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 마녀들의 가계도 (3)
파르락.
그때, 땅바닥에 던져둔 마도서가 펼쳐지더니 허공 위로 떠올랐다.
나와 류운학의 눈높이에 정확히 멈춰 선 단탈리온은 새하얀 백지에 이렇게 글씨를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 용사님, 본서가 만들어진 이래 당신처럼 고약한 방도로 저를 사용했던 인간은 없었습니다. 정말이지 제가 주인 하나는 잘 골랐군요.
단탈리온은 전지의 마도서.
내가 무슨 짓을 할지 이미 알아챈 모양이다.
“그래. 계획에도 없던 블랙홀에 힘을 뺏기느라 지금 배가 엄청 고프지? 이제부터 내가 배불리 먹여주마.”
류운학에게서 빨아들인 내공이 전신의 혈도를 타고 폭주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내 MP의 한계치인 9,999를 넘어설 기세였다.
나는 단탈리온에게 물었다.
“청성파의 일대종사. 천마신교의 8대 천마. 그리고 지금은 삼월초원의 죄수인 류운학이 있었던 세상. 지금 어떻게 되었지?”
내게 등을 보인 사내가 흠칫 놀라는 것이 느껴진다.
내 질문을 받은 마도서 단탈리온이 그의 눈앞에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 중원무림의 사천성. 정마대전에서 천하제일인 류운학을 비롯해 일대제자 전원을 잃어버린 청성파의 기세는 급격히 기울었습니다. 하지만 뿌리 깊은 나무는 가장 아름다운 가지가 잘려나가도 다시 꽃을 피워 올릴 수 있는 법이죠.
[단탈리온이 당신의 MP를 900만큼 가져갑니다.]
- 세상은 류운학이 7대 천마 설공에게 죽어 십만대산의 설원에 묻혔다고 떠들었습니다. 그러나 청성파의 어린 제자들만큼은 그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지요. 혈겁에 희생된 무림고수들의 잔해에서 오직 류운학의 시신만이 발견되지 않았으니까요.
[단탈리온이 당신의 MP를 1,200만큼 가져갑니다.]
“아들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인 것이냐.”
“저 책이 보여주는 글자들에 집중하세요. 단순한 눈속임이나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것은 진짜로 사부님이 있었던 세계를 들려주고 있는 겁니다.”
- 세상 어딘가에 대사형 류운학이 살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문파의 일대종사와 한 항렬을 통째로 잃어버린 청성파가 다시 바닥에서부터 일어설 수 있는 원동력이었습니다. 37세의 이른 나이에 장문인이 된 청화진인의 진두지휘 아래 문파는 다시 기틀을 잡아나갔습니다.
[단탈리온이 당신의 MP를 700만큼 가져갑니다.]
- 정마대전 이후 마교는 해체되었고 전란의 후유증 속에서 다시 봄이 찾아왔습니다. 청성파에도 어린 문하생들이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죠. 먼지 낀 현판을 새로 갈고, 기왓장을 갈아 끼운 뒤 울타리도 다듬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대사형 류운학의 무사귀환을 기다리는 일종의 의식이었겠지요. 하지만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갔고 점차 그의 존재를 기억하는 이들이 세상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단탈리온이 당신의 MP를 3,300만큼 가져갑니다.]
- 어느 날 이른 새벽이었습니다. 청성파의 어린 삼대제자 도겸이 졸린 눈을 비비며 마당을 쓸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늘에서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을 본 도겸이 멍하니 입을 벌리고 소원을 빌려 하던 그때였습니다.
[단탈리온이 당신의 MP를 2,100만큼 가져갑니다.]
- 도장 전체가 굉음과 함께 진동했습니다. 장문인이 있던 청진각 앞에 내려 꽂힌 것은 검집 안에 담겨져 있던 푸른색 보검이었습니다. 일대 소란이 일어나고 장로와 장문인, 수련생들까지 몰려 나와 그것을 신기하게 바라보았습니다. 한 장로가 그 검의 정체를 알아봤지요. 그것은 실종된 대사형 류운학의 애병이었습니다. 모든 도장들이 일대를 샅샅이 찾아다녔으나 끝내 그 검을 던진 것이 누구인지는 알아내지 못했지요.
[단탈리온이 당신의 MP를 1,700만큼 가져갑니다.]
“사부님, 당시를 기억하십니까?”
“암. 기억하고 말고. 무극파천공을 극성까지 익히고 나와 마교의 잔당들을 처리하기 위한 혈행을 결심했을 때였다. ……미련이 남았던 게지. 내 평생 다시는 푸른 도복을 입지 않기로 맹세했건만 차마 검만큼은 마교의 소굴에 버려두고 올 수 없었노라.”
“그래서 아무도 없는 새벽에 숨어들어 검을 던지고 나오신 거군요.”
“대단한 의미는 없었다. 내 손으로 검을 버릴 수 없으니 후학들이 처리해주기를 바랐을 뿐.”
“지금은 어떤지 한 번 보여 달라고 해볼까요?”
그러자 지금껏 글자로만 이야기를 풀어가던 단탈리온이 페이지를 새로 넘겼다.
잠시 후 종이의 상단에서부터 흑백의 수묵화가 피어났다.
잎사귀를 무성히 품은 나무가 청성파의 도장 가득히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어린 소년이 때 묻은 도복을 입고 그 그늘 아래서 잠을 자고 있었으며,
나무의 밑기둥이 녹슨 검 하나를 아늑하게 품고 있었다.
그것은 한 사내가 그 세계에 존재했었다는 분명한 징표였다.
[단탈리온이 당신의 MP를 3,000만큼 가져갑니다.]
“아름답도다. 정말이지…… 더할 나위가 없구나.”
눈앞의 사내가 정마대전에서 살아남아 천마가 된 것은 아무도 모른다.
그 천마가 가장 먼저 한 것이 무림의 야인으로 살던 마교의 잔당들을 사냥하는 일이었다는 사실 역시 아무도 모른다.
그가 지나치게 많은 살생을 거듭한 끝에 우주 어딘가의 감옥에 잡혀왔다는 것 또한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무지가 허용되는 그 평화를 물밑에서 길어 올린 것은 분명 이 고독한 무인의 유산이었다.
“고맙다, 아들아.”
류운학의 호흡은 이제 많이 안정되어 있었다. 단전의 폭주는 가라앉았고, 내게로 넘어오는 내공의 양 또한 줄어들었다.
그와 나의 자세는 마치 노회한 스승이 어린 제자에게 모든 내공을 전수해주는 것 같은 꼴이었다. 수많은 무협소설이나 무협영화에서 단골로 나오는 장면.
그런데 이 장면에서 바뀐 것이 있다면 하나.
“우습구나. 원래대로라면 스승이 제자의 뒤에 있어야 하거늘.”
“네. 그리고 제가 내공을 빨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물려받아야 했겠지요. 뭐, 어때요. 천마신교의 교주와 소교주에게 어울리는 파격이잖아요? 하핫.”
이미 고비는 넘겼다.
귀혼산장의 주인이자 나의 스승은 죽지 않을 것이다.
[이름: 슈바인 스트링거]
[MP: 9,999/9,999]
[이름: 류운학]
[MP: 10/10]
지금으로부터 몇 주 전.
건방지게 그를 찾아가서 제자로 받아달라며 내기를 걸었을 때.
오만하게 웃어젖히던 천마와 단전도 개통 못해 쩔쩔매었던 나의 위치는,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끝났습니다.”
단탈리온의 페이지는 덮여졌고 나 역시 흡성대공의 시전을 멈추었다.
류운학의 등에서 손을 떼자 그가 천천히 뒤돌아 나를 마주보았다.
이제 그는 내공을 쓰지 못한다.
아무리 긴 시간이 흘러도 예전의 무위를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목소리는 가벼웠다.
“다시 태어난 기분이구나, 아들아.”
“그렇습니까.”
지금의 류운학은 좁쌀만큼의 내공밖에 갖지 못했으나 그 어떤 풍랑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단단해 보였다.
그래서 그만 나는 충동적으로 고백하고 말았다.
“저는 지금까지 줄곧 사부님을 속여 왔어요.”
“무슨 말을 하는 게냐.”
“사실 저는 당신의 아들이 아닙니다.”
*
[잠시 후 삼만월의 밤이 끝납니다. 등반을 선언한 죄수는 태양이 떠오르기 전에 포탈로 진입하십시오.]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이 많지 않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여전히 황망해하는 류운학을 데리고 마녀에게로 걸어갔다.
“여보, 괜찮은 거예요?”
“그렇소. 기적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지만…… 일단은 고비를 넘긴 것 같소.”
사별의 각오를 하고 있던 두 부부는 감격의 포옹을 나누었다.
하지만 미래에서 온 그들의 딸은 그 상봉에 끼어들지 못했다. 흑기사의 갑옷을 입은 아스티나는 어정쩡한 자세로 먼발치서 우리 셋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스티나 류가 류운학과 일레인 쿠디슈와 화목했던 한때를 보낸 것은 그녀의 시간선에서 대체 몇 년 전의 과거였을까.
무거운 갑옷만큼이나 켜켜이 쌓인 세월이 그녀를 붙잡아 세워두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게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나보다 먼저 움직인 것은 참월의 마녀였다.
“거기 서 있는 기사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마녀가 다가서자 아스티나는 흠칫 놀라며 두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마녀는 걸음을 멈추었지만 충분히 대화를 할 수 있는 거리가 만들어졌다.
“당신이 전투에 참여한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부부와 삼월초원 전체에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준 것이지요.”
“……저는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이름을 알려줄 수 있겠어요?”
마녀의 질문에 아스티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뒤를 따라온 천마 류운학도, 내 옆에 내려선 제르비어스도 둘의 대화에 감히 끼어들지 못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흑기사의 투구에서 변조된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스티나.”
“예쁜 이름이군요. 나이가 어떻게 되지요?”
“열여덟입니다.”
“저런. 그렇게 어린 나이에 이 감옥을 떠돌고 있었나요. 부모님은 지금 어디 계시지요?”
“……돌아가셨습니다.”
그녀는 눈앞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었다.
한 번 일어난 일도 아니었다.
수천수만 번을 되풀이하며 부모의 죽음을 지켜봐야만 했다.
내가 말문이 막힌 채 두 여인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는데, 문득 마녀가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저는 마녀랍니다. 제가 있던 세계에서 마녀는 끔찍한 방법을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생물병기. 자연적으로는 결코 소멸되지 않는 마력을 갖게 되며 그것은 자식을 통해 대물림됩니다.”
그것은 얼마 전 내가 들었던 이야기.
그리고 아주 오래전 아스티나 역시 알게 되었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마녀는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마녀가 혼인하여 태어난 것이 사내아이라면 그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습니다. 탯줄로 전달되는 마력의 성질을 견디지 못해 숨지게 되지요. 마녀가 생성되는 방식의 부작용입니다.”
처음 듣는 얘기에 나는 움찔했다.
마녀의 이야기는 한 가지 충격적인 사실을 내게 시사했다.
‘속지 않았던 건가?’
내가 미래에서 온 자신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했을 때, 마녀는 결코 이렇게 반박하지 않았다.
나는 홀린 듯이 마녀에게 물었다.
“태어난 아이가…… 여자아이여야만 한다고요?”
“마법을 작동하게 하는 땔감은 원념이요, 그 땔감에 불을 붙여 타오르게 하는 것은 의지입니다. 아이가 태어날 때는 어머니는 물론 그 딸에게도 갖은 원념을 불태우는 대폭발입니다. 마법과 상관 없는 평범한 여성에게도 출산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 마녀의 숙명을 이기고 태어나야 하는 아기에게도 마찬가지. 마녀와 그 딸은 강력한 고양감 속에서 연결돼 있지요.”
하지만 마녀는 결코 가족을 이룰 수 없다.
전쟁에 투입되는 병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더 강한 마력을 새 생명에게 전이시키기 위해서 아이가 태어난 그 자리에서 충만감을 갖고 있을 어머니를 죽입니다. 그러면 한껏 증폭된 마력이 탯줄로 이어진 딸에게 전이되니까요.”
삼월초원 전체에 충격의 파도가 일어났다.
아들을 낳으면 아들이 죽는다.
딸을 낳으면 자신이 죽는다.
이럴 수가. 이보다 끔찍한 이야기가 어딨단 말이야. 마녀들의 가계도는 피로 물들 수밖에 없다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