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 뜻밖의 면회 (2)
파사삭. 파삭.
나는 식물의 잔해가 가득 쌓여 있는 밀림의 토양을 밟으며 혼자 걷고 있었다.
지구에 있을 때 보았던 아마존 다큐멘터리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이 정도로 풍성한 지질이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식물의 잔해를 분해해서 생태계를 순환시키려면 박테리아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들이 거의 썩지 않는데다가 이 정도 밀림이라면 응당 있어야 하는 곤충들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교도관의 권능으로 유지되는 부자연스러운 생태계라는 것이 실감난다.
가상현실 게임들 중에서 여러 번 정글을 탐험했던 적이 있지만 이런 수준으로 표백된 스테이지는 찾기 어려웠다.
물리쳐야 하는 보스몹을 향해 돌진하느라 지금처럼 주변을 차분히 둘러본 적도 드물었지만.
‘흐음. 왜 갑자기 알파 테스터 시절이 떠오르는 걸까?’
나는 촘촘한 수관부의 틈을 뚫고 내리쬐는 태양빛, 잘려나간 커튼의 밑자락처럼 흩어져 있는 햇빛을 지뢰 피하듯 걷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평범한 걸음걸이에서 패턴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횡단보도에서 자신만의 규칙을 만들어 페인트 부분만 밟으며 뛰어다니는 어린아이처럼.
곧 깨달을 수 있었다.
‘너무 오랜만에 혼자가 되어서 그래.’
아스티나와 제르비어스는 내가 단독으로 대수림을 한 바퀴 둘러보겠다는 생각에 우려를 표했다.
뛰어난 무력을 자랑하는 아스티나와 첨단 레이더나 다름없는 뿔을 가진 제르비어스의 조력 없이 위험지대를 탐사하겠다는 소리니까.
하지만 일행 중에 오직 나만이 위기상황에서 순간이동의 권능으로 몸을 빼낼 수 있다.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이라면 혼자 행동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베이스캠프라 할 수 있는 남쪽의 굴을 누군가 지키고 있어야 마음이 편해지는 점도 있었고.
어쨌든 긴 시간 동안 혼자가 되고 나니 기분이 묘했다.
쌉싸름한 외로움과 고독이 주는 평안함이 동시에 찾아왔기 때문이다.
0층 대기실에선 차카 도기노브가 나를 씹어 먹으려 들었고, 1층 화룡도에선 7번 방의 친구들 덕분에 심심할 틈이 없었다. 2층 삼월초원에서는 양 진영을 오가며 돌아다니느라 나 홀로 사색할 시간이 거의 전무했다.
뭐, 이것도 나쁘지 않네.
“캬아아아아아!”
야수들이 산발적으로 튀어나왔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붉은 돌을 쏘아내면 녀석들은 기겁하며 물러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돌을 다시 회수해도 냄새가 남는 모양인지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갖고 있는 돌은 10개에 불과했으나 서른 마리의 야수가 동시에 나타나도 녀석들을 경직시킨 후 몸을 빼낼 수 있을 정도였다.
손쉽게 대응할 수 있다는 자신감.
그것은 내 마음가짐이 수월하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얼마나 밀림 탐사를 계속했을까.
“단탈리온, 이제 거의 다 온 거 맞아?”
- 네. 동쪽의 야수왕이 지배하는 영역이 곧 나오게 될 겁니다. 현재 위치를 제가 계속 표시하고 있으니 길을 잃을 염려는 놓으셔도 돼요.
단탈리온이 그림으로 보여주는 대수림의 지도엔 내 위치와 이동 방향이 화살표로 표시돼 있었다. 목적지와의 거리도 1미터 단위로 갱신된다.
게임 화면에서 늘 HUD로 표시되는 지도의 기능이나 다름없었다.
마력이 도트 데미지로 깎여나간다는 점에서 연비가 좀 세긴 해도 단탈리온은 훌륭한 내비게이션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저벅.
동쪽 야수왕의 영역에 발을 디뎠다.
주변 나무들의 새카맣게 탄 흔적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손으로 만져보자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식물들이 무참히 바스라졌다.
생뚱맞았지만 백묘탑의 육망성이었던 드라이푸스 카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구사하는 7클래스 운석 마법 정도가 있어야만 이런 현장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우우우우.”
그러나 화마가 덮치고 간 이 둥지는 운석이 만들어낸 게 아니라 저 짐승이 만들어낸 것이다.
집채만 한 괴수가 나를 발견하고 몸을 일으켰다. 쩍쩍 갈라진 근육의 틈마다 붉은 실선이 도드라져 있었고, 거기에서 숨 막히는 열기가 새어나왔다.
[이름: 훔바라스]
[종족: 수인], [클래스: 야수왕]
[HP: 7,250], [MP: 3,900], [근력: 520], [민첩: 410]
[형량: 815년]
[이 죄수는 현재 트랜스 상태라 정보 열람이 불가합니다.]
나는 훔바라스의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녀석은 움직이는 생물이 있으면 무작정 덤벼들고 보는 다른 야수들과는 달랐다.
쿠우우웅!
훔바라스가 양 주먹을 땅에 꽂았다. 그러자 지면이 붉은 거미줄이 퍼지듯 달궈졌다.
곧 내 등 뒤에 불길의 장막이 겹겹이 둘러싸며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 보였다.
영리하다. 산소가 극히 적은 땅 속에서 불길을 끌어내는 이 솜씨는 분명한 ‘스킬’이었다.
그 증거로 훔바라스의 MP가 처음 봤을 때보다 살짝 줄어들어 있다.
화염의 야수왕이 단숨에 거리를 좁혀왔다.
하지만 나는 녀석과 싸울 생각이 없었다.
[이 존재는 층장이 아닙니다.]
내가 찾는 목표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녀석이 휘두르는 발톱을 무영보로 피해내며 거리를 벌렸다.
튈 때 튀더라도 한 가지 실험해볼 게 있었다.
피융!
붉은 돌 하나를 꺼내 탄지공으로 발사했다. 그러자 야수왕은 코를 조금 찡그렸을 뿐 꼬리를 휘둘러 그것을 가볍게 쳐냈다.
‘이 정도로 센 녀석에겐 안 먹힌다는 거군.’
그렇게 몇 번 어울려주다가 몸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마지막에 훔바라스의 복부에 제3의 입이 열리며 작열포를 내쏠 때는 조금 아슬아슬 했지만 결국 무사히 야수왕의 둥지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워어어어어!”
먹잇감이 달아나자 분노한 녀석의 포효가 멀리서 메아리를 만들었다.
가까이서 관찰한 녀석의 힘은 막강했다. 귀혼오마 중 한 명이었던 폭암도인과 맞붙는다면 훔바라스가 짓누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층간구역에서 수련을 거친 지금의 나라면 해볼만 했다. 근력이나 민첩 수치가 좀 못하더라도 스킬과 전략으로 그 격차를 충분히 메울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층장이 아닌 걸로 밝혀진 이상 불필요한 충돌을 할 필요가 없다.
평소와 달리 교도관장이 주는 돌발 퀘스트도 뜨지 않았다.
‘내가 엉뚱한 곳을 짚고 있는 건가.’
그건 일종의 육감이었다.
게임 속에서 제작자가 의도한 길을 제대로 가고 있을 때와 그러지 않고 육성 루트를 이탈했을 때를 구별할 수 있는 육감.
내 예감은 들어맞았다.
[이름: 누겔타]
[종족: 키메라], [클래스: 야수왕]
[HP: 6,850], [MP: 4,300], [근력: 480], [민첩: 390]
[형량: 596년]
[이 죄수는 현재 트랜스 상태라 정보 열람이 불가합니다.]
대수림의 북쪽 일대를 서리숲으로 만들어놓고 얼음굴에 짱박혀 있던 북극곰 역시 열쇠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이 존재는 층장이 아닙니다.]
나는 등 뒤에서 고드름을 미사일처럼 쏘아대는 야수왕으로부터 미련 없이 달아났다.
다행히 놈들은 급이 높은 야수여서인지 영역 바깥에까지 집요하게 따라오지는 않았다.
두 마리 모두 꽝이라면 남은 것은 서쪽의 야수왕뿐이었다.
나는 일말의 희망을 안고 대수림의 서쪽을 향해 또 한 번 밀림 행군을 감행했다.
서쪽의 야수왕은 유독 높게 자란 나무에 딱다구리처럼 구멍을 파 둥지를 만들어놓고 있었다.
[이름: 파주주]
[종족: 뇌신의 사역마], [클래스: 야수왕]
[HP: 6,200], [MP: 5,000], [근력: 280], [민첩: 470]
[형량: 645년]
[이 죄수는 현재 트랜스 상태라 정보 열람이 불가합니다.]
표범의 얼굴을 한 파주주의 등에는 네 장의 날개가 달려 있었다. 아마 저것이 펴지는 순간 바람을 일으키는 마법 같은 걸 사용하는 거겠지.
‘캉이 녀석, 그림에 소질 있는걸.’
세 명의 야수왕 모두 피라미드 벽화에 그려진 특징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나는 녀석과 눈을 마주치며 속으로 빌었다.
[이 존재는 층장이…….]
제발. 쉽게 쉽게 가자.
[……아닙니다.]
빌어먹을. 하여간 쉬운 게 없다니깐.
침이라도 뱉고 싶은 심정이다.
세 야수왕 중에 층장이 없다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일까. 지금보다 더 먼 곳까지 무작정 숲을 헤매며 ‘은둔’하고 있는 층장을 찾아다니라는 걸까.
하지만 그건 너무 무식한 방법이다.
층장이 가만히 있지 않고 이동할 경우 탐색자와 충분히 엇갈릴 수 있다. 운이 나쁘면 천년 동안 헤매는 것도 가능하다.
더 현명한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네. 저 녀석은 왜 안 내려오지?’
서쪽의 야수왕 파주주는 내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뛰어내릴 생각도 없어 보였다.
민첩 스탯이 높은 걸 보면 저 날개를 비행에 이용할 수 있는 게 분명해 보였는데도 말이다.
“그르륵.”
그때 파주주의 눈이 흰자위도 덮이더니 둥지에서 맥없이 떨어졌다.
꾸우우웅.
흙먼지가 일어나는 규모가 녀석의 체중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간접적으로 알려줬다.
나는 추락에 휘말리지 않도록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으나, 그동안 파주주는 엎드려 쓰러진 자세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뭐야?”
죽었을 리는 없다. 아마 골절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내 기감이 파악하고 있는 녀석의 생명력은 여전히 강렬했기 때문이다.
‘느닷없이 기절이라니.’
설마 적을 끌어들이는 유인책일까 싶어 좀 더 지켜보고 있는데,
[죄수 파주주가 접신 단계에 접어듭니다.]
[8층의 한 죄수가 자신을 신봉했던 짐승의 몸을 통해 현신하려 합니다.]
뭐라고?
접신?
[이것은 적법한 면회 요청입니다. 교도관장의 승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판별 완료. 승인 허가되었습니다.]
타층 죄수의 면회 신청이라니.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는데. 설마 설공이 내려왔던 것처럼 규격 외의 죄수가 또 난입을 한다는 건가.
하지만 그때와 달리 이번엔 ‘적법’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즉, 교도관장이 이 타층 죄수의 방문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는 뜻이다.
[면회를 허가받은 죄수가 야수왕 파주주의 신체를 촉매로 사용합니다.]
[면회가 시작됩니다.]
우르르르릉!
갑자기 파주주의 몸에서 황금색 벼락이 터져 나왔다.
나는 황급히 눈앞을 가리면서도 떠올렸다.
파주주의 상태창 중 종족 항목에는 다른 야수들과 달리 키메라나 반인반수라는 항목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거기엔 분명 ‘뇌신’의 사역마라고 쓰여 있었다.
벼락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반갑다, 등반죄수 슈바인 스트링거. 기다리느라 아주 혼쭐이 났어.”
청량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내 눈 앞에 있는 건 신비스러움이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운 미남자였다.
“그대가 혼자가 되기만을 계속 기다리고 있었거든.”
머리카락과 눈썹이 번개로 이루어진 사내가 씨익 웃었다.
어떻게 입는 건지 추측하기도 힘든 황금색의 치렁치렁한 복색. 양팔에 채워진 수갑마저도 뛰어난 세공사가 만든 장신구처럼 보이게 하는 영롱함.
나는 현혹되지 않으려 애쓰면서 현무패웅검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나를 만나러 왔다고 했나. 왜?”
“그 전에 자기소개부터 하는 것이 순서지. 나는 뇌신 지드라고 해. 8층에 있는 죄수들 중 한 명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