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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82화 (82/300)

#082. 대수림 (1)

그 말에 나는 망치에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고 보니 곰인형을 처음 마주쳐서 프라이팬으로 냅다 두들겨 팼을 때 녀석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저야 지겨움을 느끼지 못하므로 이곳에서 천 년 동안 같은 행위를 반복할 수 있지만 당신과 친구 분은 그렇지 않을 텐데요.’

천 년 동안이나 같은 행위를 반복할 수 있다.

여기에선 시간이 멈춰있다는 암시였던 건가.

나는 2층 복도로 올라가는 계단에 올려놓았던 발을 도로 내려놓았다.

“무공의 초식과 마법의 술식을 알고 있다고 해서 전부가 아니야. 중요한 건 수련에 의해 늘어나는 숙련도와 고민을 거듭해서 얻는 응용력이지.”

아스티나는 그 말을 하면서 식탁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물컵이 붕 떠올라 그녀의 손으로 부드럽게 날아들었다. 물컵에 들어 있는 내용물이 찰랑이지도 않았다.

허공섭물.

무공의 고수만이 펼칠 수 있는 기예다.

아스티나는 물컵을 다시 원위치로 날려 보낸 뒤 팔짱을 끼었다.

“자, 해 봐.”

내 수준을 보겠다는 건가. 나는 천마 류운학과 서로의 목을 노리는 싸움만 했지, 이런 방식의 수행은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만 믿고 따라오라고 큰소리친 주제에 여기서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지켜보라고.”

나는 내공을 은은하게 끌어올린 뒤 식탁 위에 놓인 물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촤아악.

그러나 비틀비틀 날아오던 물컵은 중간 지대에 물을 쏟아내며 카페트를 적셔버렸다.

“끄응.”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아스티나의 수준에 내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과, 이 층간구역에서 그것을 담금질해야할 필요성이 절실하다는 것을.

“좋아. 그렇다면 당장 수련을 시작하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스티나는 마법진을 펼쳐 중력 마법을 전개했다.

곧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여덟 평 남짓한 작은 거실이 종합운동장만한 크기로 확장된 것이다. 다섯 걸음이면 닿을 수 있던 싱크대와 현관문의 거리가 수백 미터로 넓어졌다.

“이런 것도 할 수 있었어?”

“엄마에게서 배운 중력 마법을 응용한 거야. 공간을 확장하는 거지.”

“하긴 그렇구나. 좁은 공간에서 싸우면 다칠 테니까.”

“자, 그러면 시작할게. 일단 전력을 다해 덤벼 봐. 나도 마공과 마법을 모두 사용해서 받아칠 테니까.”

아스티나가 청룡패웅검을 뽑아들고 기수식을 취했다. 천마신교의 서열전을 떠올리게 하는 자세였다.

“좋아. 죽일 생각으로 덤빌 테니 각오하라고.”

나 역시 현무패웅검을 꺼내들고 동일한 기수식을 취했다.

그렇게 한 판 붙으려는 찰나,

수백 미터 떨어진 소파에 앉아 있던 제르비어스가 꽥 하고 소리를 질렀다.

“수련도 좋고, 다 좋은데!”

녀석의 목소리가 서글픈 메아리를 만들어냈다.

뭔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지 않느냐는 듯이.

“니들이 그러고 있는 동안 나는 뭘 하라는 거냐!”

*

나는 춤에 대해서 잘 모른다. 인간 박상식이었던 시절에는 물론이거니와 용사의 몸에 빙의해서 이 감옥에 떨어진 이후로도 마찬가지로.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아스티나 류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댄스 파트너였다.

“슈바인 스트링거, 확실히 너는 무사 타입이야. 마공에서 마법으로 전환할 때와 그 반대를 시전할 때 미세하게 속도의 차이가 있어.”

훌륭한 댄스 파트너는 상대의 수준에 맞춰줄 줄 안다. 게다가 상대가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는 부분까지 깊은 안목으로 짚어내 준다.

“그건 내 기반이 르팔타커스 시온의 체술이기 때문 아닐까. 그는 검투사였어.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전사에 더 가까웠을 거야.”

“그래서인지 너는 마공을 주력으로 삼고 마법은 그 보조로 생각하는 것 같아. 둘을 동일선상에 놓고 골라 집는 내 전투법과는 다르지.”

“어느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해?”

“우열을 가리는 게 의미가 있겠어? 나는 아빠의 무극파천공과 엄마의 중력 마법을 동일하게 애정하고 있어. 그게 무의식에 깔려 있기 때문에 두 개를 차별하지 않는 거야. 하지만 넌 아니잖아? 너무 의식하지 마.”

“그래. 사부님께서도 초식에 얽매이다보면 발전할 수 없다 하셨지.”

“엄마는 술식 너머를 계산할 수 있어야 뛰어난 마법사라고 하셨었고.”

서로 격렬하게 검을 맞부딪히다가 아스티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마 2층에 두고 온 부모님에 대한 생각이 다시금 마음을 심란하게 만든 모양이다.

“힘들면 잠깐 쉬자.”

“괜찮아. 여기선 지치지 않잖아. 상처도 금방 회복되고.”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지치는 법이니까. 난 제르비어스에게 가볼 테니까 곰인형 만지고 있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아스티나는 투기를 거둔 채 공간을 확장하던 마법을 해제시켰다. 그러자 500미터 너머에 있던 소파가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왔다.

종종걸음으로 다가간 아스티나는 소파에 앉아 곰인형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인형의 머리에 턱을 올린 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

“힝, 너무 좋아.”

한때는 저것이 유아적 퇴행이 아닐까 걱정했었는데, 지금은 그냥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자라온 환경은 살벌한 삼월초원. 아이를 위한 장난감 따위가 있었을 리 없다. 저 정도의 집착은 자연스러운 것 아닐까 싶다.

“용사야! 38편! 38편 블루라이가 보이지 않는구나!”

……물론 여기엔 부자연스러운 집착을 가진 녀석이 한 명 있긴 했다.

폭렬마왕 제르비어스 폰타인. 녀석의 다급한 목소리는 2층에서 들려왔다.

나와 아스티나가 오랜 시간 실전이나 다름없는 스파링을 하며 힘을 키워나갈 동안 이 녀석은 내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쾅!

나는 문짝을 걷어차며 마왕의 뒤통수를 향해 소리쳤다.

“말했잖아. 38편은 내가 못 봤다고! 그리고 블루라이가 아니고 블루레이다.”

“어어엉? 그럼 내가 다음 편을 볼 방법이 없는 거야?”

“여기는 내 기억에 기반해서 만들어진 장소니까 내가 본 적 없는 게 남아 있을 리 없지.”

제르비어스는 마왕군이 전멸했다는 소식을 들어도 이 정도로 슬퍼할까 싶을 정도로 울상을 지었다.

“제기랄.”

“너 말이야, 더 강해질 방법을 궁리하겠다면서 내 방에 처박혔던 거 아니냐? 변신 방법에 대해서 고찰해보겠다면서.”

“용사야, 중요한 것은 변신이 아니었다.”

어?

“진정 내가 추구해야 할 것은 변신합체였던 것이다!”

제르비어스는 내 방 의자에 몸을 구긴 채 앉아 있었는데, 모니터 앞에는 합금으로 만들어진 거대로봇이 외계에서 온 괴수를 때려잡고 있었다.

철왕전기 제트카이저.

마왕은 이 애니메이션 시리즈에 푹 빠져 있었다.

“나의 주먹은 백만 마력으로 불타오른다아!”

시도 때도 없이 제트카이저 파일럿인 훈이의 대사를 내뱉으며 저렇게 외쳐댄다. 그럴 때마다 내 머리는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했고.

“네가 사는 지구에 꼭 방문해보고 싶어졌다, 용사야. 저 자동차라는 운송수단에 탑승하면 거신병으로 변신하는 세계라니. 정말 놀랍다.”

“어…… 그게 말이지.”

녀석은 정말로 큰 오해를 하고 있었다. 지구에 돌아가면 자동차야 썩어날 만큼 많지만 저렇게 이족보행 로봇으로 변신하는 자동차 같은 건 없는데.

하나 사실대로 말해줬다가는 제트카이저 세계관에 잔뜩 몰입해 있는 마왕의 여린 가슴이 큰 상처를 입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저렇게 의욕에 불타오르고 있는데 찬물을 끼얹는 것도 못할 짓 같고.

“마왕 제르비어스가 거신병 제트카이저를 만나면 무엇부터 해야 하지? 으아, 떨리는구만.”

용자물이 대히트를 치던 시절은 오래전에 끝나버렸다. 다시 그 열풍이 돌아오지도 않을 것 같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머나먼 우주의 감옥 한복판에서 어떤 마왕의 심장을 뜨겁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애니메이션 제트카이저의 제작진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좁아터진 곳에서 그러지 말고 나와. 때가 됐거든.”

그렇게 말하곤 책상 위에 놓여있던 리모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붕 떠오른 리모콘은 휘리릭 날아와 내 손에 안착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모니터의 전원을 꺼버리곤 1층 거실로 내려왔다. 입을 쩍 벌린 채 놀라던 제르비어스가 내 뒤를 쫓아 계단을 내려오며 물었다.

“허공섭물의 솜씨가 굉장히 깔끔해졌구나, 용사야. 수련의 성과가 엄청났나 보지?”

“우리가 이 층간구역에 머무른 지 89일이 지났어. 당연히 이 정돈 해줘야지.”

내 스킬목록의 무극파천공과 중력 마법은 각각 Lv. 6까지 성장한 상태였다. 만전불패의 체술과 서로 공명하는 용사전용기 무극참월공 역시 나란히 Lv. 5를 달성했다.

상태창으로 확인할 순 없었지만 곰인형에 볼을 부비고 있는 아스티나의 경지 또한 한 단계 성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 여기에 머무를 순 없어. 단탈리온이 말해줬던 기한이 바로 오늘이거든.”

우리가 세 달 가까이 머물렀던 이 층간 구역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더 이상 실력이 오르지 않는 한계에 봉착할 때까지 폐관수련을 계속할 작정이었다. 폐소공포증과 같은 정신적인 질병의 조짐이 보일 경우 역시 계산에 넣고 있었다.

하지만 단탈리온은 우리가 생각지 못한 제한시간의 존재를 알려주었다.

- 머지않아 용사님과 아스티나 님의 마력이 자동 회복되는 효과가 종료될 겁니다. 이 공간을 설계한 교도관장님께서 그 정도만 설정해 두셨거든요.

그 기간이 바로 세 달 정도였던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던 제르비어스가 이렇게 물었다.

“네가 말했던 그 필살기 말이야, 그건 완성했어?”

그러자 곰인형에 파묻혀 있던 아스티나의 고개가 쑤욱 하고 올라왔다.

그녀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며 싱긋 웃었다.

“거의 완성했어.”

지금까지 내 전투법은 언제까지나 전력투구였다. 이기기 위해선 땅바닥에 구르거나 온갖 꼼수를 쓰는 것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이유는 하나.

결정적인 필살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한에 맞춰서 만들어냈다. 용사전용기의 네 번째 오의를.”

“여기서 보여줄 순 없나?”

“안 돼. 너랑 아스티나가 가까이 있으면 위험해질 수 있거든.”

“오오, 그 정도냐? 3단 변신을 마친 제트카이저의 인피니티 드릴 같은 것인가 보군!”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그 세계관에서 좀 빠져나와라.

*

포탈을 빠져나오자 우리 셋은 곧 낯선 장소에 발을 내디뎠다.

“세상에 이렇게 높이 자라는 나무들이 있다고?”

삼월초원에 떨어졌을 때와는 사뭇 다른 광경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까마득한 높이로 자라난 거목들이 주르륵 늘어선 열대 우림. 화룡도만큼은 아니었지만 찜질방에 들어선 것 같은 열기와 불쾌한 습도.

“여기가 바로 대수림.”

대량의 수목이 밀집되어 만들어진 아마존을 수십 배 확장한다면 이런 광경이지 않을까 싶었다.

나와 제르비어스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수풀이 바람에 스치우는 소리만 귓가를 맴돌 뿐이었다.

“제르비어스, 왜 안 들리지?”

“그러게. 삼월초원에서는 이러지 않았는데.”

교도관이 우리를 주시한다는 내용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무엇보다 줄곧 나를 따라다니던 감시의 시선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3층 교도관의 이름을 기억해보려 애썼다.

“분명 무슨 뱀 어쩌고 했었는데 말야. 이렇게 잠잠하니 또 불안하네.”

“각 층의 교도관들마다 성격이 다를 수 있지. 용사, 네가 느낄 수 있는 거리보다 더 멀찍이서 우릴 관찰하고 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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