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3. 대수림 (2)
“하여간에 통일된 맛이 없어요, 이놈들. 안 그래, 아스티나?”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니 아스티나는 포탈에서 빠져나온 자세 그대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텅 빈 양손을 바라보며 울상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포탈에 들어서기 전까지 아스티나가 꼬옥 안고 있던 곰인형이 보이지 않았다.
“없어졌어. 사라져 버렸어.”
“내가 그랬잖아. 층간 구역은 교도관장이 만들어낸 공간이야. 그 음흉한 놈이 거길 벗어나서도 유지되는 물건을 갖다 놓았을 리 없다고.”
아스티나는 내 말을 듣지 않고 바득바득 우겼으나 결국 두 눈으로 슬픈 결말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속상하겠지만 참아. 다음 층으로 올라갈 때 또 만질 수 있을 테니까. 알았지?”
아스티나를 다독이는 동안 제르비어스는 거대한 활엽수를 만져보고 있었다. 참나무와 비슷한 생김새였으나 크기 면에서 비교가 되질 않았다.
“뭘 그렇게 물끄러미 보고 있는 거야?”
내가 말을 걸자 제르비어스는 나쁜 짓을 하다 들킨 녀석처럼 움찔했다.
“용사야, 아래층에서 달맞이꽃을 찾아다녔을 때를 기억해?”
“그랬지. 설마 그때 널 탐지기로 써먹은 걸 아직도 마음에 담아둔 건…….”
“아니. 그게 아니야. 그날 직접 꽃을 딸 수 있었음에도 왜 굳이 널 시켰다고 생각하나.”
실제로 제르비어스는 달맞이꽃이 피어난 장소만 손가락으로 가리켰을 뿐, 손을 거들어주진 않았다. 만약 녀석이 채집에 나서줬다면 더 빨리 목표량을 채울 수 있었을 텐데도.
마왕은 자신의 보라색 손바닥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평범한 식물을 만지면 그것은 급격히 시들어버리기 때문이야.”
하지만 3층 대수림의 나무들은 그렇지 않았다. 마족이 손을 대어도 바스러지거나 독기에 오염되는 조짐 따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어떠한 사실을 나타내는가.
“이곳의 나무들은 마족의 저주에도 끄떡없을 만큼 생명력이 강하다는 거지. 아니면 교도관의 권능이 직접적으로 구현된 결과물일 수도 있고.”
“화룡도의 용암처럼 말이지?”
어느덧 멘탈을 바로잡은 아스티나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들어 3층 높이의 어떤 지점을 가리켰다.
성인 남성 열 명이 달라붙어야 안을 수 있을 법한 크기의 줄기. 그 줄기 한가운데에 3개의 홈이 파여 있었다.
“뭐지, 저게? 칼자국인가.”
만약 그렇다면 저 흔적을 만들어낸 검사는 제법 대단한 실력을 가진 게 틀림없었다. 저 높이로 도약해 3개의 평행한 검흔을 만들어낸 것일 테니까.
그런데 2층 삼월초원에서 오랫동안 영수들을 사냥해왔던 아스티나가 내 말에 반박했다.
“아니. 저걸 만들어낸 건 절대 날붙이가 아니야.”
아스티나는 베어졌다기보단 할퀴어진 것에 가깝다고 말했다.
“분명 짐승의 발톱이야.”
나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추측이었다.
도구를 사용할 수도, 무공을 배울 수도 없는 동물이 저런 걸 만들어낼 수 있다고?
“내가 직접 베어볼게.”
허공답보의 경공술을 발휘해 수직으로 점프했다. 그리고 3줄의 할퀴어진 자국 바로 아래를 겨냥해 현무패웅검을 휘둘렀다.
카드드득!
충격을 받은 가지에서 쟁반 크기의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사뿐히 착지하는 내게 아스티나가 다가왔다.
“역시 내 추측이 맞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검을 휘둘러 만들어낸 틈과 원래의 그것엔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3줄의 흔적이 더 지저분했고, 더 우악스러웠다.
“어떻게 저게 발톱이라고 확신해?”
“너는 귀혼산에서 현무만 봤겠지만 나는 다른 세 영수들과 여러 번 마주쳤었어. 그중 백호라는 녀석이 앞발을 휘두르면 딱 저런 형태가 나오거든.”
제르비어스는 턱을 쓰다듬으며 내가 만들어낸 흔적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뭔가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용사야, 검기를 써 봐라. 그러면 더 깊이 벨 수 있지 않겠냐.”
나는 씁쓸한 얼굴로 마왕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썼어.”
“어?”
“검기. 썼다고. 그런데도 표면만 살짝 긁어내는 데 그친 거야.”
물론 최대의 출력을 뽑아내 ‘천마회풍일섬’ 같은 스킬을 사용했더라면 나무를 베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대수림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마력을 낭비하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저걸 만들어낸 짐승이 무슨 종인지는 몰라도…… 발톱의 힘만으로 검기가 실린 냉병기와 비슷한 짓을 한 거야.”
마족의 피부에 닿아도 끄떡없고, 검기가 실린 공격으로도 완벽히 잘라내지 못한 나무. 그리고 그 나무를 발톱으로 할퀼 수 있는 야수가 사는 곳.
바로 푸르가토리움의 3층인 대수림이었다.
“모두들 긴장해. 그 어떤 층도 등반죄수들을 편안하게 환영해주는 곳은 없다고 했거든.”
한 층 한 층 올라설 때마다 나는 분명히 강해지고 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이 감옥 역시 매번 새로운 수준의 난이도를 갱신해 보여주고 있었다.
“일단 먼저 층장의 열쇠를 찾아야 해.”
1층에서는 마그마 볼.
2층에서는 쌍마대전.
다음 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층장의 열쇠는 모두 각층의 교도관이 설계한 ‘시련’과 관련이 있었다. 이곳 대수림에서도 분명 그런 시련이 존재하고 있을 터였다.
띠링!
기막힌 타이밍에 퀘스트 알림이 떴다.
[메인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메인 퀘스트 #5. ‘대수림의 은둔자’]
[등반죄수인 당신은 대수림의 품 안에 제 발로 걸어 들어왔습니다. 이곳은 지금까지의 층들과 달리 교도관 ‘증식하는 밀림의 뱀’이 강력한 저주와 권능을 발휘하는 성역(聖域)입니다.
당신은 이 드넓은 밀림에서 층장을 찾아내어 그를 굴복시켜야 합니다. 하지만 대수림의 층장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은둔’해 있습니다. 힘으로 층장을 쓰러트려서 열쇠를 강탈하든, 설득과 회유를 통해 열쇠를 넘겨받든 상관없어요. 일단 은둔해 있는 층장을 찾아내는 것이 먼저입니다.
층장을 알아보는 방법은 간단해요. 그와 눈을 한 번 이상 마주치면 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수림의 은둔자’ 층장을 찾아내십시오.
무운을 빕니다, 수감자여.]
[기한: 없음]
[보상: 근력 +200]
[실패 시: 등반 불가]
근력을 200이나 올려준다?
입이 쩍 벌어질만한 보상이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지금까지 교도관장이 내주는 퀘스트들의 보상은 달성의 어려움과 정비례해왔으니까.
나는 퀘스트의 내용을 동료들에게 전달해주었다.
“흐음. 3층의 시련은 술래잡기인가.”
제르비어스는 익숙한 듯 내 설명을 듣고 나서 이런 반응을 보였고,
“퀘스트라. 그 곰인형이 매순간 너한테 지령을 내리고 달성하라고 시킨다는 거네?”
반면 아스티나는 내 눈에만 보이는 알림창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드러냈다.
“슈바인, 이상하다고 느낀 적 없어?”
“어떤 점이?”
“너에게 길을 제시해주고, 그 길을 따라오게 만들며 중간중간 성장시켜준다는 것은 일종의 후원자 같은 느낌이야. 그렇다면 왜 보상을 한꺼번에 줘서 널 압도적인 강자로 만들어주진 않는 걸까.”
아스티나의 지적은 나 또한 여러 번 생각해본 적 있는 주제였다.
푸르가토리움에 소환됐을 때 용사 슈바인 스트링거의 육체는 천마 류운학을 우습게 넘어서는 수치의 절대강자였다.
게임 속의 만렙 캐릭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감옥은 그런 수준의 강함을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입소 당시 내 레벨을 깎은 목적과 비슷하지 않을까? 나는 교도관장이 나를 갖고 노는 것에 흥미가 있어서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그렇다면 네 무기들은 빼앗지 않았다는 게 이상하잖아. 자신의 권능으로 온 우주의 흉악죄수들을 소환할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가 너를 농락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생각하는 건 앞뒤가 안 맞아.”
아스티나는 아픈 지점을 건드리고 있었다.
과연 내가 교도관장의 특별한 관심을 받을 만큼 ‘대단한’ 녀석인가.
“동의한다, 아스티나. 이 용사 놈, 좀 자의식 과잉인 면이 있다니까.”
제르비어스까지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저 녀석의 페이스에 말려들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나는 아스티나와의 대화에만 집중했다.
“그렇다면? 너는 교도관장이 내게 뭘 바라고 있다고 생각해?”
“그것까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너에게 처음 내준 퀘스트가 ‘탈옥’이라는 것이었다면서?”
“응. 메시지창으로 보여준 것뿐 아니라 처음 곰인형의 형태로 만났을 때도 다시 한 번 내가 탈옥하길 바란다고 했지. 물론 왜 나를 탈옥시키려는지 이유를 밝히진 않았어.”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 속 터지는 소리와 함께.
아스티나는 내 이야기를 유심히 듣더니 자신의 생각을 읊었다.
“슈바인, 나는 열다섯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아빠한테서 축지법을 배웠어. 먼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지는 신기에 가까운 경공. 어찌나 신이 났는지 귀혼산장과 백묘탑을 하루에도 몇 번씩 축지법으로 왕복하다가 탈진하곤 했어.”
아스티나가 왜 느닷없이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내는지 감이 오질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엄마에게 한바탕 혼쭐이 났어. 당시의 나는 백묘탑의 계단 층계를 올라야 할 때도 축지법을 썼었거든.”
참월의 마녀 일레인 쿠디슈는 철부지 소녀 아스티나를 붙잡고 타일렀다.
“엄마는 그때까지 출발점과 도착점의 공간을 접어 이동하는 ‘워핑’을 가르쳐주지 않고 있었어. 그런데 비슷한 효과를 내는 경공술을 아빠가 상의 없이 알려줘 버린 거지.”
순간 말을 멈춘 아스티나가 마법진을 그려내 워핑을 시전했다.
슈우욱.
그녀가 다시 나타난 곳은 좀 전에 내가 검을 휘두른 나무의 뒤편이었다. 꽤 먼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깔끔한 공간이동이었다.
아스티나는 다시 우리 쪽으로 걸어오면서 설명했다.
“엄마는 내게 충고했어. 무인이든 마법사든 기술을 남발해 일상생활을 잠식하게 놔두면 건강하지 못하다고. 우리의 삶은 출발점과 도착점을 최단 시간 내에 돌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시면서. 그것에 너무 매몰되면 두 지점 사이에 놓인 아름다운 풍경들을 놓치게 된다고 말이야.”
마법에 지름길은 없다고 하셨던 스승님다운 말씀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이야기가 교도관장과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교도관장은 마음만 먹으면 ‘도착점’인 9층으로 너를 데려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최단시간에 탈옥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너의 힘을 제한시키지도 않았을 거고.”
“……그러면?”
아스티나는 양팔을 펴서 자신의 등 뒤를 가리켰다.
“보여주려는 거 아닐까. 출발점인 1층과 도착점인 9층 사이에 놓인 ‘풍경’들을 말이야.”
아스티나의 은빛 머리카락이 숲의 천장을 뚫고 내려오는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다.
하지만, 아스티나.
나는 감옥의 풍경 따위 원하지 않았어.
이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일순간 숲 속의 요정처럼 보인 아스티나의 모습에 압도돼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왜 말이 없어, 슈바인?”
“……뭐라 반박을 못 하겠어서.”
아스티나의 이야기는 확실히 나와는 다른 관점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알파 테스터였다. 퀘스트가 앞에 있으면 당연히 달성해야 한다는 생각부터 먼저 떠올리고, 그 뒤엔 방법을 궁리하는 것이 숨 쉬듯 자연스러운 종류의 인간.
하지만 아스티나는 이 감옥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나에게는 돌파하고 넘어가야 할 스테이지에 불과한 삼월초원이 그녀에겐 세상의 전부였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생각지 못했던 지점을 짚을 수 있었던 거겠지.
“어쨌든 당면한 우리의 목적은 대수림 어딘가에 있을 층장을 찾아내는 거야. 일단은 거기서부터 시작하자.”
그러자 아스티나는 한 가지를 더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했다.
“이번 층의 룰에는 허점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