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8. 망국의 짐승 (1)
증식하는 밀림의 뱀이 또 나를 잡아먹는다느니 마느니 하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나는 지면에 내려선 다음 쓰러진 캉이를 향해 달려갔다.
“캉이야!”
다행히 어디에도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나는 기절한 캉이를 들쳐 메고 아스티나를 향해 달려갔다.
흑기사의 갑옷을 해제한 그녀는 탈진한 채 주저앉아 있었다.
“이번엔 진짜 아찔했어.”
“그래. 그래도 다행히 우리 넷 모두 죽은 사람은 없잖아?”
나는 엎드려 있던 제르비어스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그만 일어나, 이 자식아!”
그러자 땅에 처박혀 있던 마왕의 뿔이 삐쭉 하고 솟아올랐다.
“푸학! 뭐야? 무슨 일이냐!”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던 제르비어스는 엉망이 되어버린 굴을 보더니 망연자실해했다.
그러다가 곧 정신을 차렸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너희가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캉이의 신체에 이상한 변화가 일어났다. 붉은 기운이 방 안에 가득 차더니 누워 있던 채로 캉이의 몸이 떠오르지 뭐냐.”
그게 변신의 전조 증상이었을까.
“하지만 캉이를 붙잡았다가 마족의 저주가 상황을 더 악화시킬 것이 두려웠어. 그런데 다음 순간 붉은빛이 폭발하더니…… 뭔가 거대한 것이 내 몸을 깨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제르비어스는 의식을 잃은 것이다.
녀석의 설명을 듣고 난 후 나와 아스티나 또한 그동안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해줬다.
인간의 형태를 한 채 모여 있던 죄수들.
그들이 일식을 예감하며 달아났고, 굴로 돌아왔을 때는 거칠게 날뛰는 구미호가 우리를 공격해 왔다는 것. 일식의 유지시간이 10분만 더 길었어도 마왕은 영원히 깨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단 것 등.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제르비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수림은 교도관의 성역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해가 떠 있을 때는 죄수들이 야수로 변하고…… 해가 감춰지는 일식이 시작되면 거꾸로 캉이가 구미호로 변한다는 건가?”
“그렇게 되겠지. 죄수들과 캉이는 변신하는 동안엔 서로의 사냥꾼이 되고…… 인간 상태일 때는 사냥감이 되는 거야.”
이런 불가사의한 대치가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었을지 생각하면 아찔했다.
그런데 제르비어스가 더 중요한 지점을 짚어냈다.
“그렇다면 용사야, 캉이가 구미호에서 다시 인간으로 되돌아왔다는 건…… 달아났던 죄수들이 이제는 야수로 변신해 있다는 뜻 아니냐?”
때마침 대수림의 북쪽 숲에서 까마득한 포효가 터져 나왔다.
횃불을 든 채 달아나던 죄수들이 일제히 트랜스 상태로 접어든 것이다.
아스티나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지금…… 저 녀석들이 한꺼번에 몰려들면 어쩌지?”
구미호의 폭주로 인해 굴을 안전하게 지켜주던 붉은 돌의 바리케이드가 대부분 뜯겨나가고 없었다.
나와 아스티나는 구미호와 맞서느라 체력과 마력을 진탕 소진시키고 난 뒤였다.
맞서 싸울 수가 없는 상황이다.
“나는…….”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형아, 지금부터 내 말을 들어.”
내 등에 업혀 있던 캉이가 훌쩍 뛰어내리며 말했다.
아스티나와 제르비어스도 정신을 차린 캉이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야만 했다.
“캉이야, 이제 괜찮아진 거야?”
“응. 두통도 없어졌고, 몸도 가뿐해. 재밌는 꿈을 꾼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캉이의 모습에 나와 아스티나는 숨을 죽여야만 했다.
설마 구미호였을 때의 순간들을 기억하는 걸까?
“헤헷. 기억이 안 나네. 하늘을 날았던 것 같기도 하고.”
다행히 휘발된 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캉이는 변신 순간에 있었던 일을 망각해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꿈을 꾸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대장 괴물이 왔었던 거지?”
캉이의 맑은 동공을 외면하지 못한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응. 밖에는 야수들이 몰려오고 있어. 하지만 붉은 돌이 턱 없이 부족해.”
“괜찮아, 형아. 나를 따라 와.”
캉이는 주변을 살피더니 뭔가를 발견하고는 오도도도 달려갔다. 우리 셋은 서로 시선을 한 번 교환한 다음 캉이의 뒤를 따랐다.
“여기 봐, 빨강이가 잔뜩 있지?”
그랬다.
캉이가 구미호로 변신했을 당시 여우트림을 내쏘았던 궤적이 우리 앞에 있었다.
구미호가 입에서 내쏜 광선포가 숲에 만들어낸 끝없는 구멍.
그 지면 위에 붉은 돌이 결정을 이룬 채 열매처럼 맺혀 있었다.
“이걸 따서 주변에 뿌리면 돼!”
캉이는 쓰러져서 열병을 앓을 때마다 이 과정을 반복했었던 걸까.
우리는 금세 봇짐 다섯 개를 꽉꽉 채울 만큼의 붉은 돌을 획득할 수 있었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세 차례 야수들이 굴의 바로 근처까지 침범해 들어왔으나 아스티나와 내가 붉은 돌을 탄환처럼 발사해 물리칠 수 있었다.
*
그 이후 며칠 동안 캉이에게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는 과정은 복잡한 심경을 가져다주었다.
구미호로 변신했던 이후 캉이의 기억은 분명 희한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어떤 것은 정확히 기억해내는 반면 어떤 것은 안개 속을 더듬는 것처럼 떠올리지 못했다.
제르비어스와 아스티나는 열심히 여우굴 바깥의 붉은 돌을 채취했다. 그것으로 야수들을 저지하는 바리케이드를 수복하자 이전보다 더 빈틈없는 철옹성이 만들어졌다.
“형아가 굴을 파는 걸 도와주겠다고?”
“응. 형아는 사실 땅을 파는 데엔 일가견이 있거든.”
거짓말이었다.
바닷가의 백사장에서 두꺼비집 하나 만드는 것도 제대로 못했던 나다.
그러나 지금은 캉이와의 ‘친구’ 효과로 마치 수십 년간 맨손으로 땅굴을 파왔다고 해도 믿을 만큼의 솜씨를 발휘할 수 있었다.
[친구 캉이의 스킬을 빌려옵니다.]
[땅굴파기 Lv. 3]
[친구와의 동조 효과로 스킬 레벨이 소폭 향상되었습니다.]
내 팔과 다리의 길이는 캉이의 두 배에 가까웠다.
그래서 내가 먼저 성인이 수월하게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굴을 파면, 캉이는 내 뒤를 따라오다가 본능적으로 맥을 짚어 샛길을 뚫었다.
‘변신 후 기억이 날아가 버리는데도 땅굴을 파는 기술 같은 것은 잊어버리지 않고 있어. 장기 기억이기 때문인가.’
흠잡을 데 없는 여우굴이 완성되었다.
그러자 곧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캉!”
“캉!”
숲 속 어딘가에서 사라졌던 캉이의 친구들이 하나둘 귀환한 것이다.
얼굴엔 땟국물이 묻어 있고, 허름한 옷을 입은 채로.
“괜찮아! 여기는 안전해. 우리는 이제 친구가 되는 거야.”
캉이는 난생 처음 보는 아이들을 사귀는 것처럼 친구들을 받아들였다.
스스로 굴을 찾아오는 아이도 있었지만, 캉이가 마치 계시를 받은 것처럼 굴을 박차고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 적도 있었다.
“어디라고 했지?”
“이 근처야. 분명히 비명소릴 들었어.”
“캉!”
캉이의 인도로 달려간 곳엔 어김없이 한 아이가 야수들에게 쫓기고 있거나, 수풀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숨어 있었다.
이번에도 숫자는 아홉.
굴속이 복작복작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캉이는 친구들의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더 환하게 웃는 일이 많아졌다.
어느 날 캉이와 친구들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아스티나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잘못 본 게 아니었어. 비율이 달라.”
“비율? 무슨 비율?”
“우리가 처음 이 애들을 만났을 때. 그때는 여자아이가 두 명이었어. 그런데 이번엔 네 명으로 늘어났어.”
“정말 그렇네?”
“저 아이들이 우리가 잃어버렸던 그 아홉 명의 아이들과 동일인물일까?”
캉이는 친구들과 옹기종기 모여 붉은 돌로 공기놀이를 하고 있었다.
“재밌어, 캉이야?”
“응! 캉이들이 새로운 놀이방법을 알려줬어!”
공기놀이는 분명 일전에 내가 가르쳐 준 것이었다.
하지만 캉이는 그것을 기억해내지 못했고, 돌아온 아이들이 알려줄 때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여우굴에 다시 평화로운 일상이 돌아왔지만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 표백되고 덧칠된 괴이한 현상임에 틀림없었다.
아이들이 새총 쏘는 연습을 하다 지쳐서 잠들었을 때.
굴 바깥에 모인 세 어른들은 심각한 얼굴로 의견을 나눴다.
내가 먼저 포문을 열었다.
“캉이를 제외한 아이들의 정체에 대해서 짐작 가는 바가 있어.”
“뭔데?”
“그 아이는 구미호야. 아홉 개의 꼬리를 가진 영물이지. 내가 살면서 봐온 온갖 민담과 전설에 나오는 구미호들은 아홉 개의 목숨을 가졌다는 전승이 있어.”
한 개의 꼬리마다 한 개의 목숨.
물론 이 푸르가토리움에서 만난 인외의 존재들이 지구인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구미호와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다.
하지만 그럴 것이라는 가정 하에 이야기를 진행시킨다면 갑자기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아이들의 수수께끼를 풀어낼 수 있다.
“나는 캉이가 내게 해줬던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었어. 혼자 야수들에게 쫓기다가 ‘누군가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빌었을 때 첫 번째 친구가 나타났다고 했지.”
그것은 어쩌면 천년을 사는 구미호의 고유 술법인 분신술이 아닐까. 꼬리 하나를 사람으로 둔갑시켜 옆에 두는 분신술.
“그러니까 아이들이 모두 캉이와 비슷한 나이대에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 캉이를 원본으로 복사한 ‘분신’이니까.”
캉이와 친구들이 서로 대화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못내 궁금했다.
푸르가토리움의 죄수들은 온 우주에서 붙잡혀온다. 사용하는 언어가 제각기 다름에도 서로 대화하는 것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0층의 교도관 나태에 짓눌린 쥐가 감옥 전체에 유효한 소통의 권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어째서 ‘캉!’이라고만 외치는 아이들의 말을 캉이는 전부 알아들을 수 있는데, 우리에겐 통역이 되지 않는가. 이 의문도 아이들이 캉이의 분신이라면 설명이 돼.”
대화처럼 보이지만 대화가 아니다.
자신이 만들어낸 분신과의 대화.
즉, 캉이의 속마음이기에 캉이 본인만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제르비어스가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듣고 보니 용사, 네 말이 전부 맞는 것 같다. 캉이가 구미호로 변신하기 전의 징조를 생각해 봐. 아이들이 하나둘씩 사라졌지. 결계에도 잡히지 않는 신기루처럼. 분신술이 하나씩 해제되어 본체와 융합한 거겠군.”
아스티나 또한 내 가설에 반론을 제기할 지점이 없다고 했다.
반면, 그녀는 캉이의 분신술보다 변신 후 기억을 잃어버리는 점을 우려했다.
“내 생각엔 캉이의 기억에는 어떤 마법이나 주술이 걸려 있는 것 같아. 구미호로 변신하고 나면 어떤 기억들은 날아가고 어떤 기억들은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 습득하잖아.”
“포맷은 아니야. 그렇다면 우리를 만났던 순간을 기억할 수 없었을 테고, 야수왕의 모습을 벽화로 그린 경험 같은 것도 날아갔을 테니까. 어쩌면 언어도 기억하지 못해야 정상이지. 이건 리셋이야. 특정 기억은 저장되지 않고 초기화되는 거야.”
“포맷? 리셋?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슈바인. 쉽게 설명해 줘.”
“미안. 나도 모르게 고향에서 쓰던 어휘를 써버렸네. 그러니까…… 변신 후 휘발되어 버리는 기억과 그렇지 않고 각인되는 기억이 구분되고 있다는 거야. 나는 그 점에서 누군가의 분명한 ‘의지’가 느껴지거든.”
아스티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캉 본인이 아니라면 누구의 의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