아나시오. 추격해오는 병사들은 내가 막아설 터이니.”
호이란의 어깨를 감싸 안는 다부진 손길. 이번에는 그녀도 몸을 피하지 않았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굳은 살이 듬직했다.
무사장은 황실을 통틀어서도 손에 꼽는 검객이었다.
하나 일신의 무력만으로 수천의 병사들을 상대할 수는 없는 법. 반란을 천명한 이상 현장에서 사살되거나 참수형을 면하지 못한다.
“성벽 위다! 여우가 달아나고 있다!”
“잡아라! 인간으로 둔갑했을 때 불태워야 한다.”
호이란을 발견한 병사들이 짓쳐들어오고 있었다.
사내가 호이란에게 등을 돌린 채 검을 뽑아들었다.
“짧은 생이었으나 부인을 만나 행복했소이다. 부디, 우리의 아이에게도 그런 따스한 삶을 알려주시오.”
“……여, 여보.”
투구를 쓴 무사장이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가 일검을 휘두르자 병사들이 썰려 나갔다. 포악하기 그지없는 손속. 호이란의 탈출을 위해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시키려는 것이다.
호이란은 그 모습을 한참 지켜보다가 성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
황궁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강가의 허름한 부두.
호이란은 불에 그슬린 옷차림을 하고선 조각배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은자를 받아든 늙은 뱃사공은 히죽거리고 있었다.
‘이 강만 건너면 모든 것이 끝난다.’
호이란은 남편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아이를 낳기 위한 도구였다. 인간 세상에 둔갑하기 위해 필요한 유전자 정보. 그것을 채집하기 위한 표본에 불과했거늘…… 어리석은 인간.
이제 아이를 품에 안은 채 봉래산의 여우굴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지긋지긋한 인간 세상 따위 다신 내려오지 않아도 된다.
호이란은 개운한 기분으로 싱긋 웃었다.
그리고 찰랑이는 강물의 파랑을 잠자코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노를 붙잡은 뱃사공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새댁. 거, 무슨 연유로 그리 구슬피 우시오?”
“……운다고요? 제가 울고 있단 말인가요?”
“그렇소. 내가 노를 잡은 지 어언 반백년이거늘, 전쟁 통에서 구를 때도 새댁만큼 구슬프게 우는 여인은 보지 못했구려. 쯧쯔. 거 보아하니 홀몸도 아닌 것 같은데…… 남편이 호랑이한테 물려가기라도 하였소?”
툭.
갑자기 볼에 흐르고 있던 액체가 무엇인지 실감이 났다.
온갖 기기괴괴한 술법에 능한 구미호였으나, 끝내 자기 자신을 속이지는 못하였다.
“네. 호랑이에게…… 남편을 잃었습니다.”
내리누르고 있던 슬픔이 터져 나왔다.
잘라버렸다 여겼던 분노가 용솟음쳤다.
안 되겠다. 이 핏값을 받아야겠다.
아직 배가 더 불러오기 전에.
호이란은 벌떡 일어나 강물 아래로 뛰어들었다. 허름한 치맛자락이 금세 무릎까지 젖어들었다.
당황한 뱃사공이 노를 놓치고 손을 허우적댔다.
“아니, 새댁! 어디 가는 거요?”
“내 남편을 잡아먹은 호랑이를…… 쳐죽여서 가죽을 벗겨야겠습니다.”
“허어어, 실성한 건가? 그 가녀린 몸으로 호랑이를 잡겠다고? 잊어버리시게나. 본능에 따라 이빨을 휘두른 짐승을 인간의 법도로 판단할 수야 없는 것 아니겠소.”
호이란이 구슬프게 웃었다.
“어르신의 말이 맞습니다. 짐승을 인간의 법도로 판단해서야 안 되지요.”
완벽하게 인간처럼 살아왔다.
둔갑의 명수 구미호였으니까.
하지만 오늘만큼은 본능에 따라 이빨을 휘두르겠다.
아홉 개의 꼬리가 일거에 펼쳐지며 강가에 요사스러운 기운을 떨쳐대었다.
호이란이 거대한 구미호로 변신하자 뱃사공은 조각배에 주저앉아 까무라쳤다.
“아우우우우우우우!”
내 남편을 잡아먹은 호랑이들.
오늘 이 땅덩어리 위에서 멸종당할 것이다.
그 날, 거대한 백색 여우가 강물 위를 날았다.
*
세상을 둘러싼 풍경이 휙휙 바뀌었다.
호이란을 둘러싼 세계가 실선이 되어 빠르게 내 주변을 지나쳤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호이란의 기억이 시간의 흐름을 빨리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한…… 입소거부자로군요.”
눈앞에 있는 것은 내게도 익숙한 녀석이었다.
축 처진 눈썹을 가진 생쥐.
푸르가토리움 0층의 교도관인 ‘나태에 짓눌린 쥐’였다.
“아무도 나를 데려갈 수 없다. 한 발짝이라도 나를 움직이게 만들려면 이 목을 아홉 번 베어내야 할 것이야.”
입가에 핏물이 맺힌 호이란의 살벌한 경고였다.
구미호의 거체가 대기실의 통로를 절반 이상 틀어막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그녀의 등 뒤로 걸어온 길이 보였다.
구부러진 채 나동그라진 철장과 여우트림에 의해 박살난 내벽. 호이란의 난동에 의해 0층 대기실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나태에 짓눌린 쥐가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대를 아홉 번이나 소멸시키는 것은 너무나 귀찮은 일이란 말입니다. 어째서 본 교도관에게 그런 가혹한 처사를 강요하는 겁니까.”
주변의 살풍경과 달리 교도관의 옷차림엔 아무런 흠집도 나 있지 않았다.
호이란은 봉래산의 모든 환수들과 힘겨루기를 해보았으나 눈앞의 쥐만큼 강력한 짐승은 본 적이 없었다.
이 쥐는 자신을 죽이는 걸 ‘귀찮은’ 일이라 표현했다.
즉,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란 소리.
호이란의 꼬리가 축하고 처졌다.
“나에겐…… 뱃속의 새끼가 있다. 이곳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으나 감옥에 갇혀 있어선 아니 된단 말이다.”
구미호의 절박한 말에 0층 교도관이 주춤했다.
생명을 잉태한 상황에서 푸르가토리움이란 감옥에 붙잡혀온 죄수.
혼자서 처분을 결정하기 곤란한 죄수라 할 수 있었다. 대기실에서 난동을 피운 죄를 물어 즉결처분했다간 귀찮아질 수도 있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흐음. 확실히 전례가 없는 일이군요. 회임 상태로 입소대기자가 되다니. 그대는 혹 어린 자식의 안위가 걱정되어 감옥에 들어갈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까?”
“그, 그렇다.”
나태에 짓눌린 쥐가 호이란을 안내한 곳에는 큼지막한 철문이 주변을 오시하고 있었다.
짐승으로서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저 문을 넘어서면 구미호의 괴력과 요술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들이 득시글댈 것임을.
그래서 결단코 문 앞에 서지 않겠다고 용을 썼던 것.
“일단 판정을 받아보시는 걸 권합니다, 수감자여. 판정 결과에 따라 그대의 자식을 살릴 방도가 있을지 모르니까요. 하지만 끝끝내 입소를 거부한다면 그대와 뱃속의 자식 모두 개죽음…… 아니, 여우죽음을 당할 겁니다.”
마지막 말은 0층 교도관의 빈약한 유머감각에서 나온 것이었으나 호이란은 알아채지 못했다.
다만 자식을 살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기에 앞발을 내디뎠을 뿐이다.
철문 앞에 선 구미호에게 ‘심판의 문’이 판정을 내렸다.
[호이란. 등급 환수. 7층 세계수의 천공섬에 배정됩니다.]
본래대로였다면 여기서 배정이 끝나야 한다.
하지만 심판의 문은 동시에 한 마디를 더 내뱉었다.
[호이란이 품은 배아. 등급 미정. 3층 대수림에 배정됩니다.]
[모체와 배아의 배정층이 다릅니다. 죄수의 배치에 참고할 사례를 검색 중입니다.]
[검색 결과 없습니다.]
나태에 짓눌린 쥐가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호이란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기에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것을 차분히 지켜볼 수 있었던 나는 이런 상황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내가 배정 받았을 때와 닮았어. 그때 참고할 사례가 없다면서…….’
[연옥의 문이 푸르가토리움의 두 교도관을 소집해 의견을 구합니다.]
이렇게 교도관을 소집했었다.
아홉 교도관이 전부 모였던 내 사례와는 달리 호이란의 배정에 개입할 수 있는 교도관은 둘 뿐인 모양이었다.
나태에 짓눌린 쥐가 수염을 쓰다듬었다.
“흐음. 어떤 교도관이 올지 예상이 되는군요.”
야생동물들이 자신보다 위협적인 포식자의 기척을 민감하게 느끼듯이, 구미호인 호이란 역시 이 순간 대기실에 강림하는 강고한 신격 존재들을 알아챘다.
그 숫자는 둘.
[3층의 교도관 ‘증식하는 밀림의 뱀’이 0층에 입장했습니다.]
[7층의 교도관 ‘영겁에 똬리를 튼 용’이 0층에 입장했습니다.]
[3층의 교도관이 수감자 호이란이 품은 배아의 관리권을 주장합니다. 아직 임신 8주가 지나지 않아 ‘태아’로서의 격을 획득하지 못했기에 대수림이 합당하다고 전합니다.]
[7층의 교도관이 그 혓바닥을 놀리지 말라 경고합니다. 환수의 자식 역시 환수로 자라날 테니 응당 7층에 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3층의 교도관이 죄수 호이란에게 경고합니다. 7층 세계수의 천공섬은 온 우주에서 새끼를 키우는 데 최악의 환경일 것이라 확신합니다.]
[7층의 교도관이 계속 욕심을 부린다면 혓바닥을 뽑아서 다신 증식하지 못하게 만들어주겠다고 겁박합니다.]
두 교도관이 서로 치열하게 소유권을 주장했다.
느닷없이 차원감옥에 불려온 호이란의 입장에선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대화의 연속일 터였다.
나는 누구보다 그 심리에 절절히 공감할 수 있었다.
‘바로 내가 그랬으니까.’
하지만 호이란은 나와 다른 점이 있었다.
바로 아홉 개의 목숨을 가진 구미호라는 점이었다.
기나긴 침묵 끝에 호이란이 주둥이를 열었다.
“그대들과 거래를 하고 싶다. 내 새끼를 지키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