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86화 (86/300)

#086. 사냥꾼과 사냥감 (2)

“손에 든 게 뭔데?”

“불에 탄 나뭇잎들이야. 그 주변엔 인간의 것으로 보이는 발자국들이 모여 있었어.”

사실이었다. 아스티나가 살펴보고 있던 장소엔 모닥불을 피웠던 흔적이 있었고, 의자로 사용했던 걸로 추정되는 돌덩이들도 있었다.

무엇보다 명백히 인간의 것으로 보이는 발자국.

“적어도 여기엔 야수가 아닌 죄수들이 머물렀던 적이 있는 거야.”

“하지만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고.”

“야수들의 습격에 전멸한 게 아닐까?”

나와 아스티나가 답답해하고 있자 마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단탈리온에게 한 번 물어보지 그러냐? 여기에 있던 죄수들이 지금은 어디로 간 것인지.”

“지금은 안 돼. 마도서에게 대가로 줄 마력이 한 줌도 안 남았거든. 게다가 그렇게 직접적인 질문은 대가가 크거나 교도관장 녀석이 정보제한을 걸어뒀을 게 뻔해.”

그리고 자꾸 단탈리온의 지식에 기대는 것도 좋지 않았다. 내 공략법의 기본은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요소들을 한데 묶어 장벽을 돌파하는 직관에서 나온다.

극한의 위기상황이 아니라면 다양한 각도에서 스스로 생각하는 사고력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은 직접 발품을 팔아서 알아보는 게 맞다.

“일단 밖으로 나가보자.”

우리가 있던 피라미드엔 주변에 4개의 작은 피라미드가 딸려 있었다. 방향은 동서남북. 총 5개의 건물이 피라미드군을 이루고 있던 것이다.

먼저 동쪽의 소피라미드부터 들어가 보기로 했다.

각각의 피라미드에는 꼭대기에 구멍이 뚫려 있어 횃불 없이도 내부를 수월하게 살필 수 있었다. 섬세한 설계가 뒷받침되어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건축술이었다.

“응?”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벽면에 큼지막하게 그려진 ‘어떤 그림’이었다.

“두 발로 서 있는 야수를 그린 것 같은데.”

역관절로 서 있는 맹수의 정수리와 등까지 검은 갈기가 휘날리고 있었고 입에서는 불을 뿜고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를 추격했던 야수들 역시 흉포한 괴력을 발휘했으나 불을 뿜거나 독을 뱉어내는 녀석들은 없었다.

하지만 이 그림에 그려진 녀석은 달랐다.

“불을 뿜는다는 건 마법을 쓰는 건지도 몰라.”

“주변에 작게 그려진 것들을 봐. 조악한 그림체이긴 하지만 분명 야수들을 그린 것 같아. 이 비율이 사실이라고 하면 체고 또한 엄청날 거야.”

“야수들의…… 왕 같은 건가?”

그림이 이곳에만 그려져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다다르자 우리는 속히 다른 두 개의 소피라미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예상이 맞았어.”

북쪽의 소피라미드에는 북극곰을 연상시키는 하얀 털의 야수가 포효하고 있었다. 녀석의 등에는 고슴도치처럼 뭔가 뾰족한 가시가 솟아 있었다.

아스티나가 그 가시를 가리키며 추측했다.

“가시가 아니라…… 얼음 같은데?”

주변의 나무들이 투명한 돌에 갇혀 있는 게 묘사되어 있었다.

밀림에 다이아몬드처럼 투광이 되는 광물이 있다는 추측보다는 이 북극곰이 얼음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었다.

“불을 뿜는 야수에 이어서 이번엔 얼음을 뱉어내는 곰이라.”

서쪽의 소피라미드에는 등에 네 장의 날개를 달고 있는 흑표범이 그려져 있었다. 날개들의 옆에는 공기의 흐름을 그린 듯한 표현들을 엿볼 수 있었다.

“이 녀석은 날개로 풍압을 일으키는 모양이야.”

그림체는 단순하면서도 각 야수들의 특징을 절묘하게 잡아내고 있었다. 평면에 그려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각 야수들의 박력이 제대로 표현돼 있었다.

팔짱을 낀 아스티나의 이마에 골이 만들어졌다.

“교도관이 그린 걸까?”

나는 날개 야수의 한쪽 날개를 쓸어내리며 읊조렸다.

“누가 그렸는지는 몰라도 교도관은 아니다. 우리 수준의 지성을 가진 녀석의 솜씨라고 생각해.”

“어떤 근거로?”

“이 그림을 그렸을 때의 감정이 느껴지거든. 숭배? 그런 건 아닌 것 같아. 존경이나 경배하는 마음이라기보다는…… 공포감? 그래, 이 그림을 그린 장본인은 이 야수왕들을 무서워하고 있었어.”

“아직 하나가 남았지 않나! 가 보자!”

마왕은 흥분한 듯이 남쪽 소피라미드로 가보고 싶어 했다.

불에 이어 얼음, 바람이 등장했으니 네 번째는 무엇이 나타날지 추측해보면서 말이다.

내기할 수 있다. 층간 구역에서 제트카이저에 푹 빠졌던 일화도 그렇고, 이 마왕을 지구에 데려다놓으면 분명 애니메이션 오타쿠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어어어?”

남쪽 소피라미드에서 제르비어스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것도 없는데?”

한쪽 벽면을 가득 채웠던 야수왕의 그림이 남쪽 소피라미드에는 없었다. 무언가를 그렸다가 지운 흔적도 없이 깨끗했다.

뭔가 아쉬워하는 제르비어스 옆에서 아스티나가 그것을 발견했다.

“여길 봐. 대신 글씨가 써있는걸.”

“그래?”

그림이 없는 대신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뭔가가 적혀 있었다. 마왕의 큼직한 망토가 햇빛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발견이 어려웠던 것이다.

“옆으로 가봐, 오타쿠 마왕.”

투덜대며 녀석이 비켜서자 글씨가 자동번역되었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봉화. 피워 올려. 그럼 나도 피운다. 우리 만나.]

*

푸르가토리움에서 내가 볼 수 있는 문자는 모두 한글로 번역이 되어 인식됐다.

그건 나만의 특별한 능력도 아니었다. 지금껏 감옥에서 만난 모든 죄수, 심지어 죄수가 아닌 아스티나에게도 ‘통역의 권능’은 적용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같은 메시지를 읽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정말 너희한테도 그렇게 보인다고?”

두 동료는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번역된 게 맞는 건가. 글씨를 남겼다는 것은 지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툭툭 끊기는 어투와 짤막한 문장들이 의아한 지점이었다.

이런 우려를 드러내자 제르비어스가 반박했다.

“아니, 말이 돼. 다른 세 벽화들을 보면서 내가 느낀 감상은…… 숙련된 미술가의 그림에는 한참 못 미친다는 것이었거든. 어린아이에게 분필을 쥐어주면 딱 이런 그림을 그리지 않을까 싶은 수준이었다.”

“그런 느낌은 나도 받았어, 마왕. 하지만 흉포한 야수들이 득시글대는 이 밀림에서 어린아이가 생존할 수 있었을까? 아니, 것보다 푸르가토리움에 잡혀올 만큼 죄를 짓는 게 가능할까.”

아스티나가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 메시지를 남긴 죄수가 벽화를 남긴 죄수와 동일 인물이 아닐 수도 있지. 만약 동일인물이라 하더라도 연령을 추정할 만큼의 단서는 부족해. 나이를 충분히 먹었지만 문자를 사용하는 데엔 미숙한 지능일 수도 있고.”

내가 우려하는 것은 이것이 함정일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이런 문구를 통해서 손쉽게 목표물을 함정에 빠트리려는 걸 수도 있으니까.”

우리는 봉화를 피워 올려야 하는가를 주제로 한참 이야기를 나눴으나 결국 시도해보기로 의견을 모았다.

3층에서 대수림의 은둔자인 층장을 찾아내야 한다.

한 가지 단서도 아쉬운 마당이라면 불확실한 가능성에도 모험을 걸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중앙 피라미드에 누워 꽤 오랜 시간 휴식을 취해 마력을 회복했다. 2층 삼만월의 밤처럼 순식간에 MP가 차오르지는 않았으나 생명력이 충만한 대수림의 영향을 받았는지 3분의 1 정도의 MP가 다시 차올랐다.

그로부터 몇 시간이 흘렀다.

“준비됐지?”

중앙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선 우리는 잘라낸 가지와 나뭇잎을 모아 장작을 만들었다.

봉화대는 완성됐고 남은 건 불을 붙이는 일이었다.

“용사야, 그나저나 어떻게 태워야 하지?”

“단탈리온을 몇 장 찢어서 네 업화의 쌍장으로 불씨를 만드는 건 어때?”

“그렇게 정밀한 조작은 힘들다. 그 마도서의 얇은 종이라면 바스라져 버릴걸.”

내 손에 들린 단탈리온이 간곡하게 애원했다.

- 용사님, 부디 저를 평범한 방법으로 사용해 주십시오. 금단의 마도서를 땔감으로 쓴다면 우주가 통탄할 일이라고욧! 저의 속지는 재생도 되질 않습니다.

“어차피 썼다 지웠다 할 수 있잖아. 문자 그대로 몸을 불살라서 용사를 도울 수 있으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 숭고 따위 개나 주십시오! 저 마도서라니까요.

왜인지 모르게 단탈리온의 어투에서 짙은 반항기가 느껴진다. 이 녀석 사춘기일까. 언제 한 번 날 잡고 군기를 좀 잡아야…….

“내가 할게.”

그때, 아스티나가 청룡패웅검을 뽑아들었다.

내 검과 같은 장인이 만들어낸 쌍둥이와 같은 명검. 그런데 청룡패웅검엔 내 검에는 없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인 마녀가 달을 베어낸 증표인 월장석이었다.

[마도제국학파 중력마법]

[레이 디스토션(Ray Distortion)]

분홍색 수정과 비슷하게 생긴 월장석으로 태양빛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공간을 왜곡시켜 태양열을 한 점에 모으는 돋보기 역할을 하는 것이다.

화르륵!

몇 초 되지 않아 나뭇잎들에 불이 붙었고 꽤 멀리서도 보일 만큼의 봉화가 만들어졌다.

“남쪽 방향을 주시해.”

내 말에 아스티나가 묻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우리가 있는 이 피라미드들의 설계 방위에 어떤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 북동서에 각각 야수왕의 벽화가 그려졌다는 건 어쩌면…….”

“남쪽에서 응답이 올 확률이 높다는 거겠네.”

그때, 대수림 곳곳에서 심상치 않은 변화가 목격되었다.

쿵. 쿵. 쿵.

야수들도 우리가 피워낸 봉화를 발견한 것이다.

지면이 거세게 진동하며 저 멀리 솟아오른 거목들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저 정도면 덩치가 보통이 아닌 놈들이 여럿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원래 짐승들은 불을 보면 달아나야 하지 않냐?”

“그건 초식동물들 얘기지. 이 층의 야수들 중에 사슴 야수나 토끼 야수 같은 녀석이 있을 것 같진 않아.”

그때, 내 뇌리에 모닥불을 피웠던 흔적이 상기되었다.

“여기에 피신했었던 죄수들도…… 함부로 모닥불을 피웠다가 변을 당했던 걸까.”

역시 함정이었던 걸까.

그 순간, 아스티나가 내 어깨를 툭 쳤다. 예상대로 대수림의 남쪽에서 가느다란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답변이 온 것이다.

“가자!”

우리는 미련 없이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뛰어내렸다.

방향과 거리는 알았다. 이제 무식하게 많은 숫자의 야수들에게 포위되기 전에 저 응답이 온 장소에 도달해야 한다.

*

띠링!

[돌발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돌발 퀘스트 #8. ‘봉화 찾기’]

[용사는 의문의 메시지를 남긴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 봉화를 피워 올렸습니다. 목적지인 남쪽 봉화 발생지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3층에는 상시 현신 중인 교도관 ‘증식하는 밀림의 뱀’이 있기 때문에 비행술은 사용할 수 없지요. 그러니 오직 두 다리를 사용해서 습격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도주 과정에서 야수들로부터 단 한 번의 접촉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에 성공한다면 대수림의 지형에 충분히 숙달되었다는 증표로 보상을 얻게 될 겁니다.

최대한 대수림의 지형에 익숙해져야 안마당처럼 밀림을 누비는 야수형 죄수들의 추격 속도에 대응할 수 있을 테지요.

앗. 다만 파천황의 권능인 순간이동을 사용하면 보상 수여는 인정되지 않습니다.]

[기한: 20분]

[보상: 민첩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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