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 뜻밖의 면회 (4)
뇌신 지드가 만들어낸 심상세계.
그와 나는 단단한 모래바닥을 딛고 서 있었다. 정갈하게 다져진 지면에는 검붉은 자국이 곳곳에 그려져 있었다.
비릿한 피냄새가 난다.
언제였던가, 한 번 이곳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지드, 나는 이제 뭘 하면 되지?”
“아무것도. 내 초대를 받아들인 순간 그대의 역할은 끝났어. 앞으로 벌어질 일을 느긋이 기다리면 된다네.”
그곳은 거대한 검투장이었다. 관객석은 텅 비어 있었지만 그 압도적인 위용 때문에 나 자신이 초라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여기가 당신이 있던 세계야?”
“아니. 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 재료는 내 쪽에서 뽑아온 게 아니야. 그대에게 가호를 내리고 있는 존재로부터 가져온 것이다.”
동시에 내 손등에 있는 사자 문신에서 광휘가 터져 나왔다. 파천황과 계약한 순간 새겨진 문신이 이렇게 반응한 것은 처음 있는 일.
쿠르르릉.
강철 도르래가 만들어내는 격철음이 귀를 시끄럽게 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검투장 한쪽 벽면에서 거대한 철제문이 열리고 있었다.
통로에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압도적인 풍채.
태산이 움직이는 것만 같은 존재감.
정면에서 얼굴을 관찰한 적은 없었지만 나는 그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르팔타커스 시온?”
마른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빠른 속도로 몰려들었다. 그 구름에서 천둥번개가 내리치더니 지드의 오른손바닥에 내리꽂혔다.
파직. 파직.
전격이 용솟음치는 기다란 창을 뽑아든 지드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수왕.”
죄수들의 왕.
까마득히 오래 전 푸르가토리움의 꼭대기층인 9층까지 등반에 성공했으나, 끝내 탈옥은 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만전불패의 검투사.
“그래, 나는 전성기의 수왕과 싸워보고 싶어서 그대를 찾아온 거야.”
벼락으로 이루어진 그의 머리카락이 더욱 기승을 부렸다.
“예언 따위 내 관심사가 아니야. 자신이 왕이 될 상인지 알아보려면 응당 첫 번째 왕과 겨뤄봐야 하지 않겠나.”
르팔타커스는 출전 명령을 받은 검투사처럼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상반신의 절반을 가리는 견갑에 양 주먹에는 붕대와 징이 박혀 있다.
‘0층 대기실에서 보았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신격이 만들어낸 심상세계이기 때문일까.
파천황은 전성기 시절의 무력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를 소환해 낸 상대가 그것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그대는 관객석에서 구경하고 있도록. 좋은 공부가 될 테니까.”
틱.
지드가 손가락을 튕기자 나는 콜로세움의 관객석으로 옮겨졌다.
10만 명은 너끈히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은 관객석에 앉아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었다.
그러나 모래 위에 선 둘은 관객의 유무와 상관없이 오직 상대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르팔타커스의 걸음이 멈추었다.
뇌신 지드와의 거리는 대략 30미터.
쿠오오오오.
르팔타커스가 바닥을 향해 손을 뻗자 모래폭풍이 일더니 무언가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검.’
나는 처음으로 르팔타커스 시온이 사용했던 무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게 되었다.
그것은 그의 체구에 걸맞은 대검이었다. 손잡이에서 폼멜로 이어지는 부분은 용맹한 사자가 조각되어 있었다. 흑사자가 검신을 입에서 토해내는 것 같은 위용.
뇌신 지드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영광이오. 파편 상태가 아닌 기원검을 이렇게 견식할 수 있다니. 어디 그 위력도 그만큼 대단할지 볼…….”
파지직.
다음 순간, 지드의 왼쪽 상반신이 없어졌다.
말 그대로 지우개로 지워진 것처럼 날아가 버린 것이다.
르팔타커스의 자세는 내가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검을 휘두른 동작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떤 연결동작이었는지 감히 추측할 방도도 없었다.
[만전불패의 체술. Lv. Max]
[만전불패의 검술. Lv. Max]
용사의 심안이 르팔타커스의 현재 상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만전불패의 체술이 극의에 이르면 인지를 넘어선 공격마저 내뿜을 수 있는 것이다.
입술의 절반이 날아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지드는 기뻐했다.
“좋구나! 바로 이런 짜릿함을 기대했어.”
금세 본래의 신체를 수복해 낸 지드가 요격 자세를 취했다. 왼팔을 앞으로 뻗은 채 창날을 엄지와 검지 사이에 얹어 놓는다.
그의 창끝이 의지를 가진 생물처럼 흔들린다고 느낀 찰나,
검투장 중앙에서 대형 폭발이 일어났다.
꽈아아아아앙!
신격에 다다른 두 죄수가 서로를 쓰러트리기 위해 마음껏 힘을 개방했다.
‘망할 자식. 좋은 공부가 될 거라고?’
지드가 창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신벌이 내린 것처럼 응축된 벼락이 터지며 르팔타커스를 몰아세웠다. 그러나 파천황의 대검은 풍참만으로 그것을 모두 베어내는 데 성공했다.
터져 나오는 광휘의 서커스에 눈을 감지 않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심력이 소모되었다.
꽈르릉! 우르릉!
드넓은 검투장 이곳저곳에서 벼락이 쉴 새 없이 치는데, 무언가가 번쩍하는 순간에만 비치는 잔상을 통해 둘의 위치를 포착할 수 있었다.
대검을 휘두르는 르팔타커스.
그것을 창으로 받아내는 지드.
어지러웠다.
초당 24프레임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1초에 1프레임씩 잘라낸 괴작을 관람하는 기분이었다.
‘젠장. 이래서야 공부가 될 리가 없잖아. 누가 이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더 이상 한 줌의 벼락도 검투장에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난 싸움이 끝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래먼지가 걷히자 검투장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르팔타커스의 옆모습이 보였다. 대검을 쥐지 않은 그의 왼손에는 잘려진 지드의 목이 들려 있었다.
그것을 무심히 떨군 르팔타커스는 쇠징이 박힌 부츠로 지드의 머리통을 박살냈다.
콰지익!
‘죽은…… 건 아니겠지?’
르팔타커스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런 말없이 자신의 검으로 나를 가리키더니 다음 동작으로는 위를 가리켰다.
전음 같은 것은 전달되지 않았어도 나는 그 동작에 담겨진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후인이여, 위로 올라가라.’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역할을 다한 심상세계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검투장 전체가 먼지가 되어 사르륵 사라졌다.
*
주변 풍경이 다시 대수림으로 바뀌었을 때, 나는 황급히 누군가를 찾았다.
뇌신 지드는 체통도 없이 털퍼덕 주저앉아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보이는가.”
“표정은 만족해 보이는데.”
“개운하긴 하군. 사실 이길 수 있을 거라곤 믿지 않았다. 그래도 몇 번 궁지에 몰아넣을 순 있지 않을까 싶었지. 그런데 온 힘을 다한 파천황의 용력은 실로 대단하더군. 구전되어 내려온 전설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어.”
나는 솔직히 고백했다.
“실은 당신들의 대결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두 눈으로 보고서도 이해가 안 됐어.”
“아, 그럴 수밖에. 그대는 아직 파천황의 수준에 까마득히 못 미치니까.”
지드는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키더니 방금 전의 대결이 어디에서 승부가 갈렸는지 일깨워주었다.
“슈바인 스트링거. 생명체가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지 알아? 쉽게 말해서 그대가 손가락을 까닥거리는 원리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느냐는 말이지.”
“그거야 내 뇌가 명령을 내리기 때문이잖아. 손가락을 움직이라고.”
“맞다. 그런데 지금도 움직일 수 있나?”
나는 오른손의 검지를 움직여보려 했다. 그런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손가락을 지켜보는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드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방금 나는 그대의 뇌가 신체에 전달하는 전기 신호를 내 지배하에 두었어. 통상의 진화과정을 거친 생물체는 뇌신 앞에서 제대로 움직이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거지.”
극도로 섬세한 술식.
상대의 몸속에 흐르는 미약한 전기 신호마저 통제할 수 있는 전법이 뇌신 지드의 싸움법이었다.
그런데 파천황 르팔타커스는 그것을 정면에서 깨부쉈다.
“그가 무슨 수로 내 통제를 가뿐히 물리쳤는 줄 아나? 체내의 오러 코어(Aura Core)를 가동 범위 이상으로 돌려서 폭발시켰어. 몸속에 숨어든 벼룩을 죽이기 위해 폭탄을 터트린 거나 다름없지.”
그 타이밍에서 지드는 혀를 내둘렀다.
“넋이 나갈 만큼 단단한 육체였다. 그 뒤로는 일방적이었어. 자존심 때문에 결착이 날 때까지 버틴 것일 뿐, 내 쪽에 승기가 왔던 적은 없다.”
대결에서 굴욕적으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드의 얼굴은 산뜻해 보였다.
그는 기꺼운 동작으로 내게 위그드라실의 이파리를 내밀었다.
“내게 기회를 줘서 고마워. 이 세계수의 파편이 언젠가 그대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으면 좋겠군.”
“유용하게 쓰겠어. 감사를 표해야 되는 건 이쪽이지.”
뇌신은 자신의 말대로 약속을 지켰다.
두 초월자들이 만들어낸 재난의 한가운데에 있었지만 나는 모기에 물린 만큼의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부디 계속 성장해서 내가 있는 8층까지 와주기를 바라.”
그가 떠나려는 기색을 보이자 나는 지드의 등 뒤에 여전히 기절해 있는 야수왕 파주주를 가리켰다.
“저 녀석은? 저대로 놔두면 깨어나나.”
“응. 아마 내가 강림했다는 걸 의식도 못할 거다. 트랜스 상태니까.”
지드의 눈이 가늘게 뜨여졌다.
“안 죽일 건가?”
“뭐?”
“그대에겐 절호의 기회잖아. 이 녀석이 무방비로 기절해 있을 때 목을 딸 수 있을 텐데.”
뭐지? 시험인가.
지드는 내가 어떤 답을 할 것인가 궁금해 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한 뒤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굳이 여기서 이유 없는 살생을 하고 싶진 않아.”
“하하하하. 그대는 정말 이 감옥과 안 어울리는구만.”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나와 안 어울리는 이곳을 무조건 탈옥할 거고.”
“암, 그래야지.”
[죄수 지드가 면회 종료를 선언합니다.]
[감옥의 시스템은 이를 받아들입니다.]
뇌신의 육체가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본래 그가 있는 층으로 돌아가는 모양이다.
“다시 만나는 순간을 고대하마, 슈바인 스트링거. 떠나가는 마당에 마지막으로 좋은 걸 알려주지. 3층의 시련을 돌파하는 데 힌트가 될지도 모르니까.”
투명해지는 뇌신의 눈동자가 찡긋했다.
“훔쳐갈 수 없는 것이 도난당했을 때, 은둔은 해제될 거야.”
수수께끼와도 같은 한 마디를 남긴 채 지드는 사라졌다.
훔쳐갈 수 없는 것이 도난당했을 때,
은둔은 해제된다고?
그가 말해준 부분에서 ‘은둔’이라는 단어로부터 연상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대수림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층장.
그런데 훔쳐갈 수 없는 것이라는 게 무엇인지 잘 감이 오지 않았다. 아직 이 수수께끼를 풀어낼 다른 퍼즐 조각이 내 손에 없는 것이다.
그때, 단체 텔레파시창이 눈앞에 생성되었다.
- 제르비어스 폰타인: 용사, 지금 어디냐? 몇 분 전까지 텔레파시가 연결되지 않았는데.
- 슈바인 스트링거: 잠깐 어디 불려갔다 왔는데, 나중에 설명해줄게.
- 제르비어스 폰타인: 층장은 만났나?
- 슈바인 스트링거: 아니. 방금 막 세 번째 야수왕까지 확인했는데, 셋 모두 층장이 아니라고 하네.
- 아스티나 류: 슈바인,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빨리 여기로 돌아와 줬음 해. 큰 문제가 생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