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 망국의 짐승 (2)
“이건 확실하지 않은 단순한 추측이지만…… 캉이를 지켜주려 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은 변신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아. 하지만 되려 캉이가 지켜주려 했던 아이들의 실종, 캉이가 지키고자 했던 이 여우굴이 변신의 후폭풍으로 날아간 기억 같은 것은 망각되는 것 같아. 편리하지 않아? 행복했던 순간들은 지워지지 않고, 슬픔과 상실감을 겪었던 순간들만 휘발되는 게.”
“……하지만 자연스럽지 않아.”
9서클 마법사의 딸이자 본인 역시 6서클 마법사인 아스티나가 이 ‘부자연스러움’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슈바인, 뭔가가 캉이의 의식에 개입하고 있어. 저렇게 뒤죽박죽으로 채워지는 기억은 서로 틀이 맞지 않는 조각으로 탑을 쌓아올리는 것과 같을 거야. 언젠가는 그 탑을 지탱하던 것이…… 한 번에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어.”
단탈리온은 캉이의 기억에 어떤 주박이 걸려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주술은 굉장히 뛰어난 수준이라고도 했지.
그러니 적어도 캉이의 기억을 관리하고 있는 어떤 ‘주체’가 캉이 본인일 확률은 적을 것 같았다.
술자가 자신에게 거는 것을 ‘주박’이라고 표현하지는 않을 것 같다. 속박, 제약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나을 테니까.
나는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층으로 가려면 우린 캉이에게 층장의 열쇠를 건네받아야만 해.”
그냥 달라고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캉이의 손등에는 나처럼 열쇠의 징표가 없다. 그리고 인간 모습의 캉이를 바라보면 [이 존재는 층장이 아닙니다]라는 메시지만 뜬다.
즉, 구미호 상태의 캉이에게 열쇠를 건네받아야 한다는 말이 된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구미호에게 대체 무슨 수로 열쇠를 건네받을 수 있을까.
교도관장이 내준 퀘스트처럼 살해하면?
그 미칠 듯한 난이도는 차치하고서라도 캉이를 죽여 열쇠를 쟁취한다는 발상에 아스티나와 제르비어스가 동의할 리가 없다.
캉이를 동생처럼 아껴주는 아스티나.
캉이에게 죽은 자식을 투영시키는 제르비어스.
무엇보다 나 자신이 그런 방법을 용납할 수가 없다.
‘아무런 죄가 없는 캉이를 죽이고 열쇠를 빼앗아서 결국에 탈옥을 한다 치자.’
상희가 그런 오빠를 받아들여줄까?
아스티나가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아얏. 뭐야?”
“계속 부르고 있었어. 왜 대화를 하다 말고 너 혼자만의 세계에 매몰되는 거야. 그거 매너 없는 짓이라고.”
“미안. 뭔가 공략의 방법이 막히면…… 나도 모르게 주변이 보이지 않는 습성이 있어서.”
나는 머리를 벅벅 긁적이며 말을 덧붙였다.
“아무래도 3층의 시련을 해결할 열쇠는 캉이에게 있는 것 같아. 정확히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캉이의 과거, 잊혀진 기억 속에 숨겨져 있겠지.”
그러나 무슨 수로 캉이의 기억을 엿볼 수 있을까.
전지의 마도서 단탈리온마저 교도관장의 제약으로 열람이 불가능한 정보라고 했는데.
교도관장의 제약을 깨부술 정도의 기막힌 발상이 아니면 이 난관을 돌파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때, 묵묵히 듣고 있던 제르비어스가 손을 들었다.
“언제나 돌파구를 생각해내는 건 용사, 너의 몫이었다만 이번만큼은 이 폭렬마왕의 힘에 한 번 기대보는 게 어떠한가.”
“엉? 뭔가 방법이 있어?”
“있다. 잊고 있나 본데, 캉이의 정체가 그 구미호라는 짐승이라면…… 내가 1층과 2층에서 누구를 길들였는가를 떠올려 봐라.”
제르비어스가 화룡도와 삼월초원에서 길들였던 거라면…… 헬 판테라 밍밍이와 검독수리 꼭꼭이?
마왕이 무엇을 떠올렸는지 알겠다.
캉이의 본질은 인간이 아니라 구미호.
내 눈빛을 본 제르비어스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환수도 결국에는 동물. 캉이에게 마왕의 고유 권한인…… 정신지배 스킬을 써보는 거다.”
*
[친구 제르비어스 폰타인의 액티브 스킬 ‘정신지배 Lv. 1’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지정대상인 동물에게 세뇌, 환각 유도, 감정 조작을 걸 수 있으며 Lv이 Max인 경우 시전대상의 기억을 엿보고 강력한 암시를 거는 것도 가능합니다.]
[지정대상 동물의 스탯이 시전자의 그것보다 3분의 1 이하로 낮거나 체력이 빈사 상태일 때만 유효합니다.]
폭렬마왕 제르비어스 폰타인.
그는 단 한 번도 왕국에서 보내오는 용사 일행에게 마왕성의 옥좌를 내어준 적 없는 강력한 마왕이었다.
그럴 수 있는 데에는 본인의 압도적인 무력과 마족으로서 타고난 폭렬마법, 그리고 동물의 정신을 지배할 수 있는 이 스킬 덕분이었다.
“본래 이것은 마왕군과 연합군 사이의 집단전에서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었다. 말을 탄 기마병이나 코끼리를 길들여 그 위에 올라탄 야수병단이 종종 나타났었지만, 내가 전장에 등장하기만 하면 폭주해 달아나버리는 동물들 때문에 일망타진되곤 했지.”
그 강력한 스킬을 제르비어스는 푸르가토리움이라는 감옥 안에서 극히 제한적인 방식으로 사용해왔다.
“나는 동물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마기를 내뿜는 내 신체 때문에 덤벼드는 경우가 많았거든. 그래서 정신지배 능력으로 설득했다.”
나는 너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너 역시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마왕은 그래서 화룡도의 헬코마타나 삼월초원의 독수리들을 손쉽게 반려수로 길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본래는 사역마를 만들어내는 용도로 개량된 기술이다. 이 스킬이라면 저 덜 자란 여우 녀석의 봉인된 기억도 엿볼 수 있을지 몰라.”
동물에게만 먹히는 정신지배.
구미호는…… 해석의 여지에 따라서 동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지배로 캉이의 비밀을 파헤친다…….”
나는 그 발상이 이 골치 아픈 상황의 돌파구를 만들어 줄 수 있을지 계산해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이것은 ‘신의 한 수’가 될 잠재력이 농후했다.
다만 아스티나가 마왕의 앞을 비장하게 막아섰다.
“제르비어스, 캉이는 고양이나 독수리가 아니야. 복잡한 자아와 섬세한 정신을 갖고 있다고. 그런 존재에게 사용하기엔 너무 위험한 기술 아닐까? 오직 위험할 수 있단 이유로 아이들을 다음 층으로 데려가선 안 된다고 주장했던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러자 제르비어스는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나 혼자였다면 망설였을 거야. 하지만 이 용사 놈은 친구를 맺은 대상의 기술을 그대로 따라 쓸 수 있잖아. 우리 둘이 동시에 정신지배를 걸면 캉이의 내면이 다칠 확률은 거의 없다.”
제르비어스가 캉이에게 정신지배를 걸어 자신에게 주목하도록 만든 후, 무방비해진 아이의 봉인된 기억에 도둑처럼 내가 침투한다는 작전이었다.
“나를 믿어라, 아스티나. 캉이에게 명령해서 다른 죄수들을 죽이라거나, 이성을 잃고 폭주하게 만들려는 게 아니잖아. 관찰만 하고 오는 거야. 어쩌면 이 방법으로 캉이를 다음 층으로 안전하게 데려갈 수 있는 묘안을 찾을 수도 있어.”
캉이와 함께 층을 오른다.
제르비어스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왜 생각이 변한 거야?”
“아무리 무방비 상태에서 기습을 당했다고는 해도, 캉이는 나를 일격에 기절시켰다. 용을 제외한다면 그런 파괴력을 가진 생물을 상상하기 어렵군. 만약 그 정도의 괴력을 뜻에 따라 컨트롤할 수만 있다면…… 분명 든든한 전력이 될 거다.”
*
“눈싸움 놀이라고?”
캉이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새로운 놀이를 가르쳐주겠다고 한 내 말을 받아들였다.
“응. 서로의 눈을 쳐다보다가 먼저 눈꺼풀을 깜빡이거나 딴 곳을 바라보는 사람이 지는 거야. 어때?”
“좋아! 재밌을 것 같아.”
여우굴의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한바탕 눈싸움 대전이 일어났다.
먼저 내가 캉이와 눈싸움을 시작했다.
그리고 일부러 졌다.
“어이쿠! 눈에 뭐가 들어갔네.”
“아하하! 슈바인 형아, 눈싸움 되게 못해!”
그러자 작전대로 제르비어스가 팔짱을 낀 자세 그대로 캉이 앞에 주저앉았다.
“나는 좀 다를 거다, 꼬맹아. 덤벼라.”
캉이는 지지 않겠다는 듯 눈을 부릅뜬 채 제르비어스와 눈싸움을 시작했다.
하지만 마왕의 붉은 눈동자가 번쩍하고 빛을 터트리자 영화 맨인블랙의 최면광선을 마주한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성공이다, 용사야. 최면에 걸려들었어.”
그 직후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캉이 뒤에 일렬로 앉아 순서를 기다리던 아홉 명의 아이들의 몸이 신기루처럼 사라진 것이다.
대신 캉이의 정수리에 하얀 털로 만들어진 두 개의 귀가 뿅! 하고 솟아났다. 그리고 엉덩이에는 아홉 개의 앙증맞은 꼬리가 넘실대고 있었다.
그것을 본 아스티나가 입을 틀어막았다.
“큭. 너무 귀여워. 껴안고 볼을 부비고 싶…….”
“물러서, 아스티나. 그랬다가 최면 상태가 풀릴지도 모르잖아.”
자신도 모르게 캉이를 덮치려던(?) 아스티나는 입맛을 다신 채 물러섰다.
나는 제르비어스가 알려준 대로 캉이의 연약한 어깨에 손을 짚었다.
지정대상의 육체에 접촉할 경우 더 수월하게 정신지배에 성공할 수 있다고 제르비어스가 설명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럼 시작한다.”
나는 눈을 감고 처음 써보는 기술에 온 마음을 집중시켰다.
[친구 제르비어스 폰타인의 스킬을 빌려옵니다.]
[정신지배 Lv. 3]
[친구와의 동조 효과로 스킬 레벨이 소폭 향상되었습니다.]
*
[본인보다 강고한 자가 펼친 술법과 접촉하였습니다.]
[용사의 심안이 캉이에게 술법을 건 상대의 회한을 엿보게 합니다.]
황제의 궁이 불타고 있었다.
수십 개의 으리으리한 전각이 화마에 집어삼켜지고 있었고, 황궁의 병사들이 그 불을 끄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나는 전지적인 시점으로 그것을 관찰하고 있었다.
‘여기가 황제의 궁이라는 걸 어떻게 아는 거지?’
신기한 마음이 들었으나 이내 그 호기심은 잦아들었다. 내가 ‘엿보기’하는 대상이 가진 기억이 많은 것을 들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의 기억인지 알고 싶어.’
그러자 공중에서 광각 시야로 진행되던 영상이 급변했다. 카메라의 줌이 급격히 당겨지듯 내성의 성벽 위를 달리던 한 여인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
캉이의 머리색과 같은 흑발을 휘날리는 젊은 여인.
경국지색의 아름다운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뱃속에 자리 잡은 아이의 존재 때문이다.
‘캉이의 엄마로구나.’
영상에선 가녀린 체구를 가진 여인처럼 보였으나 그것은 뛰어난 둔갑술에 의해 만들어진 모습이다.
호이란.
그것이 아홉 꼬리 일족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요력을 갖고 태어난 구미호의 이름이었다.
호이란은 지금 필사적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변신하여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다면 이 황궁에 거하는 모든 병사가 덤벼들어도 한 끼 식사조차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봉래산(蓬萊山)의 일족은 하계의 인간들에게 본 모습을 들킨 구미호를 절대 받아들여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호이란이 둔갑을 해제하지 않고 달아나고 있는 이유다.
휘리릭!
누군가 뛰어난 경신술로 성벽 위를 날아올라 호이란의 앞을 막아섰다.
황금의 갑주를 온몸에 걸친 미남자였다.
사내가 투구를 벗더니 슬픈 얼굴로 물었다.
“부인, 어찌 일언반구도 없이 달아나는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