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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천재의 탈옥 플랜-81화 (81/300)

#081. 푸르가토나투스 (2)

“찬성 5표, 반대 4표. 아슬아슬했어요. 교도관들은 마검사 아스티나 류를 그대의 등반 동료로 인정하는 것에 합의했습니다. 형량이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죄수로 해석할 수 없다는 의견이 승리한 거죠.”

나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했더라면 끔찍한 선택의 시간이 되었을 테니까.

“당신이 방금 만나고 온 ‘쟁패를 부르는 나선기둥’은 자신이 찬성표를 던졌다는 걸 꼭 전해달라시더군요.”

“그래? 나를 굉장히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눈치였는데. 내가 잘못 봤나?”

“교도관은 강고한 힘을 가졌으나 자신만의 룰에 지배되는 자들입니다. 나선기둥은 룰을 우회하려는 당신을 처벌하기 위해 다른 교도관들의 항의를 받을 정도로 무리했는데, 결국 그것마저 당신은 이겨냈지요. 승자에게 경의를 보내는 것 또한 그가 스스로에게 약속한 룰일 겁니다.”

곰인형의 어조가 다시 조심스러워졌다.

“앞으론 등반이 더욱 어려워질 겁니다, 슈바인 스트링거. 이미 삵과 나선기둥, 두 교도관들이 당신을 지나쳐 보낸 데다 과정 또한 파격적이었으니까요. 그대가 편법과 꼼수를 즐겨 쓴다는 것을 그들도 알았으니 나름의 대처를 하려 할 겁니다.”

“이렇게 친절하게 경고까지 해주는 이유가 뭐야?”

“아시다시피 저는 당신이 푸르가토리움을 ‘탈옥’하길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같지요. 당신이 등반 도중 죽어버리면 저는 무척 곤란해질 겁니다.”

“우리의 목적이 같다고 사탕발림 하지 마. 나를 탈옥시키려는 진짜 이유에 대해 아직 말해주지 않았잖아. 명심해. 내가 꼭대기 층에 오르게 되면 나를 이 감옥에 가둔 대가를…… 꼭 너에게도 치르게 만들 테니까.”

“부디 그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군요. 그럼 저는 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곰인형이 사라지려고 할 때, 인벤토리 창이 다급히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그 안에 넣어둔 단탈리온이 내게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잠깐, 기다려 봐. 교도관장. 이 마도서가 너에게 할 말이 있나 본데.”

단탈리온은 인벤토리에서 꺼내지자마자 다급하게 페이지를 좌르르륵 펼쳤다.

- 위대하고 존엄하신 아카식 레코드의 관리자시여! 본서는 단탈리안이라 합니다. 몹시도 긴 시간 동안 삼월초원의 마법 서고에서…….

곰인형이 앞발을 들어 고무로 덧대어진 발바닥을 노출시켰다.

“자기소개는 생략하지요, 단탈리온. 당신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그에 도달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필멸자들과의 대화처럼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 아, 확실히 그렇군요.

“앞으로도 그대의 주인을 잘 부탁하지요.”

- 감사합니다, 위대하신 교도관장님.

“그럼 저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곰인형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알에 맴돌던 총기 또한 사라졌다. 평범한 장난감으로 돌아온 것이다.

“가 버렸군. 단탈리온? 대체 무슨 일인지 설명해 주겠어?”

- 방금 교도관장님은 제게 필요한 정보의 열람을 ‘허가’해 주셨습니다. 그걸 막 알게 되어 저는 슬픔과 아쉬움, 그리고 유열에 가까운 희망을 느끼는 중입니다.

“녀석이 허가한 정보가 뭔데?”

- 원래 저는 감옥 바깥에서 모아온 에테르의 막대한 양으로 아카식 레코드에 흡수될 자격을 충분히 쌓았습니다. 하지만 삼월초원에서 용사님의 동료이신 아스티나 류에게 대여되었을 때 블랙홀을 생성하느라 그 에테르의 절반을 잃어버렸지요.

“그래서?”

- 때문에 지금 저의 상태로는 교도관장에게 회수당할 자격을 대부분 상실하였습니다. 다만, 앞으로 용사님이 푸르가토리움을 계속 등반하는 과정에서 지속적인 문답을 통해 재충전하게 되면 제 숙원이 이루어질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문전박대.

단탈리온의 말을 요약하자면 녀석은 방금 교도관장에게 사랑 고백을 거절당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더 멋있어져서 돌아온다면 그땐 데이트를 해주겠다는, 어정쩡한 답을 받은 모양이다.

나에겐 다행이었다.

삼월초원에서 나는 단탈리온의 덕을 한두 번 본 게 아니었다. 앞으로도 녀석의 지식에 기댈 수 있게 되었으니 시름을 덜게 되었다.

“기운내라, 단탈리온. 너를 꼭대기 층까지 데려가주겠다고 약속한 건 반드시 지킬 테니까.”

- 네. 저는 전지의 마도서. 용사님이 제게 하신 약속에 한 치의 거짓도 없음을 압니다.

그런데 단탈리온은 책을 덮지 않고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인간으로 치면 뭔가 생각났다는 듯 한 마디를 급히 더하는 모양새였다.

- 그리고 교도관장님께서 제게 허가하신 중요한 정보가 하나 있습니다. 이건 그분께 대가를 미리 받았으니 용사님께 알려드려도 마력이 소모되실 일은 없습니다.

“뭐지?”

- 푸르가토나투스. 그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용사님께 알려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흠칫 놀라며 아스티나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교도관장의 의식이 빠져나간 곰인형을 헤벌쭉 만지고 있다가 내 시선을 오해했는지 손을 다시 거두었다.

푸르가토나투스.

7대 천마 설공이 아스티나를 가리키며 내뱉은 말이었다.

- 그것은 이 감옥 푸르가토리움과 나투스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나투스(Natus)는 이 감옥의 언어체계에선 일종의 고유명사로서 보통 3개의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각각 어떤 뜻을 갖고 있는데?”

- 태어나다, 만들어지다, 빚어지다.

뉘앙스로 따져보면 영어 단어인 ‘Born’과 비슷하게 해석될 수 있는 단어인 것 같다.

푸르가토나투스.

감옥에서 태어난 자.

‘예언의 아이. 푸르가토나투스(Prugato-Natus)는 결국 우리의 손에 들어올 것이다. 절대 벗어날 수 없다.’

설공의 그림자는 최후의 순간 내게 이런 경고를 남겼다.

차근차근 생각해보자.

1. 설공은 아스티나를 가리켜 예언의 아이라고 했다. 그녀의 스킬 목록에 예언이나 미래시 같은 건 없으므로 예언을 사용할 수 있는 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예언에 언급된 아이’라고 해석하는 게 타당하다.

2. 여기서 설공은 예언을 내린 당사자가 아니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만약 본인이 예언을 받았다면 ‘내 예언이 맞았군’ 따위의 반응을 보였겠지.

3. 우리라는 표현으로 미루어봤을 때 예언의 아이를 탈취하고자 하는 세력은 다수를 형성하고 있다. 설공 하나만 하더라도 엄청난 강자인데, 그런 절대고수가 누군가의 명령을 받아 삼월초원에 강림한 것이라면 그 집단의 무력은 대단할 것이라 예상된다.

4. 화룡도에서 올쿠레 어르신은 르팔타커스 시온을 가리켜 푸르가토리움의 최고층인 9층에 올랐던 유일한 죄수라고 설명했었다. 즉, 8층에는 아직 파천황의 위업을 따라잡지 못한 등반죄수들이 차단봉 내려진 톨게이트처럼 정체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5. 그렇다면 그들이 푸르가토나투스를 원하는 이유도 두 가지 정도로 축약해볼 수 있다. 감옥에서 태어난 자가 9층의 문을 여는 데 필요하거나, 탈옥을 달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라는 가능성.

내 추측을 이야기하자 듣고 있던 제르비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몇 개의 억측이 섞여 있긴 하지만 일단 논리적으로는 아귀가 맞는 것 같다. 용사 네놈이 탈옥을 하기 위해선 8층의 세력과 충돌하게 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인 것 같군.”

“그렇겠지. 물론 그 중간에 있는 층을 무사히 돌파한다는 가정 하에 일어날 일이겠지만.”

“다른 건 몰라도 설공은 내 거야, 슈바인. 다른 누구에게도 양보할 생각은 없어.”

아스티나는 복수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며 그렇게 말했다.

원래 부모의 원수라는 것은 인간이 품게 되는 모든 원한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강렬한 것이다.

거기에 더해 아스티나는 시간선을 거듭 회귀하면서 한 사내에게 천마와 마녀를 수천 번 잃어야 했다.

“그래. 설공에 관해선 네 염원을 존중할게.”

“지금 여기에서 약속해줘. 내가 설공에게 죽더라도 철저히 내 검에 맡겨주겠다고.”

“……설마 우리의 힘도 빌리지 않고 혼자서 설공을 상대하겠다는 거야? 여긴 감옥이야. 목숨보다 승부를 우선시하는 협객의 세계가 아니라고.”

나는 탈옥을 위해서라면 일대다로 싸우는 비겁한 습격도 얼마든지 감행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탈옥이 아니라 복수를 위해 나와 함께 하는 아스티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난 협객의 세계에서 태어난 여자야. 설공에게 핏값을 받아내는 건 오로지 내 몫이라고. 내가 그에게 패해서 죽는다면…… 그땐 내 복수를 갚겠다고 나서도 상관 않겠지만.”

나는 당장이라도 청룡패웅검을 뽑아들 것 같은 아스티나의 서슬 퍼런 기세에 눌려 결국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그때, 제르비어스가 냉장고를 가리키며 말했다.

“복수도 좋고, 계획도 좋은데 일단 눈앞의 보상을 챙겨야 하지 않나.”

그렇군. 하마터면 까먹을 뻔했다.

나는 냉장고로 저벅저벅 걸어가 냉동칸의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르팔타커스의 귀가 놓여있었다.

“어휴, 이러다가 언젠가 파천황의 눈알이나 고환을 만져야 하는 건 아닌가 몰라.”

나는 투덜댔으나 망설이지 않고 귀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르팔타커스 시온의 유해 일부를 되찾았습니다.]

[당신을 가호하고 있는 파천황의 권능이 한층 두터워집니다.]

[권능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가 한 단계 진화합니다. 이제부턴 친구 여러 명과 단체 텔레파시가 가능해집니다.]

단체 텔레파시.

3층부터는 이 권능으로 거리에 상관없이 집단 귓속말을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게임으로 따지면 파티원과 실시간 통신을 가능케 해주는 업그레이드였다.

“이건 유용하겠어.”

첫 번째 층간구역 냉동고에서 발견한 유해가 순간이동 횟수를 늘려준 것이 삼월초원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어쩌면 파천황은 다음 층에서 내가 맞닥뜨려야 할 시련에 도움이 될 권능을 예상해 이런 안배를 한 건지도 모르겠다.

‘한 번에 다 주면 좀 덧나나 싶지만.’

그래도 투덜댔다가 권능을 다시 가져가면 큰일이니만큼 르팔타커스에 대한 묵념을 잊지 않은 뒤 냉장고 문을 닫았다.

“좋아. 그러면 속히 다음 층으로 올라가자.”

그렇게 계단을 올라가려는데 아스티나가 나를 막아섰다.

“다음 층으로 가기 전에 제안할 게 있어, 슈바인.”

“어? 뭔데?”

“네가 자유롭게 무극파천공과 중력 마법을 내게서 빌려 쓸 수 있다는 건 알아. 하지만 그 위력은 내 절반밖에 되지 못하잖아?”

그렇다.

태어나면서부터 두 부모에게 엘리트 교육을 받은데다 넘쳐나는 재능을 가진 아스티나.

그에 비해 나는 그 과정을 받은 시간이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다행히 이 공간에는 아무도 우리를 방해하는 사람이 없어. 충분히 강해질 때까지 대련하면서 경지를 갈고 닦는다면 3층에서의 생존에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

“폐관 수련을 하자는 거야? 하지만…….”

나에겐 느긋하게 경지를 갈고 닦을 시간이 없다.

언젠가 탈옥에 성공하더라도 그것이 100년 뒤이거나, 500년 뒤라면 낭패다. 지구에 생환하더라도 여동생인 상희가 무덤 속에 있을 경우 그것을 어떻게 견디란 말인가.

그런데 아스티나는 내 우려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단탈리온의 힘을 빌리긴 했어도 나는 블랙홀을 만들어냈던 중력 마법사이기도 해. 시공간의 밀도를 읽어낼 수 있지. 무슨 원리로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있는 이곳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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