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 마녀들의 가계도 (1)
‘류운학.
이 사내는 눈앞의 적수에게 모든 가족과 무림의 동지들을 다 잃었다. 그런데 이제는 감옥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마저 빼앗아가려 한다.
그저 떠오르는 대로 말하던 설공은 이제야 눈앞의 사내가 누구인지 기억해냈다.
“본좌가 감옥에 붙잡혀오기 전에 유일하게 죽이지 못했던 정파의 고수. 그대였었던가.”
“모두가 입을 모아 내가 무림 최후의 희망이니 자신들이 너를 지치게 만들기 전까지 기다리라 하였지. 눈에 피눈물이 나더라도 검을 뽑지 말라 하였어.”
“그대는 그 말을 지켰었지.”
크나큰 실수였다.
류운학은 그때의 선택을 줄곧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때 동지들과 함께 달려들었다면 어땠을까, 천하제일인이라는 자존심과 허명을 버리고 나 역시 함께 뛰어들어 협공을 펼쳤더라면 결과는 달랐을까. 무림맹의 동지들을 잃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심장에 박힌 비수처럼 후회는 감옥 안에서도 전혀 녹이 슬지 않았다.
누백년 세월이 흘러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할 수는 없다.
류운학이 비장한 표정으로 상단세를 취하며 줄곧 봉인해왔던 무극파천공을 처음으로 시전했다.
[천마군림보]
두 고수를 중심으로 지면이 원형으로 침강하기 시작했다. 류운학의 내려치기는 압도적인 무게가 실려 있었다.
설공은 단 한 손으로 그것을 받아내며 물었다.
“만근추를 펼친 건가. 하나 본좌의 무공으로 덤비는 것은 통하지 않는다.”
류운학은 코피를 터트리면서도 웃었다.
“말하지…… 않았나. 내 최대의 실수는 동료를 믿어보려 하지 않은 것이라고.”
사부님.
지금입니까.
- 그래, 지금이다.
- 제기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잖아요!
나는 현무패웅검을 뽑아들며 전장에 들어설 준비를 마쳤다.
*
‘이것은 무공 대결이 아닙니다. 설공이란 자와 무위를 다투어서 무릎을 꿇리는 게 목적이 아니죠. 저는 그자를 죽이기 위해서 모든 수를 다 사용할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대결이 아니다.
사냥이다.
*
- 제르비어스! 지금이다!
내가 신호하자 돔 형태를 이루고 있던 무수한 마법진 중 꼭대기에 있던 마법진이 하나 사라졌다.
바로 그 빈틈을 뚫고 폭렬마왕의 보라색 마력포가 하늘의 심판처럼 내리꽂혔다.
[마왕군 폭렬마법]
[2급 오의 ‘지옥파쇄포’]
시야 바깥에서의 급습.
그런데도 불구하고 설공은 출검을 거두고 신형을 후방으로 물려 피해냈다.
류운학은 마왕이 지옥파쇄포를 내쏠 것도, 그리고 설공이 어렵지 않게 그 공격을 회피할 것도 모두 알고 있었다.
이것은 아주 오래 전 설원 위에서 정파 최고수 류운학이 목격했던 설공의 반응을 기초해서 만들어진 작전이기 때문이다.
[천마회선장]
류운학이 지옥파쇄포를 손바닥으로 받아쳐 궤도를 직각으로 바꿔버렸다.
더욱 빨라진 속도로 쏘아지는 마력포.
설공은 일체의 고민 없이 후퇴를 멈추고 공격을 받아칠 준비를 했다. 뒷발을 단단히 고정한 다음 발검식을 취한 것이다. 마력포를 잘라내 버릴 태세였다.
바로 그 순간이 내가 기다리고 있던 단 한순간이었다.
나는 있는 대로 내공과 마력을 끌어올린 후 외쳤다.
“친구 류운학의 곁으로 순간이동!”
내 주변의 풍경이 찰나에 바뀌었다.
절박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천마신교 교도들이 일제히 사라지고 그 빈자리에 들어찬 것은,
지옥파쇄포를 받아치려는 설공의 뒷모습이었다.
훤히 드러난 등.
*
‘사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냥감의 빈틈을 찾아내는 것이지요. 그에게 빈틈이 없다면 이쪽에서 만들어야 하고요.’
*
설공의 등 뒤에 느닷없이 나타난 난입자.
나는 현무패웅검을 이미 휘두른 채로 동작을 완성시키기 직전에 튀어나왔다.
원래 이 순간이동은 내가 좌표를 지정할 수 없다. 친구의 곁으로 옮겨진다는 전제를 제외하면 그 거리나 위치는 언제나 무작위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래서는 곤란했기에 류운학은 내가 ‘튀어나올 수 있는 곳’을 설공의 등 뒤로 좁혀주었다. 공간을 압박하는 천마군림보를 일대에 깔아두고 하나의 칸만 비워둔 것이다.
그러니 이건 류운학과 파천황의 합작품이라 할 수 있었다.
‘이것도 피해볼 테냐?’
설공의 걷어차기에 나가떨어지던 순간 나는 그자의 뇌리에서 지워졌다. 그의 경계망에서 잊혀질 수 있도록 지켜보기만 했다.
이 순간이동은 무공도, 마법도 아니다.
전장에서 완전히 이탈해 있던 내가 파천황의 권능으로 옮겨지는 것에 가깝다. 아무리 설공이라 하더라도 순간이동이 완료되기 전엔 내 공격을 예측할 수 없다.
분명 그럴 터인데,
푸우우우욱!
설공의 묵빛 검이 내 배를 꿰뚫고 들어왔다. 머리가 새하얘지는 격통 때문에 어지러웠지만 방금 그가 보여준 판단은 완벽에 가까웠다.
후방에서 인기척을 느끼자마자 허공에 검을 던진 후,
맨손으로 정면의 지옥파쇄포를 튕겨낸다.
주인을 잃은 검은 땅에 떨어지는 대신 후방의 습격자에게 쇄도해 들어간다.
“끄으으윽.”
바닥에 무릎 꿇은 채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내게 설공이 다가왔다.
“기이한 일이구나. 분명 대단한 경지를 성취하지는 못했거늘, 방금 본좌를 뛰어넘는 신법을 구사하다니.”
그럴 수밖에. 이건 당신도 오르지 못한 9층에 올랐던 사내가 내게 남겨준 권능이니까.
설공이 내 배에 파고든 묵빛 검의 손잡이를 움켜쥔 다음 물었다.
“본좌에게 또 보여줄 잔재주가 있다면 꺼내보아라.”
저잣거리의 광대에게나 던질 법한 오만한 말.
하지만 나는 조금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상대가 나를 비웃든 말든 그건 내 계획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니까.
“보, 보여주지. 다음 잔재주를.”
나는 핏덩이를 거칠게 내뱉은 다음 인벤토리에서 한 방어구를 꺼냈다.
S급 갑옷 드래곤하트 플레이트를.
슈우우우욱!
용의 심장으로 제조한 백금색 갑옷이 내 몸을 짓눌렀다.
아론다이트가 용사의 최종무장이라면 이 갑옷은 용사의 최종방어구. 그렇기에 근력 수치 999를 찍기 전에는 입어도 꼼짝을 할 수 없다.
자신의 검을 뽑아내려던 설공의 눈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이 무슨……?”
설공의 주변으로 붉은 기파가 휘몰아쳤다. 묵빛 검을 내 복부에서 뽑아내기 위해 용을 쓰고 있는 것이다.
“안 될걸? 이게 내 두 번째 잔재주다, 이 새끼야.”
검이 복부를 관통한 상황에서 강제로 착용한 갑옷. 설공의 검은 마치 내 몸 속에 뿌리라도 내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교도관장의 권능 행사. 설공이 아무리 대단한 자라고 하더라도 죄수인 이상 나를 건드릴 수 없는 것이다.
나는 한 번 더 순간이동을 사용했다.
“친구 제르비어스 폰타인의 곁으로 순간이동!”
*
‘사냥감의 발톱이 매서워서 접근할 수가 없다면 일단은 그것부터 제거할 겁니다.’
*
거친 바람이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용사! 괜찮냐?”
머리 위에서 제르비어스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녀석은 독수리인 꾹꾹이에게 매달린 채 창공에 떠 있었다.
까마득한 지평선이 곡선으로 느껴질 만큼 높은 위치였다. 나는 드래곤하트 플레이트의 가공할 무게 때문인지 순간이동 직후 추락하고 있었다.
[리버스 그래비티]
다급히 역중력으로 시전자의 몸을 띄워내는 중력 마법을 구사했다. 하지만 통하지 않았다.
[천마어기행공]
무극파천공의 경공도 마찬가지였다.
드래곤하트 플레이트 때문이라고 생각한 나는 찢어진 낙하산처럼 펄럭이는 입술을 가까스로 놀려 갑옷을 집어넣었다.
“아이템 수납.”
그러자 추락은 급격히 느려지며 나를 따라잡은 마왕의 얼굴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너 배에 칼침이 박혀 있다. 피가 줄줄 새어나오는데?”
“겨, 견딜만 해. 애초에 내 몸을 이용해 놈의 검을 박살낸다는 작전이었으니까.”
사실은 거짓말이었다. 출혈이 막대해서인지 머리가 핑글핑글 돌고 사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설공의 검에 관통당한 채로 이동했기에 검신은 여전히 내 뱃속 장기들에 박혀 있는 상태.
[HP: 2,651/9,999]
나는 인벤토리에서 엘릭서를 꺼내들어 뚜껑을 땄다.
그것을 입에 들이붓기 직전에 제르비어스에게 배에 박힌 칼날을 뽑아달라고 부탁했다.
“혀 깨물지 마라.”
“저주에 걸렸을 때와 비교해보면 우습다. 그러니 단숨에 뽑아.”
마왕의 날카로운 발톱이 살을 파고들어 20센티미터 길이의 칼날을 내 복근에서 제거했다.
쑤우우욱!
곧 분수처럼 피가 뿜어져 나왔으나 때마침 들이부은 엘릭서의 힘으로 상처는 곧 잦아들었다.
“휴우. 이제 좀 살만하겠네.”
“꼭 그런 무식한 짓을 벌였어야 했냐, 용사야.”
“설공을 죽이기 위해서라면 더한 짓도 할 수 있어.”
이제 클라이막스만이 남았다.
사냥감의 발톱을 뽑았으니 이쪽에서 반격할 차례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S급 마검 디아볼릭을 꺼냈다. 그러고는 붙잡지 않은 채 자유낙하 하도록 놔두었다.
이 마검을 사용할 것은 내가 아니니까.
“목 닦고 기다려라, 설공.”
나는 용사전용기 무영보를 시전해 삼월초원을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세 개의 달이 순간 세 개의 하얀 선으로 주우욱 늘어났다.
주변의 모든 사물이 직선이 되는 영역. 음속을 돌파하는 느낌이 짜릿했다.
콰아아아앙!
초원에 상륙하자마자 고개를 드니 류운학이 마지막 힘을 짜내어 설공을 몰아치고 있었다.
절대방어를 자랑하던 그의 어검술은 내가 봉인했다.
때문에 설공은 회피 위주의 동작으로 류운학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았다. 내공의 폭주를 감당하지 못하기 시작했는지 류운학의 몸에서는 생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 푸른 혈관이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올가미를 씌우는 것만 남았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마지막 과정에 필요한 아군을 불렀다.
“아스티나 류!”
곧 리버스 그래비티로 날아온 흑기사가 내 옆에 내려섰다.
“준비됐어?”
“……그래.”
대답이 늦었지만 다시금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아스티나와 미리 맞춰둔 대로 마법진을 전개했다.
그러자 아스티나 또한 나와 보조를 맞추어 동일한 크기의 마법진을 만들어냈다.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참월의 마녀에게 중력 마법을 배운 나와 아스티나였다.
나는 3서클. 아스티나는 7서클.
우리가 힘을 합친다면 마녀의 9서클 중력 마법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도제국학파 중력 마법]
[그래비티 프레셔(Gravity Pressure)]
소리는 없었으나 덜컥하는 느낌이 전달돼왔다.
우리가 전개한 공간 압박이 설공의 주변을 옥죄어 들어간 것이다. 그의 보법이 미세하게 느려지기 시작했다.
‘미쳐 날뛰는 사자의 뒷다리를 붙잡고 있는 느낌이야.’
술식을 전개하고 있는 나와 아스티나의 발이 설공 쪽으로 끌어당겨졌다. 땅이 움푹움푹 패고 있었다.
“나타났구나, 예언의 아이.”
아스티나를 발견한 설공이 강력한 회선장을 터트려 류운학을 뒤로 날려 보냈다.
그러자 밧줄의 한쪽이 휘청이는 감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아스티나?”
흑기사의 갑옷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갑옷 속의 여인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집중해, 아스티나. 여기서 놓치면 큰일이야.”
내 다급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아스티나의 술식 흐름은 눈에 띄게 불규칙해지고 있었다.
그녀의 마법 경지는 나보다 훨씬 뛰어나다. 그러니 이건 능력 부족에서 오는 게 아니다.
‘트라우마가 다시 살아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