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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92화 (92/300)

#092. 뜻밖의 면회 (3)

지드는 턱에 손을 괸 채 여상스럽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그의 가슴을 찌를 수 있는 몇 개의 검로 중에서 최적의 것을 계산해보려 애썼다.

그런데 그 어떤 공격으로도 도무지 그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백전백패?

아니, 만전만패다.

그와 나 사이엔 승산을 따지는 것 자체가 미련할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격이 다른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전보다 내 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에 고강한 죄수에게 느끼는 위압감을 한층 농밀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달아나지? 일단 무영보로 최대한 거리를 벌리면서 순간이동의 권능을…….’

지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아니. 도망치지 말아줘. 나는 그대를 해치려고 여기에 내려온 게 아니야.”

“……그럼 무슨 목적으로 온 건데.”

“말투에 날이 서 있군, 슈바인. 애석해. 물론 아래층에서 마주쳤다던 설공 놈의 만행 때문에 덩달아 나를 경계할 수밖에 없는 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말이야.”

그것은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설공.

천마 류운학과 그의 딸인 아스티나 류의 일생에 걸친 숙적. 숱한 시간선에서 삼월초원을 피로 물들인 등반죄수.

“설공을 아나?”

“알지. 물론 사이가 좋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고. 서로의 주검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출 수 있는 관계라고 하면 알아들으려나.”

내 추측에 의하면 설공은 어떤 ‘집단’에 속해 있다. 그리고 그 집단의 뜻에 의해 푸르가토나투스인 아스티나를 납치하려 했다.

방금 들은 말이 사실이라면 적어도 지드는 그 집단의 일원이 아니라는 소릴까.

“8층에는 여러 세력이 있어. 다음 층에 올라가기 위해서 신격의 죄수들이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지. 궁금해? 너의 호의를 사기 위해서라면 몇 개의 정보를 주는 건 어렵지 않은데.”

“듣겠어.”

위층과 관련된 정보는 단탈리온의 능력으로도 파악이 까다로운 고급 정보들일 터였다.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다.

“내가 있는 8층 ‘■■■’에는 미래시의 권능을 보유한 여러 죄수들 중에서도 단연 뛰어난 예언자가 있었어. 그 죄수는 절대 빗나갈 수 없는 신탁을 내릴 수 있었는데, 감옥 안에서 그 권능을 사용하게 되면 교도관장으로부터 소멸될 것이라는 제약에 걸려 있었어. 아카식 레코드의 관리자가 만들어낸 공간에서 기록을 훔쳐본다는 건 가중처벌의 사유가 되거든. 수목애호가의 정원에서 불을 지르는 행위라고나 할까.”

예언자가 있었다.

지금은 없다는 소린가.

“과거형으로 말하는 걸 봐선 결국 신탁을 내리고 그 형벌로 죽은 건가?”

“응. 8층에 있는 죄수들의 평균 형량이 얼마인지 알아? 만 단위 밑으로는 껴주지도 않을 정도야. 각자의 세계에서 초월자로 군림하던 죄수들에게 있어선 무기징역이나 다름없지. 너는 1층에 배정받았었으니 알 수 있잖아? 형량이 계속 두 배로 곱해지는 등반이라는 건 보통 용기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래. 실제로 화룡도에선 위로 올라가려는 죄수가 100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한다더군.”

하지만 8층은 이야기가 다르다. 딱 한 층만 위로 올라가면 바로 꼭대기층에 올라설 수 있다.

“책정된 평균 형량은 가장 긴 반면, 감수해야 하는 리스크는 제일 적으니 아래층의 죄수들보다 훨씬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크겠군.”

“정확하다. 그러니 8층의 층장이 되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갖은 수를 써왔겠는가. 지나치게 긴 세월이었어. 번뇌로부터 자유로운 자들마저 결국 인내심이 바닥날 만큼 말이야. 그래서 ‘설공’이 속한 그 집단이 예언자를 협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대가로 신탁을 받아낸 거지. 층장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푸르가토나투스.”

설공은 죽기 직전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자신들은 절대 ‘푸르가토나투스’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감옥에서 태어난 아스티나 류를.

“그래서 설공이 움직인 거야. 다른 죄수들보다 한 발 앞서서 네 동료를 쟁취하려고.”

“하지만 실패했지. 내가 막아섰으니까.”

이렇게 대꾸하자 지드는 경박하게 웃었다.

경쟁업체가 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자본가의 웃음과 몹시 닮아 있었다.

“그랬지. 그뿐인 줄 아나. 설공이 2층에서 난동을 피운 사건이 무수한 시간선을 생성시키면서 교도관들의 집중 감시를 받게 됐어. 적어도 설공만큼은 두 번 다신 자네들 앞에 나타날 수 없을 거야. 최소한 8층에 오르기 전까진. 내 입장에선 아주 쌤통이지. 설공에게 한 방 먹여준 그대가 얼마나 어여쁜지 몰라.”

“그래서? 단순히 나를 예뻐해 줄려고 그 ‘면회’라는 걸 신청한 건 아닐 거 아냐.”

“슬슬 본론을 꺼내야겠군.”

지드가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그의 등 뒤에 문이 하나 생겨났다. 순백색의 현란한 테두리를 지닌 그 문 뒤는 전혀 다른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건 내가 만든 심상세계로 연결되는 문이야. 그대를 이곳으로 초대하고 싶네. 물론 억지로 데려갈 순 없어. 그대가 진심으로 동의해야만 가능하지.”

“나를 없애려는 함정이 아니라고 어떻게 믿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초월자의 말을 순순히 따르는 건 자살행위다. 그가 꺼낸 이야기가 모두 거짓일 가능성도 있다. 여기서 나를 손쉽게 제거한 뒤 푸르가토나투스인 아스티나를 납치하려는 계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말에 지드는 허리를 젖혀 껄껄껄 웃었다.

“나는 벼락과 천둥의 신이다. ‘뇌신’이라는 것은 허세로 붙인 별호 같은 것이 아니란다. 나처럼 신격을 쟁취한 존재들은 신명(神名)을 거는 순간 너 같은 인간에게 거짓을 말할 수 없다.”

“거짓말을 하면 벌칙이라도 받는 건가?”

“비슷해. 거짓말이라는 것의 목적은 무엇인가. 상대를 속이려는 거지. 그리고 상대를 속여야만 하는 필요를 가진 것들은 모두 ‘약자’라네.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으며 가진 패를 다 내보여도 상대를 짓누를 수 있는 강자들은 누군갈 속일 필요도, 기만할 이유도 없는 것이지.”

“만약 신명을 걸고 거짓말을 하는 신격이 있다면?”

“그렇다면 그 녀석은 타천에 버금가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겠지. 인간으로 치면 겁쟁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거야. 동일한 신격끼리라면 모를까, 결코 수지가 안 맞는 장사라네.”

지드의 말은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정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그대가 갖고 있는 거짓말 탐지기를 사용해도 좋아.”

나는 그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서 단탈리온을 펼쳐들었다.

- 뇌신 지드의 말에는 일체의 거짓이 없습니다, 용사님. 어차피 저자가 작정하고 용사님을 납치하려 든다면 이쪽에선 대항할 수단이 전무합니다. 저자는 용사님과 모종의 거래를 위해서 이 층에 강림했고, 그 거래 과정에서 용사님은 아무런 해를 입지 않을 겁니다. 신격이 내거는 약속이니만큼 믿으셔도 좋아요.

흐음.

이 녀석이 이렇게까지 이야기할 정도라면 확실히 안심해도 될 것 같다.

“단탈리온은 네가 나와 거래를 할 생각이라고 하는데?”

지드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호오, 아무리 내가 마음을 열었다고 한들 신격의 속내까지 엿볼 수 있다는 건가? 아주 재미있는 장난감이군.”

“좋아. 당신의 말을 믿겠어. 그런데 거래라면 내가 그 심상세계에 들어가는 대가로 무얼 주려는 거지?”

“상품을 미리 까면 재미가 없는 법이지만 이쪽이 아쉬운 입장이니 어쩔 수 없나.”

지드가 품에서 꺼낸 것은 일곱 개의 빛깔을 동시에 담고 있는 나뭇잎이었다.

[이름: 위그드라실의 이파리]

[등급: S급]

[푸르가토리움 7층에서 자라는 세계수의 파편입니다. 역사적으로 등반죄수들에게 인기가 좋은 성유물로서 자신이 한 번이라도 밟았던 층에 ‘면회’를 신청할 수 있습니다. 현신하는 동안 본래 가진 능력치가 절반으로 제한되며 한 번 사용하면 소멸됩니다.]

이번에는 내가 다급해질 차례였다.

S급 아이템 위그드라실의 이파리.

정말 엄청난 기능을 갖고 있었다.

“아래층으로…… 다시 내려갈 수 있다고?”

“설공이나 내가 무슨 수로 아래층에 현신할 수 있겠나. 전부 이 아이템 덕분이야. 그대가 내 초대에 응해 심상세계로 들어와 준다면 이걸 선물로 주도록 하지. 어때?”

그립기 짝이 없는 화룡도 7번 방의 죄수들.

그리고 삼월초원에서 애틋하게 작별한 두 스승님의 얼굴들이 스쳐지나갔다.

나는 고심 끝에 지드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잠깐.”

그때, 머리 위에서 수관부가 좌우로 갈라지며 노란 동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8층의 죄수 지드. 감히 내 허락 없이 다른 교도관의 권능이 담긴 물건을 꺼내든 것인가. 불쾌하기 짝이 없구나.”

음성으로 누군가를 두들겨 팰 수 있다면 이런 수준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교도관 증식하는 밀림의 뱀은 짜증이 단단히 나 있었다.

지드가 고개를 꺾어 뱀과 눈을 마주쳤다.

“아, 미안. 내가 다급한 나머지 당신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나 보네.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 사과할게.”

“8층의 죄수들은 오만하기 짝이 없다고 들었지. 하지만 신격에도 급이 있다. 버르장머리 없이 경거망동했다간 너를 통째로 씹어 먹어버릴 수 있다는 걸 명심하라.”

그러자 지드는 기분이 상했다는 듯 눈을 게슴츠레 떴다.

“버르장머리라. 듣자듣자 하니 그냥 넘기기 어려운 표현을 쓰는군, 교도관. 고작 3층의 관리를 맡고 있는 주제에 너무 머리가 꼿꼿한 거 아니야?”

쿠르르르르르릉.

순간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대수림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지드가 교도관의 존재감에 맞서기 위해 자신의 힘을 개방한 것이다.

우지끈.

검기를 써도 잘라내기 힘들었던 대수림의 거목들이,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부러지고 있었다.

사부님의 천마군림보에 붙잡혔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압박감이었다.

‘이게 절반으로 제한된 힘에 불과하다고?’

그렇다면 본래의 힘을 다 발휘하면 대체 어느 정도라는 거야.

지드의 눈동자에서 전격의 기운이 넘실댔다. 당장이라도 뛰어올라서 뱀의 머리를 썰어버리기라도 할 것 같은 기세.

“해볼 텐가, 지드. 나는 이 화신체를 오랫동안 유지해왔다. 후회할 텐데.”

“애써 가꾼 정원이 전부 쑥대밭이 되어도 상관없다면 나야 사양하지 않겠다.”

뇌신의 몸에서 전격이 뿜어져 나왔다.

‘이 새끼들아, 딴 데 가서 싸워.’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두 초월적 존재의 신경전에 끼인 나로서는 죽을 맛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은 물론 뱃속에 있는 내장을 전부 토해버릴 것 같은 메스꺼움이 나를 덮쳤다.

[8층의 교도관 ‘숭배를 강탈하는 십자가’가 중재에 나섭니다.]

[폭동이 일어나지 않는 한 교도관이 죄수와 충돌하는 건 모양새가 빠진다고 권고합니다.]

다행히 증식하는 밀림의 뱀이 먼저 물러섰다.

“흥. 고작 네놈 때문에 물러서는 게 아니다, 지드. 정당한 면회의 권리를 무시하고 죄수를 소멸시켰다가 다른 교도관들의 항의에 시달리는 것이 짜증날 따름이니.”

“누가 뱀 아니랄까봐 혓바닥이 길구나.”

일자로 찢어진 노란 동공이 스르륵 사라졌다. 교도관이 자신의 거체를 이끌고 어디론가 떠나가버린 것이다.

“당신, 대범하네. 죄수가 교도관에게 그렇게 들이대도 괜찮은 거야?”

“진짜로 한 판 붙었으면 내가 힘들었겠지. 그래도 모욕으로 선을 넘으면 발끈할 수밖에 없어. 말했듯이 신격의 존재들이란 보통 그래.”

지드는 문 앞으로 걸어간 후 내게 손을 내밀었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어. 자아, 안으로 들어가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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