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 푸르가토나투스 (1)
“으아아아악!”
폭렬마왕의 비명소리가 삼월초원에 널리 퍼졌다.
내가 마왕의 손가락을 깨물어 녀석을 깡총깡총 뛰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둘의 사이가 정말 좋구나.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이상한 포인트에서 흐뭇해하는 마녀에게 대꾸해주려는 순간.
내 혈관을 싸늘하게 만드는 음성이 초원에 울려 퍼졌다.
[2층의 교도관 ‘쟁패를 부르는 나선기둥’이 화신체를 만들어냅니다.]
드디어 납시는구나.
이 깐깐한 교도관 녀석.
나는 현무패웅검의 손잡이를 붙잡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2층 교도관이 어떤 생명체의 모습으로 나타나든 놀라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면서.
‘나와라. 딱 한 대. 한 대만 패주겠다.’
그런데 나를 포함한 모든 죄수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1층에서와 마찬가지로 교도관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반응이 온 것은 내 인벤토리였다.
강제로 인벤토리창이 열리더니 내가 집어넣어 두었던 아이템 하나가 뿅! 하고 튀어나왔다.
“등반죄수 슈바인 스트링거, 너를 안내하겠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내 눈 앞에 둥둥 떠 있는 것은 펜이었다.
마도서 단탈리온을 종이로 삼고 전략을 쓰며 구상하는 데 사용한 펜.
얼마 전 제르비어스와 나눴던 짤막한 대화가 뇌리를 스쳤다.
‘용사, 그 펜은 어디서 난 거냐? 화룡도에서 꽁쳐온 건 아닐 테고.’
‘백묘탑의 마법 서고인 유진 쿤딜리니에게 빌려왔어. 내가 실전에만 강하고 이론이 약해서 학습 도구가 필요하다고 하니 선뜻 빌려주던걸.’
저 멀리서 내게 펜을 빌려주었던 ‘섬광의 마도사’ 유진 쿤딜리니의 경악하는 표정이 보였다. 그녀 역시 자신이 내게 빌려준 펜이 교도관의 화신체였을 줄은 미처 몰랐던 눈치다.
“네가 쟁패를 부르는 나선기둥이냐?”
“그렇다. 이 초원을 설계하고 만든 교도관이 나다.”
그러고 보니 그 크기 때문에 연결 짓는 게 쉽진 않으나 펜의 모양은 어떻게 보면 ‘기둥’과 몹시 닮아 있다. 그리고 분명히 저 펜은 이 삼월초원에 쟁패를 불러왔다.
내가 저 펜으로 기록한 거짓말이 ‘진실’로 구현돼 아스티나와 설공을 불러왔으니까.
“이 빌어먹을 교도관 새끼.”
“분노의 원인을 내게서 찾지 마라, 등반죄수.”
“네가 교도관의 권능으로 뭔가 수작을 부린 거잖아. 그게 아니었다면 내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아스티나가 그 지독한 고통을 겪지 않았어도 되었을 거라고.”
“내가 힘을 쓴 것은 네가 만들어낸 인과의 끈에 몇 올을 추가한 것뿐이다. 거짓말로 내가 설계한 시련을 돌파하려 했던 대가라고 생각해라.”
“이 자식이 입만 살아선!”
나는 섬전처럼 현무패웅검을 뽑아들어 녀석을 후려쳤다.
하지만 펜은 여유롭게 몸을 2등분해서 내 공격을 회피하고는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내 화신체엔 입이 없다. 그러니 너의 폭언엔 논리적으로 오류가 있다.”
내가 여전히 씩씩거리자 화신체 나선기둥은 분명한 사실을 주지시켰다.
“포탈이 유지되기까지 4분 31초 남았다, 죄수여. 나와 노닥거리며 낭비하기엔 아까운 시간 아닌가.”
그건 무시하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검을 집어넣고 녀석에게 꼭 묻고 싶은 것을 물었다.
“내가 다음 층으로 올라가면 너는 층장의 열쇠를 걸고 또 쟁패를 일으키게 되나?”
“그렇다. 나는 삼월초원이라는 투기장의 관리자. 네놈이 만들어낸 난장판 때문에 일이 많이 번거로워졌으나 결국에 쟁패는 다시 시작될 것이다.”
나는 포탈 앞에서 나를 배웅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두 스승을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천마는 단전을 잃었고,
마녀는 임부가 되었다.
앞으로 삼월초원의 세력구도가 어떻게 재편될지는 알 수 없으나 전성기의 무력을 잃어버리게 된 그들이 우려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자 화신체가 코웃음을 쳤다.
“너는 파천황 르팔타커스 시온의 가호를 입고 있다. 지금은 그 가호의 크기가 미약하지만 계속 등반을 거듭한다면 또 모르지?”
한 번 지나친 층과 다시 연결되는 방법을 찾아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내게는 희망적인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방금까지 목숨 걸고 싸운 설공 역시 8층에 머무르면서 이 삼월초원에 그림자를 보내지 않았나.
“나에게 반감이 있는 것 치곤 의외로 좋은 정보를 주네, 교도관.”
“인정하고 싶지 않으나 너는 내가 설계한 시련을 통과했으니 패배는 패배. 무엇보다 이 골칫덩이를 다른 교도관들에게도 꼭 선보여주고 싶거든.”
화신체는 귀찮은 불청객을 치워버리듯 펜 뚜껑을 까닥거리며 나를 재촉했다.
포탈 앞에 서자 아스티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이제 작별의 순간이라는 것을 직감하고서는 마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엄마, 지금 뱃속에 있는 아이는 고집이 엄청 세요. 뭔가에 집중하면 주변을 둘러보지 못하고 사고를 치기도 하고요.”
딸의 말에 마녀는 당연하다는 듯 웃었다.
123년 동안 서로에 대한 감정을 감추고 죽일 듯 싸운 부모 밑에서 태어난 아이다. 고집이 강할 수밖에.
“같이 달맞이꽃을 캐러 다니면 한순간도 가만있지 않고 투덜댈 거예요. 하지만 인내심을 갖고 참아주세요. 그 아이는 내심 그 시간을 계속 그리워하게 되니까요.”
그리고 천마 류운학을 바라보는 아스티나의 얼굴은 달라졌다. 그것은 결의에 찬 무인의 눈빛이었다.
“아빠, 8층에 올라가면 설공의 본체가 저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자의 목은 제가 반드시 베어내 오랜 원한을 끊어드릴게요.”
“딸아, 너무 위험하다. 본신의 힘을 다 발휘하는 그자가 얼마나 강할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니라.”
“걱정 마세요. 저는 무극 천마의 딸이자 참월의 마녀의 핏줄이니까요.”
내게 층장의 열쇠를 넘겨준 두 스승은 곧 딸과의 작별인사를 끝내고 나를 바라보았다.
“어…… 저는…….”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한 달 넘게 그들의 제자로 살았다가, 아들이라고 거짓말을 한 입장에서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마녀 일레인은 그런 내 마음을 짐작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의 짐을 내려놓거라.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너는 이 삼월초원을 지켜내었어. 울상 짓지 말고 어깨를 펴도록 하렴.”
반면에 천마 류운학은 턱을 긁적였다.
“그거야 당신은 이 녀석이 우리의 아들일 리 없다는 걸 짐작했으면서 의뭉을 떨었던 것 아니오. 내 경우엔 다르지. 교주를 능멸한 대가를 아직 받지 못했어.”
“사, 사부님.”
“그러니, 제자야. 다음에 다시 만날 때까지 꼭 무탈하도록 하여라. 알겠느냐.”
천마의 그윽한 눈빛을 받으며 나는 목이 메는 느낌에 잠겼다.
천마신교의 교도들이 나를 향해 일제히 포권하였고,
백묘탑의 마법사들 또한 지팡이를 흔들어주었다.
나는 애정을 담아 그들에게 화답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
“어서 오세요, 등반죄수 슈바인 스트링거. 그리고 그의 친구 세 분이시여.”
“설마 매번 층을 오를 때마다…… 우릴 만나러 오는 거냐?”
내가 어릴 적 살았던 이층집의 거실.
교도관장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층간구역.
거기서 한 곰인형이 손을 든 채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도 무척 바쁜 몸이랍니다. 이렇게 한 층만에 다시 현신해야 할 줄은 몰랐다고요.”
나와 제르비어스는 한 차례 이 앙증맞은 모습을 한 교도관장을 만난 적 있으나 아스티나는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엄청 귀여워.”
아스티나의 양볼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하긴, 저 곰인형의 디자인은 유명한 인형 회사가 6세에서 9세 사이의 여아를 타깃으로 내놓은 회심의 모델이었다.
확실히 사랑스러운 디자인이다.
저 귀여운 외양 속에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하는 존재가 숨어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말이다.
아스티나가 날 힐끔 바라봤다.
“손가락으로 찔러봐도 돼?”
“안 돼. 저래 보여도 이 감옥의 관리자라고.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순간 깊은 상실감이 아스티나의 속눈썹에 맺혔다.
“그럼 부둥켜안고 볼을 비비는 건?”
“……왜 정도가 더 심해지는 건데? 어쨌든 다가가지 마. 저 녀석의 목적이 뭔지 알려주기 전엔.”
곰인형이 소파에서 슬그머니 일어나더니 말했다.
“등반죄수 슈바인 스트링거. 저는 교도관들의 긴급 투표 결과를 당신에게 알려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긴급 투표라니?”
“당신이 2층 삼월초원에서 저지른 짓이 뭔지 감을 못 잡으시나보네요? 시련의 규칙을 바닥부터 부숴버리는 바람에 교도관 ‘쟁패를 부르는 나선기둥’을 자극해서 일을 더욱 키워버렸죠. 다른 시간선의 존재를 불러내는 바람에 제가 아카식 레코드의 일시적인 과부하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 한 건 또 어떻고요?”
내용은 투덜대고 있었으나 곰인형의 말투는 왠지 모르게 들떠 있었다. 내가 8층에서 내려온 설공의 그림자에게 죽지 않아서 고무된 모양이지.
“무엇을 갖고 투표했다는 건데?”
“당신이 파천황의 권능을 남용했다는 항의가 빗발쳤거든요. 기억하십니까. 당신이 한 층에서 다음 층으로 데려갈 수 있는 죄수는 오직 한 명으로 제한하겠다고 말씀드린 것을.”
“그래. 그놈의 제한 때문에 내가 스승님과 사부님 중 한쪽을 고민하게 만들었으니까. 그리고 난 분명히 한 명만 여기에 데려왔는걸?”
나는 아직도 곰인형을 만져보고 싶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아스티나를 가리켰다.
그러자 곰인형은 팔짱을 낀 채 덧붙였다.
“당신의 인벤토리에 들어 있는 마도서 단탈리온을 빼놓으면 안 되지요. 그 불길한 책은 자신이 있던 세계를 통째로 멸망시킨 주인공. 움직일 수 없는 서적의 형태이므로 족쇄를 채울 필요가 없었을 뿐, 엄연히 푸르가토리움의 죄수입니다.”
앗.
그러고 보니 녀석은 방금 전 우릴 보고 분명히 ‘슈바인 스트링거와 친구 세 분’이라고 말했었다.
단탈리온까지 계산에 넣어야 한다는 말인가.
나는 재빨리 곰인형의 말에 반박했다.
“그럼 네 말에는 두 가지의 허점이 생긴다, 교도관장.”
“오호라. 뭐지요?”
“첫 번째. 나는 단탈리온에게 친구신청을 하지 않았어. 녀석에게 파천황의 권능을 사용해 스킬을 빌리지도 않았고. 왜냐하면 빌려올 스킬이 없으니까.”
“계속해 보세요.”
“두 번째. 거꾸로 아스티나 류의 손목엔 나와 제르비어스가 차고 있는 수갑이 없지. 그럴 수밖에. 아스티나는 감옥 안에서 태어난 인간. 죄수가 아니야.”
단탈리온은 죄수이지만 아이템이기도 하다.
아스티나는 내 친구목록에 올라 있으나 죄수가 아니다.
즉, ‘한 층당 한 명의 죄수만 데려갈 수 있다’는 교도관장의 규칙을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면 빈틈이 생긴다.
스킬을 빌리는 자를 제한한다면 단탈리온은 제외.
스킬에 상관없이 죄수 한 명으로 제한한다면 아스티나가 제외.
곰인형은 못 당하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정답입니다. 그래서 교도관들 또한 의견이 분분했던 거지요. 그래서 열 교도관들이 모여 이 사태를 어떻게 처리할지 투표한 겁니다. 아, 참고로 0층 대기실의 교도관은 기권했습니다. 귀찮다는 이유로요.”
나태에 짓눌린 쥐. 그래, 그 녀석다운 반응이다.
남은 교도관의 숫자는 홀수인 아홉.
투표 결과에 따라서 나는 아스티나와 단탈리온을 두고 양자택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잔뜩 긴장한 채 물었다.
“그래서, 투표 결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