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7. 마녀들의 가계도 (2)
저벅저벅.
그래비티 프레셔가 온몸을 짓누르고 있을 텐데도 설공은 뚜벅뚜벅 우릴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이런 걸로…… 본좌를 막아설 수 있을 것 같은가.”
설공은 아스티나에게 있어 공포의 대상.
그래서 아스티나의 역할에서 접근전만큼은 철저히 배제했다. 애초에 목표물인 그녀가 설공에게 가까이 가는 것 자체가 큰 리스크를 짊어지게 된다.
“사부님?”
그런데 설공을 막아서야 할 류운학의 상태도 심상치 않았다. 땅에 꽂은 목검에 의지해 비틀대고 있는 것이다.
뛰어난 정신력이 기진맥진한 육체를 가까스로 붙잡아 세워두고 있을 뿐이다.
내 예상보다 류운학의 한계가 더 빨리 찾아왔다.
‘설공을 저렇게 자유롭게 둬선 안 돼.’
어쩔 수 없이 다른 임기응변을 떠올려야…….
“슈바인 스트링거. 네가 나의 조커라고 했지?”
그런데 순간 흑기사의 투구가 내 얼굴을 향했다.
“갑자기 그건 왜?”
“조커를 믿고 올인을 하는 건 어리석은 행위일 거야. 하지만…….”
아스티나 앞에서 회전하고 있던 마법진이 사라졌다. 그녀가 스스로 중력 마법을 거둔 것이다.
그러고 나서 흑기사가 품에서 꺼내든 것은 마도서 단탈리온이었다.
“나는 이 도박판에 신물이 났어. 아무리 어리석은 짓이라고 해도 이제는 이판사판이야.”
“뭘 하려는 거야, 아스티나?”
그녀는 대답 대신 단탈리온의 표지 위에 손을 올리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것을 두고 보지 않겠다는 듯 설공이 땅을 박차고 쇄도해 들어왔다. 나 혼자만의 중력 마법으로는 그의 다리를 붙잡을 수 없었다.
설공이 코앞까지 다가와 아스티나에게 손을 뻗으려 하는 그 순간,
[마도제국학파 중력 마법]
[블랙홀 오브 엠프레스(Blackhole Of Empress)]
쿠오오오오오!
설공의 머리 위에 검은 구체가 생성되며 주변의 모든 것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저 구는 무엇이냐. 어찌…… 본좌의 힘과 대등하단 말인가?”
거친 갈기처럼 휘날리던 설공의 머리카락이 하늘 위로 솟구친다.
그는 다급히 허리를 낮춰 천마군림보를 구사했다. 블랙홀의 인력을 내공으로 뿌리치려는 것이다.
콰콰콰콰콰콰!
곧 탈마지경의 초고수와 흉악한 천체 현상이 팽팽한 힘겨루기를 시작하며 일대를 붕괴시키기 시작했다.
“아스티나, 그만 둬!”
단탈리온의 힘은 막대하지만 여기서 블랙홀을 사용해버리면 이번 시간선에서 아스티나는 어느 곳으로도 달아날 수 없게 된다.
무모하다.
어리석은 짓이다.
이건 올인이 아니라 도박판에 신체포기각서를 던진 거나 다름없었다.
“나는…… 삼월초원의 딸이야. 다시는 어느 곳으로도 도망치지 않겠어!”
주사위는 던져졌다.
여기서 멍청하게 판을 무르는 건 최악의 수.
차라리 이 기회를 천금처럼 이용해야 한다.
- 사부님, 지금입니다!
비틀대는 류운학과 눈이 마주쳤다.
사냥감의 심장에 비수를 꽂아 넣을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
- 그래. 여기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사내가 아니지.
마지막 힘을 짜낸 류운학이 궁신탄영으로 솟아올랐다.
쏘아진 화살처럼 비상한 그는 상승의 최고점에서 낡은 목검을 미련 없이 내던졌다. 그러고는 머리 위로 손을 내뻗었다.
쐐애애애액!
자유낙하하던 마검 디아볼릭이 방향을 틀어 류운학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허공섭물.
당장이라도 파멸을 내뿜겠다는 듯 디아볼릭이 맹렬하게 울어댔다.
“이걸로 내 복수는 완성되노라!”
류운학의 사자후가 삼월초원 전체를 울렸고,
다음 순간,
마검이 설공의 상반신을 잘라내었다.
*
후두두둑.
공중에 떠올라 있던 돌멩이들이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진다. 아스티나가 만들어낸 블랙홀이 시전자의 의지에 의해 사라졌기 때문이다.
“잡았다.”
난공불락으로만 느껴졌던 사냥감을 쓰러트렸다.
허리 밑이 잘려나간 채 쓰러져 있는 7대 천마 설공은 공허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본좌가…… 패배한 것인가.”
나는 참혹한 상태의 설공에게 다가가 그의 얼굴에 그늘을 드리워줬다.
“기분이 어떠냐, 죄수 설공.”
“형용키 어렵군. 이것은 진정한 패배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본좌의 본래 육신은 이곳에 있지 않으므로.”
나는 현무패웅검을 그의 목에 가져다댄 후 물었다.
“남길 말은 그게 다야?”
“예언의 아이. 푸르가토나투스(Prugato-Natus)는 결국 우리 손에 들어올 것이다. 절대 벗어날 수 없다.”
우리라니, 그것은 8층에 있을 설공이 혼자가 아닌 ‘세력’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 예언이라는 건 어떤 자식이 남긴 건데?”
설공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웃음의 먼 조상쯤 되는 표정이었다.
“알고 싶다면…… 죄수여, 본좌가 있는 8층까지 올라와보도록 해라.”
“좋아. 그렇게 하지.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딱 기다려라, 복사본.”
나는 망설임 없이 현무패웅검을 휘둘러 설공의 숨통을 끊어주었다.
그의 사체는 회색 먼지가 되어 곧 바람에 흩날렸다. 손잡이만 남아 있던 설공의 검 또한 마찬가지였다.
띠링!
[페널티 퀘스트 #1 ‘설공 살해’가 완료되었습니다.]
[당신은 8층의 죄수 설공의 그림자를 죽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보상으로 1코인이 주어집니다.]
돔을 이루고 있던 마법장이 스르륵하고 사라졌다.
다음 순간 우레와 같은 함성이 귓가를 가득 메웠다.
“천마신교의 소교주가 승리하였다!”
“천마군림! 만마앙복! 소교주 만세!”
지독하게 어려운 퀘스트를 달성했을 때의 흥분감이 가슴에 차올랐으나 나는 차갑게 그것을 내리눌렀다.
승전의 환호성을 내지르기엔 일렀기 때문에.
“사부님…….”
귀혼산장의 주인.
천마 류운학이 내 눈앞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용사의 심안으로 그의 현재 상태를 들여다보았다.
[이름: 류운학]
[MP: ???,???/2,173]
마력의 최대치가 추락에 가까운 속도로 깎여나가고 있으며, 반대로 현재의 마력 수치는 측정 불가로 폭주 중이다.
스스로 깨트린 단전이 흘러넘치는 내공을 붙잡아두지 못하면서, 그 육체마저 잠식해 들어가고 있다.
과분한 불꽃을 피워 올린 대가로 양초는 먼지로 주저앉는 수순을 밟고 있었다.
“여보오!”
마녀 일레인 쿠디슈가 백묘탑의 간부 록시탄의 등에 업혀 날아왔다. 그녀는 마검 디아볼릭을 지팡이 삼아 간신히 쓰러지지 않고 있는 류운학에게 다가갔다.
“당신의 생명력이 점점 꺼져가고 있어요. 대체 왜 그런 선택을 한 겁니까!”
원망이 가득 섞인 목소리.
하지만 류운학은 기운 없는 목소리로 여상하게 대꾸했다.
“울지 마시오, 부인. 자식을 지키고 승천한다는 것은 무인에게 있어 지고의 명예. 쿨럭. 그런데 나는 현재의 아들과 미래의 아들, 둘을 동시에 지켜내고 죽게 되었으니 더는 바랄 게 없소.”
“그러면 나는! 당신 없이 어떻게 우리의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말예요?”
둘에게 다가가려 했던 순간, 새카맣게 칠해진 장갑이 내 팔목을 붙잡았다.
아스티나가 흑기사의 투구 속에서 작게 속삭였다.
“부탁할게. 제발…….”
오직 내게만 들릴 정도로 나직하게.
“아빠를 구해줘. 무슨 수를 써도 좋으니까, 그를 살려줘.”
나는 어설픈 말로 대꾸하는 대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단탈리온을 돌려달라고 했다.
허겁지겁 마도서를 건네준 아스티나의 손길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갑옷 안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거겠지.
“단탈리온, 내 엘릭서를 사부님께 드리면 살릴 수 있어?”
- 용사님의 엘릭서는 체력과 마력을 동시에 회복시켜주는 명약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빈 그릇을 가득 채워주는 약물일 뿐, 깨진 그릇을 다시 붙이지는 못합니다.
“그런가.”
- 엘릭서로 되살리기에 류운학의 상태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입니다.
“회복마법을 써도?”
- 제가 만나본 무수한 신성 마법사가 일제히 이곳에 모인다 하더라도 한 번 박살난 단전을 다시 붙일 수는 없을 겁니다.
내 곁에서 단탈리온이 그려내는 글자를 보던 아스티나가 털썩 주저앉았다.
“안 돼…….”
미래에서 온 아스티나는 설공의 추격으로부터 비로소 해방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어떻게든 지켜내려고 했던 두 부모 중 한 명은 지켜내지 못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스티나.”
“나는…… 나는 이러려고 한 게 아니야. 이런 세상을 바라고 여행을 계속 했던 게 아니라고.”
나는 중얼거리는 아스티나의 어깨를 꽈악 붙잡았다.
“내 말 똑바로 들어, 아스티나 류.”
“어?”
“네가 선택한 조커를 믿어. 사부님의 숨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단탈리온이 그랬잖아.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거라고.”
삼도천(三途川).
무림의 세계관에서 사람이 죽으면 건너가게 되는 강.
지금 류운학은 삼도천에 두 발을 담근 채 생기를 잃어가고 있다.
“설마 방법이 있는 거야?”
아스티나의 목소리에서 미약한 화색이 돌았다.
나는 그녀를 안심시켜주기 위해서 마주 웃어주었다.
“삼도천 그까이꺼. 아무리 깊다한들 내가 사부님의 목덜미를 붙잡아 끌어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
*
단탈리온을 옆구리에 낀 채 류운학에게 다가갔다. 그는 아내의 젖은 볼을 어루만지며 달래는 중이었다.
“제가 왔어요.”
“그래, 아들아. 아비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해 주려는…….”
“아뇨. 배웅은 다음 층으로 올라갈 제 쪽에서 받아야 그림이 맞잖아요?”
천마 류운학.
당신은 아직 죽어서는 안 된다.
“사부님은 살아야 합니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다.
“사부님을 잃는 것은 제 플랜 A에도, 플랜 B에도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저는 제 플랜이 어그러지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어요.”
나는 손짓을 해 마녀를 몇 걸음 물러서게 했다.
“이제부터 저와 사부님의 반경 30미터 이내로 아무도 접근하지 마세요.”
구름떼처럼 몰려들어 비통한 표정을 짓고 있던 천마신교 교도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그들 모두는 가공할 내력의 소유자들. 회광파단술이 가진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에 내 말의 진의를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다들 못 들었어요? 물러나지 하라 않습니까!”
그때, 마녀가 임부답지 않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잠시 후.
나는 제 몸 하나 가누기 힘들어하는 류운학에게 가부좌를 틀도록 만든 다음, 그의 등 뒤에 앉아 나 역시 가부좌를 틀었다.
“아들아, 무엇을 하려는 게냐.”
“사부님은 제게 무극파천공이라는 소중한 무공을 전수해주셨습니다. 이제는 그 은혜를 제가 갚을 차례입니다.”
조심스레 양 손바닥을 펼쳐 그의 등 뒤에 대었다. 그러자 부스러져가고 있는 그의 몸뚱이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가공할 양의 내공이 느껴졌다.
“사부님, 팔문을 모두 개문하여 타통하십시오.”
[천마흡성대법]
패도적인 내공이 손바닥을 타고 내게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일한 심법을 배운 나였기에 다른 죄수의 내공을 빨아들이는 것보다 더욱 수월했다.
류운학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안 되느니라! 너의 단전으로는 절대 이것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사는 대신 네가 죽게 될 것이야!”
나는 고개를 저어주고 싶었지만 그가 보지 못할 것이기에, 그리고 흡성대법을 구사하는 동안에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기에 입술만 가까스로 움직여 대꾸했다.
“사부님 대신 제가 죽는 것 또한 계획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