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 은둔자의 해방 (3)
“으으으으으.”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서자 열댓 명의 죄수들이 일렬로 누워 있었다. 마치 전쟁통에서나 볼 수 있는 부상 병동 같은 느낌이었다.
“제가 좀 살펴봐도 되겠어요?”
그러자 탄탄한 몸집을 가진 한 여성 죄수가 내 앞을 막아섰다.
“외부인이 동지를 만지도록 놔둘 수는 없습니다. 물러서십시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 여성 죄수를 마주보았다. 결의에 찬 얼굴에서 동료를 생각하는 진심을 엿볼 수 있었다.
물론 그녀의 무력은 보잘 것 없었다.
위력적인 스킬을 사용할 필요도 없이 내가 한 번 걷어차기만 해도 내장이 터져 사망할 정도의 수준이다.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식은땀을 보면 당사자도 이런 격차를 무의식중에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우두머리 사내가 나섰다.
“물러나세요. 어쩌면 이자가 이 불가사의한 증상에 대한 답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하지만 촌장님.”
“동지들이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쓰러진 지금 상태에서 야수가 덮쳐온다면 우리는 제대로 피신할 수조차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생각보다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인 여성 죄수가 옆으로 물러섰다.
나는 촌장에게 고개를 끄덕인 후 한 죄수 앞에 꿇어앉았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끙끙 앓고 있는 모습.
‘설마 캉이와 같은 질병에 걸린 걸까.’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자 캉이와 아이들이 보여준 징후와는 분명히 다른 점이 있었다.
이곳에 쓰러져 있는 죄수들의 신체부위 곳곳에는 붉게 달아오른 상흔이 있었다.
‘화상인가? 아니야. 뭔가가 달라.’
나는 지켜보고 있는 죄수들을 자극하지 않도록 차분한 동작으로 단탈리온을 꺼내들었다.
“이 증상의 정체는 뭐야, 단탈리온?”
- 이 죄수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캉이와 다른 아이들에게 걸린 주박과 종류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고위 마족과의 접촉으로 생긴 저주가…….
그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거칠게 붙잡았다.
“뭡니까. ……아스티나?”
아스티나가 여전히 글자를 출력해내고 있는 단탈리온을 손바닥으로 슬쩍 덮은 뒤 내게 눈짓했다.
- 급하게 할 얘기가 있어, 슈바인.
- 왜 말로 하지 않고 귓속말의 권능을 쓰는 거야?
- 다른 죄수들에게 알리면 곤란해질 내용이니까.
아스티나는 내 뒤를 따르지 않고 바깥에서 야수들의 접근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죄수들이 나뭇가지를 잘라 와서 봉화에 계속 장작을 던져 넣는 것을 목격했다.
- 나는 죄수들한테 물었어. 어째서 우리가 왔는데도 불을 계속 키우느냐고. 그러자 이상한 대답을 들었어. 이 사람들은 구조 요청을 위해 봉화를 피운 게 아니야. 다가올 어떤 순간에 대비하기 위해서 모닥불이 필요했던 거지.
- 모닥불? 하지만 해가 지지 않는 열대의 밀림 안에서 왜 모닥불이 필요하다는 건데.
- 나는 줄곧 의아했어. 우리가 이 피라미드까지 날아오면서 대수림의 움직임이 전혀 없었거든. 모든 야수들이 제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지 않는 한 설명이 안 돼.
- 우리는 최대 속력으로 비행해 왔잖아. 너무 빨리 지나치느라 야수들의 이동을 놓친 걸 거야.
- 우리가 여기서 봉화를 피웠을 때를 생각해 봐. 검은 연기를 보고 야수들이 잔뜩 몰려왔었지.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런 기미가 없어.
그때, 아스티나의 손바닥 밑으로 단탈리온이 계속 만들어내고 있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 ……이곳의 죄수들은 현재 복합적인 저주 상태에 걸린 겁니다. 무의식 속에서 자신의 트라우마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군요. 이런 상태로 죄수들을 몰고 간 것은 폭렬마왕 제르비어스 폰타인. 바로 용사님의 동료이신 그 마왕과 직접적으로 접촉했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섬뜩한 느낌이 목덜미를 타고 올라왔다.
나는 여전히 간절한 기대를 갖고 나를 쳐다보고 있는 촌장과 그의 주변에서 초조해하고 있는 죄수들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았다.
쓰러진 죄수들을 이렇게 만든 것이 제르비어스라고?
전혀 연결될 것 같지 않던 몇 개의 조각들이 절묘하게 접합하며 어떤 추리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화신체를 거둬들인 교도관.
봉화가 계속 연기를 피워대고 있음에도 습격하지 않는 야수들.
마왕과 접촉해야만 걸리는 저주 상태에 빠진 죄수들.
나는 쓰러진 죄수들 중에서 제법 덩치가 큰 사내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가 다른 죄수들과 달랐던 점은 목덜미와 대흉근이 달아오르고 있단 점이었다.
용사의 심안이 그의 이름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름: 갈가베니온]
[형량: 467년]
낯익은 이름.
3층 대수림에 처음 떨어졌을 때 개울가에서 마주쳤던 라이칸스로프의 이름과 같았다. 그 늑대인간의 형량도 딱 저만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제르비어스는 그때 분명히 갈가베니온의 등에 올라타 목을 졸랐었다.
- 슈바인, 야수들이 없어진 게 아니야.
아스티나의 귓속말이 더욱 은밀해졌다.
- 여기에 있는 죄수들이…… 바로 그 야수들이었어.
*
아무런 말도 통하지 않았던 밀림 속 야수들.
우리들을 잡아먹기 위해 침을 흘리며 나무 사이를 달려오던 짐승들이…… 지금은 인간의 모습을 한 채 나와 아스티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갑자기 내 호흡이 부자연스러워졌다.
“왜 그러십니까. 우리 동지들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요?”
아스티나와 내가 굳은 얼굴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만 있자 촌장이 이렇게 물어왔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선량한 책임감으로 가득했다. 식탐에 미쳐버린 야수로서의 기색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우릴 기만하는 것 같진 않아.’
트랜스 상태. 즉 야수화되었을 때의 기억은…… 날아가버리는 건가.
생각해보니 이들이 야수 상태의 기억을 갖고 있었다면 나와 아스티나를 알아봐야 마땅했다. 대수림에서 기나긴 시간 추적했던 사냥감의 모습을 몰라봐서는 안 된다.
나는 일단 둘러대기로 했다.
“제가 의사는 아니지만…… 쓰러져 있는 분들은 질병에 걸린 게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 기운을 되찾고 일어설 수 있을 거예요.”
내 경우엔 그랬다.
저주 상태에서 직면하는 트라우마가 당사자에겐 연거푸 죽음을 되풀이하는 수준의 끔찍한 경험이겠지만 물리적인 위해를 가하진 않는다.
다만 정신을 좀 파괴할 뿐.
“그렇습니까. 우리는 원래 이렇게 긴 시간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숲을 유랑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야수의 습격으로부터 몸을 지킬 수 없으니까요.”
“……혹시 다른 초능력을 가진 분은 없습니까? 이빨이 자라난다거나 근육이 부풀어 올라 괴력이 생긴다거나요.”
넌지시 돌려 한 말에 촌장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럴 리가요. 만약 그런 힘이 있었더라면 이토록 무력하게 야수를 피해서 달아나는 유목 생활을 하진 않았겠지요.”
촌장의 말에 다른 죄수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들을 이토록 공포에 몰아넣고 있는 야수의 정체는 무얼까.
“당신들을 쫓아온다는 그 야수들의 숫자는 얼마나 되지요?”
“네?”
“제가 뭘 잘못 물었습니까. 야수들의 습격 때문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다고 하셨잖아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야수들이라니요.”
촌장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숲 속의 야수는…… 오래 전부터 단 한 마리였습니다.”
“한 마리요?”
내가 뭔가를 더 물으려 할 때, 피라미드 바깥에서 거대한 소란이 일었다.
공포에 질린 죄수들의 웅성거림이었다.
“촌장님! 시작되었습니다.”
“달아나야 합니다. 야수가 이곳으로 올 겁니다.”
바깥에 있던 죄수들이 허겁지겁 피라미드 내부로 달려 들어오며 외쳤다.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면서 말이다.
촌장의 낯빛이 파리해졌다.
“제기랄. 너무 오랜 시간 지체했어.”
그가 곧 일사불란하게 다른 죄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쓰러진 동지들을 모두 업으십시오! 한 명도 빠짐없이 여기서 달아나야 합니다.”
나와 아스티나는 이제 안중에도 없다는 듯 죄수들이 쓰러진 동료들을 업거나 부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촌장의 뒤를 따라 피라미드를 빠져나갔다.
“슈바인,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글쎄. 일단 따라가 보자.”
피라미드 바깥으로 나가자 죄수들이 봉화 가까이 모여 있었다. 누군가를 업지 않은 죄수들이 나뭇가지에 불을 붙여 ‘횃불’을 서로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나는 기감을 최대로 펼쳐 주변을 탐지했다.
그러나 그 어떤 생명체도 피라미드 주변에서 느껴지지 않았다.
완전한 무풍지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죄수들은 모두 닥쳐올 폭풍을 확신하는 듯 보였다.
나는 촌장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죠?”
“그 빌어먹을 야수가 활개 칠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 숲에 어둠이 찾아오면 활동을 시작한단 말입니다.”
어둠이라니?
단 한순간도 해가 떨어지지 않는 이 대수림에 무슨 어둠이 찾아온다는 말인가.
그때, 나는 평소보다 주변이 미세하게 ‘덜’ 밝게 느껴진다는 걸 깨달았다.
내 옆에서 긴장하고 있는 아스티나의 머리카락은 늘 태양빛을 반사해 반짝이고 있었는데, 그 색깔이 평소보다 더 낮은 채도였다.
우리가 봉화로 착각했던 모닥불.
죄수들은 어째서 불을 피우고 있었나.
자연 상태에서 불이 필요한 경우는 3가지다. 요리를 하거나, 몸을 데울 고온이 필요하거나, 어둠을 밝힐 빛이 필요하거나.
앞의 2개는 답이 아니다. 이 감옥의 생명체들은 먹지 않아도 되며, 체감 40도를 웃도는 열대 기후에 불씨로 체온을 유지할 필요도 없다.
불빛이 필요한 거다. 정확히는 불빛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거야.
해가 떠 있을 때도 밤이 오는 순간이 딱 한 경우 존재한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째앵.
여전히 태양은 천공의 한복판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전과는 분명히 다른 차이점이 느껴졌다. 일종의 직감에 가까웠다.
“아스티나, 청룡패웅검을 잠깐 빌려줄래?”
그녀에게서 받아든 검을 역수로 쥐었다. 그리고 손잡이 끝에 박혀 있는 월장석을 눈가에 가까이 대고 태양을 직시했다.
그러자 선글라스를 낀 것처럼 태양의 형태가 또렷이 망막을 파고들었다.
아주 미약했으나 오른쪽에서부터 태양이 먹혀들어가고 있었다.
‘영원토록 대낮이 유지되는 게 아니었어.’
3층 대수림의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층에 어둠을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천문현상이 있었다.
일식(日蝕).
해를 좀먹는 달. 달의 공전궤도가 태양과 완벽히 겹쳐지는 우주적 이벤트인 개기일식이 벌어지고 있었다.
불현듯 뇌신 지드의 수수께끼가 떠올랐다.
‘훔쳐갈 수 없는 것이 도난당했을 때.’
언제나 변함없을 것이라 믿었던 태양이 ‘빛’을 도난당했을 때,
‘층장의 은둔은 해제될 것이다.’
수수께끼는 바로 이 순간을 암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르르르르릉.
거대한 지진파가 대수림 전체를 덮쳤다. 의식을 잃은 채 동료에게 업혀 있던 몇몇 죄수들이 땅에 떨어졌다.
촌장이 발악하듯 외쳤다.
“나를 따라오시오! 놈이 출몰합니다.”
숲 속으로 몸을 내던진 촌장의 뒤를 죄수들이 민첩하게 따라붙었다. 호랑이의 냄새를 맡은 얼룩말들의 대이동을 보는 듯했다.
그들의 뒤를 따라붙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믿을 수 없는 메시지가 눈앞을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