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9. 마녀들의 가계도 (4)
‘단순한 전쟁병기라 할 수도 없어.’
그것은 가축보다도 참혹한 삶이다. 마녀 일레인 쿠디슈와 그 동지들은 그런 세계 속에서 생존해왔던 것이다.
마녀가 지금의 저 온화한 얼굴 속에 얼마나 커다란 고통을 숨겨왔을지 감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마녀에게 잉태는 곧 축복이자 공포입니다. 그래서 충분히 삶을 살고 난 다음 짝을 만나 가족을 이루지요. 언제 죽어도 괜찮도록. 그리고 언젠가부터 마녀들이 아들을 낳는 일이 적어졌습니다. 결국엔 그 어떤 마녀도 아들을 낳지 않게 되었지요.”
“어째서?”
“그 이유는 저도 모릅니다. 추측만 할 뿐이에요. 어쩌면 대를 이어 마녀들이 소원을 빈 것이 아닐까 하고. 부디 딸을 낳게 해주세요. 차라리 내 목숨을 거두어가되 부디 자식만큼은 죽이지 않도록 해주세요. 이렇게 거듭 빌었겠지요. 신이 등진 어둠속에서 자란 마녀들이 그 신의 등을 보며 매일 빌었겠지요.”
그래서 아들들은 태어나지 않았고, 오직 딸에서 딸에게 이어지는 피의 연대기가 만들어졌다.
마녀가 아스티나에게 한 발짝 더 다가섰다.
이번엔 어느 쪽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니 마녀는 자연히 모계 사회가 됩니다. 자매가 출산을 치르고 죽으면 그 딸을 모두가 거두어 함께 키우지요.”
백묘탑의 마법사들이 참월의 마녀를 어머니라 부르는 이유. 마녀가 그들을 형제와 자매라 부르는 이유.
그냥 단순하게 만들어진 규칙이 아니었다.
“마녀사회에선 모두가 딸이오, 모두가 어머니. 하지만 우린 자신을 낳아주고 마력을 전해준 친어머니의 이름만큼은 절대 잊지 않기 위해 간직해요. 그 이름을 본인의 딸에게 붙여주지요.”
아스티나가 숨을 멈추는 게 느껴진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단번에 정리한 순간, 나는 상상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어떻게 될까.
마녀 A가 B라는 딸을 낳고 죽는다.
자라 마녀가 된 B는 자신의 딸에게 어머니의 이름 A를 선물한다. A는 또 B를 낳고 B는 또 다시 A의 어머니가 된다.
우로보로스(Uroboros).
무한한 순환.
결국 마녀의 가계도는 한 쌍의 이름이 돌고 도는 형국이다. 서로의 꼬리를 문 두 마리의 뱀처럼.
“그렇게 대를 건너 이름을 대물림하는 것이 마녀의 힘을 유지하기 위한 의식이라 했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어머니를 죽이도록 만들어진 피조물. 그럼으로써 단 한 번도 어머니에게 안겨볼 수도, 어머니를 안아볼 수도 없는 존재이지요. 딸은 어미의 품에 안겨 칭얼댈 수 없으며, 어미는 딸의 이마를 쓸어내리며 자장가를 불러줄 수 없는 숙명을 갖고 태어난답니다.”
마녀 일레인이 부드러운 동작으로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아무런 저항 없이 흑기사의 투구가 저절로 벗겨졌다.
달빛 아래 더욱 찬란히 빛나는 은빛의 머리카락이 해방되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이름을 딸에게 주는 거예요. 딸이 뱃속에 있는 그 짧은 시간만이라도 이름을 불러줄 수 있으니, 자신을 낳고 죽은 어머니의 이름을…… 그때라도 불러주는 거예요.”
분위기가 무거워진다. 아랫배가 뜨거워진다.
그렇다면 마녀 일레인에게 있어 어머니의 이름은…….
“아스티나. 그래요. 내 어머니의 이름은 아스티나입니다.”
일레인이 아스티나의 볼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녀의 딸은 잔뜩 얼어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그 손을 결코 피하지는 않았다.
변조된 음성이 아닌 아스티나의 본래 목소리가 입술에 맴돌았다.
“저, 저는…….”
“이 감옥에 갇힌 지 어언 123년. 바깥에서의 많은 기억들은 잔불이 쓸고 간 잿더미처럼 희미해졌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화인처럼 더 강렬해지는 기억들도 있지요. 내 어찌 잊겠습니까. 나를 낳아준 어머니의 이름을.”
흑기사의 갑옷이 줄어들며 아스티나의 손목방패로 줄어들었다.
후들거리는 그녀의 다리를 보니 알 수 있었다. 갑옷의 무게를 지탱할 만큼의 힘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어쩔 수 없었어요. 두 분과 가까이 가게 되면 제가…….”
마녀는 아스티나의 볼을 감싸 안은 손에 힘을 주어 당겼다. 마녀의 딸은 거기에 저항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찌 몰라보겠어요. 기억에 없다 해도 내가 낳았을 딸의 얼굴을.”
“엄마…… 어, 엄마.”
“아스티나. 사랑스런 내 딸. 이렇게나 건강하게 자라주었군요.”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엄마.”
“나는 축복받은 마녀입니다. 수천 년의 세월동안 그 어떤 마녀도 갖지 못했던 걸 가졌으니까요. 이루지 못하고 소망하기만 했던 꿈을 이루고 있으니까요. 장성한 딸을 품에 안고 이름을 불러줄 수 있으니까요.”
딸은 통곡하고, 어머니는 미소 지었다.
마녀가 있었던 참혹한 세계에서 신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단탈리온에게 물으면 알려줄까.
교도관장을 붙잡고 닦달하면 들려주려나.
하지만 그 신의 이름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오늘의 이 순간을 보았더라면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수천 년의 피로 물든 마녀들의 가계도가,
오늘 이 감옥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
내 눈앞에는 여명의 예고장을 받아 보라색으로 덧칠해진 삼월초원이 있었다.
교복을 입은 상희가 나를 보고 서 있었다. 심마가 만들어낸 환영의 모습 그대로.
하지만 이번에는 심마와 상관없이 그냥 내 뇌가 만들어낸 허상이다.
그래서 상희는 내 기억 속에서처럼 환히 웃고 있었다.
‘떠나는 게 아쉬워?’
그러게. 화룡도 이후에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번 층에서도 뭔가 미련이 남나 봐. 무공과 마법을 익혔고, 죽을 뻔한 위기도 여러 번 넘기고.
‘진짜 하고 싶은 말을 해. 오빠가 구해준 아저씨를 보고 우리 부모님이 생각났겠지.’
……거짓말을 못하겠네. 지금의 너는 내가 보고 싶어 만들어낸 환상이니까.
‘후훗. 너무 자주 불러내진 마. 마음이 약해지면 주저앉게 되거든.’
두 스승님처럼 말하네. 안 어울려, 박상희.
‘자칫하면 실패할 뻔했던 거 알지? 오빠는 오빠가 되게 냉철하고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어? 아니야?
‘은근 욱하는 성격이 있잖아. 그래서 충동적으로 뭔가를 결정하고 그 다음에 필사적으로 뒷수습을 하곤 해. 남겨진 사람은 당연히 걱정하게 된다고.’
다음 층에서는 더 조심할게. 욱하지 않으려고도 해보고.
‘그래도 잘했어. 내가 하늘에 있는 엄마랑 아빠한테도 그렇게 칭찬해둘게.’
야, 너 아직 바깥 세계에서 살아 있잖아. 왜 돌아가신 부모님이랑 같은 세계에 있는 것처럼 얘기하냐.
‘어차피 환상인데 이 정도 드립은 칠 수 있지.’
하나도 안 웃겨.
‘오빠가 만들어낸 환상이니까 이 유머센스는 오빠한테서 비롯된 거거든. 자승자박하지 마시오.’
그렇게 말하며 상희의 환영은 혀를 빼꼼 내밀었다.
실제 내 여동생은 어른스럽고 의연해서 저런 모습 같은 건 아홉 살 이후로 보여준 적 없다. 아마 지금의 내가 위로를 받고 싶다는 거겠지.
‘이제 가봐. 뿔 달린 아저씨가 오빠를 실성한 사람처럼 노려보고 있거든.’
뒤를 돌아보자 제르비어스 폰타인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물었다.
“단탈리온이랑 말하고 있는 거냐? 아니면 교도관? 뭐래?”
“아니야. 그냥 혼잣말 하고 있었어.”
“……가뜩이나 허공에 중얼거리는 것에 이제 겨우 적응하려는 참에, 혼잣말까지 추가하는 거냐. 제발 그러지 마라.”
“알았다.”
나는 제르비어스의 뒤를 따라갔다.
다시 초원을 돌아봤을 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포탈 앞에 서자 삼월초원의 모든 죄수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스로 울음을 그친 아스티나가 천마와 마녀의 다독임을 받고 있었다.
나와 마왕을 발견한 마녀 일레인 쿠디슈가 스르륵 다가왔다.
“그대는 마족인가?”
그녀가 말을 건 상대는 내가 아니었다. 제르비어스는 평소처럼 뒤로 빠져 있다가 얼이 빠진 채 대꾸했다.
“어? 어, 그렇다.”
“그것도 고위 마족으로 보이는데.”
마왕이 나를 쳐다보자 나는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숨길 필요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나는 폭렬마왕 제르비어스 폰타인. 1층 화룡도의 층장이었다가 지금은 이 녀석을 거두고 있지.”
“마왕이라니, 내 예상대로군.”
입을 가리고 웃은 참월의 마녀가 예상치 못한 요구를 해왔다.
“그럼 요청하건대, 마왕이여. 내가 그대를 한 번 만져 봐도 되겠는가?”
영문 모를 요청이었다.
내가 지금껏 지켜본 일레인답지 않은 엉뚱한 모습.
“만지겠다고? 나를?”
제르비어스는 자초지종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마녀는 기다리지 않고 녀석에게 손을 뻗었다.
나는 다급히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막아 세웠다.
“스승님! 큰일 납니다. 이 녀석은 걸어 다니는 독극물이나 다름없어요. 만지면 저주에…….”
“괜찮다, 제자야. 이 스승을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니. 나는 그라비타스 도미누스. 인간보다 마인에 더 가까운 신체를 갖고 있단다.”
부드럽게 내 손을 뿌리친 마녀는 제르비어스의 손목을 붙잡았다. 나는 바짝 긴장했으나 그녀의 얼굴은 아무런 전조도 없이 평온했다.
정말로 마왕과 접촉해도 괜찮은 건가?
“흐음, 대단히 흥미롭구나. 마력 회로를 따로 만들 필요도 없는 천혜의 육체. 그야말로 마법을 위해 태어난 몸이라고 할 수 있겠어. 백묘탑의 간부들이 고전했다는 것도 납득할 만해.”
“그,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만.”
멋쩍은 듯이 뒤통수를 긁고 있지만 나는 제르비어스의 얼굴에 드러난 표정을 알고 있다. 느닷없는 칭찬 세례에 뿌듯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마녀는 손을 놓았다.
“어째서 마왕이 인간에 불과한 내 제자와 함께 다니는가 의아했는데 그대의 심성을 느끼고 나니 충분히 대답이 되었어.”
“나의 심성? 그런 것도 느낄 수 있나.”
“그래. 그대는 마인으로 태어났으나 타고난 심성은 파괴를 싫어하고 평화를 추구하는군. 폭렬마왕이란 별명은 그것을 감추기 위해 붙인 것일 테지.”
뜨끔했는지 마왕의 뿔이 파르르 떨렸다.
마녀는 그 모습에 피식 웃더니 제르비어스의 흉갑을 몇 번 두드리고는 말했다.
“변신에 대해서 너무 고민할 필요 없다, 마왕.”
“……엇?”
“극한의 분노나 목숨을 위협하는 순간이 와야 변신을 할 수 있을 거라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다른 마족이라면 그것이 트리거가 되겠으나…… 그대의 경우라면 다르다.”
갑자기 공손해진 태도로 마왕이 마녀에게 얼굴을 가져다댔다. 난치병을 가진 환자가 대단한 명의를 만났을 때처럼.
“더 자세히 말해줄 순 없겠는가, 참월의 마녀여.”
“나도 그러고 싶다만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많지가 않군. 다만 해줄 수 있는 말은 그대의 본성을 애써 부인하거나 거스르지 말라는 것 정도일까.”
언젠가는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마녀가 마왕을 격려했다. 그러면서 마녀는 반대편 손으로 내 머리를 몇 차례 쓰다듬었다.
“아마 내 제자가 층을 오르는 데 있어 언젠가 그대의 은혜를 입게 될 것 같군. 다행이야. 이렇게 믿음직한 동료가 있어서.”
“별로 안 믿음직해요, 스승님. 백묘탑의 마법 서고에서 이 녀석이 한 짓을 아시면…… 읍읍읍!”
마왕이 잽싸게 내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자 귀신같이 경고 메시지가 눈앞을 어지럽혔다.
[경고. 용사의 축복받은 신체와 상극인 존재와 접촉했습니다. 신체 접촉 시간이 지속될 경우 저주 상태에 접어들 수 있습니다.]
아, 이제 저주는 정말이지 사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