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 일대종사의 귀환 (3)
- 나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무극파천공의 비급서를 얻어 이자의 뒤를 그대로 따라가 복수하겠다는 일념. 그 명분으로 치장하고 있었으나 그 비급서의 첫 장을 펼친 순간 나는 눈앞의 사내에게 패배했던 것이다.
-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 더 강한 무공 앞에 자신이 쌓아온 무의 길을 버렸던 것이다. 그래선 아니 되었어. 나는 어리석은 천치였다.
- 무슨 일을 벌이시려는 거예요? 네?
- 하지만 이 저주받은 감옥이 나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는구나. 이 불민한 아비는 그 기회를 붙잡아 보려 한다. 그러니 잘 지켜보거라, 내 첫 번째 제자이자 마지막 아들아.
- 사부님!
당황한 나머지 아버지가 아닌 사부님이라는 호칭을 쓰고 말았으나 류운학은 듣지 못한 듯했다.
그는 목검을 바닥에 푹 내리꽂더니 손가락에 공력을 실어 자신의 가슴을 일곱 번 찔렀다.
그것은 그가 내게 전수해준 적이 없는 금단의 비법이었다.
“회광파단술(回光破丹術)?”
나보다 먼저 술법을 깨달은 자는 귀검신녀였다.
무수히 많은 귀신들로부터 무공을 배웠던 신녀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그게 뭡니까, 신녀님?”
“회광반조의 순간을 강제로 불러내는 것이다. 남은 수명을 일순간에 불태운다는 뜻의…… 내공증진법이다.”
콰아아아아아아!
류운학의 푸른 무복이 거칠게 펄럭일 정도로 막대한 기파가 퍼져나갔다. 잔뜩 긴장한 마법사들의 마법진이 일순간 거칠게 진동할 정도로.
“저 술법을 쓰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시전자가 평생에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의 내공을 끌어 쓸 수 있게 돼. 허나 그 대가로 단전이 축퇴압을 이기지 못해 억지로 끌어 모은 내공이 역류하여…….”
신녀는 말을 맺지 못했으나 이어질 말은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초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불꽃을 강제로 피워 올리면 촛불은 아무리 어둔 밤이라도 물리칠 수 있다. 그러나 그 불이 꺼지고 나면 초는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설공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단전을 깨트려서 폭주시켰군. 본좌와 동귀어진을 노리는 것인가.”
*
‘발상을 뒤집어라. 모두를 지키려 하니 다 잃게 되는 것이니라.’
‘희생을…… 감수하란 말인가요?’
‘옳다. 그리고 이 삼월초원에서 누군가 희생을 해야 한다면 적임자가 누구일지 나는 알고 있노라.’
*
동귀어진이라는 말에 류운학이 웃어보였다.
“네가 마인을 초월했다면, 이 순간 나는 죽음을 초월했다. 너와의 싸움 끝에 목숨을 잃는다 해도 나는 천마로서 죽는 것이 아니다.”
류운학이 진각을 밟자 땅이 쩌저적 갈라졌다.
그저 강하게 외칠 뿐인데도 폭류하는 단전 때문에 그의 일갈은 자연히 사자후의 영역에 닿았다.
“일대종사 류운학으로 죽는 것이니라!”
직도황룡(直搗黃龍).
그저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지극히 기초적인 동작이었다.
하지만 묵빛 검이 류운학의 검을 받아치는 순간,
세 개의 달마저 움츠러들만한 충격파와 함께 설공이 처음으로 나가떨어졌다.
*
“안 돼에에에에!”
언덕에서 멀찍이 사태를 관망하던 흑기사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괜찮은가, 아스티나?!”
폭렬마왕 제르비어스가 다급히 흑기사를 부축했다. 인간과 접촉하면 저주 상태이상을 걸게 되지만 다행히 상대는 갑옷으로 온몸을 꽁꽁 싸맨 여인이었다.
“왜 그러는 거야. 지금 처음으로 천마가 상대를 몰아붙이고 있지 않나.”
“아니야. 저건…… 그런 게 아니야.”
아스티나가 수만 번의 회귀를 거듭하면서 보아온 풍경에 류운학이 저 동귀어진의 수법을 사용한 과거는 몇 번이나 있었다.
살쾡이의 발톱을 대호의 그것으로 바꿔버리는 수준의 내공증진법.
그러나 그녀의 시간선에서 그 최후의 수법으로도 설공의 목숨을 빼앗은 류운학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전을 강제로 폭주시킨 대가로 온몸의 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비참하게 죽어가는 아비를 대체 몇 번이나 지켜봤었던가.
“무조건 죽게 돼. 저건 해독할 수 없는 독극물을 삼켜서 만들어낸 극약처방이란 말이야!”
“그런…….”
무공에 대해 그녀만큼 알 리가 없었던 제르비어스의 얼굴에도 경악이 스쳐지나갔다.
마왕은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의 동료, 슈바인 스트링거를 쳐다보았다. 표정까지 확인할 순 없으나 아연실색한 모습이라는 건 분명했다.
“저 녀석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는 거냐.”
그렇다는 건 류운학이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라는 뜻이었다.
제르비어스는 어금니로 잇몸을 짓씹을 수밖에 없었다.
‘낭패다.’
아직 저 용사 녀석의 전략은 절반도 채 수행되지 못했다. 원래 류운학의 역할은 설공을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었다.
설공의 무위를 최대한 이끌어내어 실시간으로 용사가 공략해낼 수 있는 빈틈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오늘은 삼만월의 밤.
마력과 내공이 저절로 차오르는 마나 스트림의 축복이 내려진 시간이다. 그렇기에 류운학은 초장기전으로 싸움을 이끌고 가야만 했다.
목숨을 불태워가며 상대를 몰아붙이는 건 계획을 크게 뒤틀어버리는 일탈인 것이다.
“이런 건 원하지 않았어. 나는…….”
비틀대며 일어선 아스티나가 품에서 단탈리온을 꺼내들었다.
그것이 뜻하는 바를 모르지 않았기에 제르비어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아스티나 류. 설마…… 그 마도서를 사용하려는 거냐?”
흑기사의 투구에서 서슬 퍼런 눈빛이 뿜어져 나왔다.
“왜? 막아설 생각이야?”
상대로부터 느껴지는 살기에 마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슈바인은 이런 상황이 닥쳤을 경우 아무 제지도 하지 말라고 분명히 전했기 때문이다.
“그 녀석이 말했듯, 단탈리온을 쓸지 말지는 전적으로 너의 결정이야.”
“그렇다면 막을 생각하지 마. 내가 이 시간선에서 없어진다면 설공은 목적이 사라지는 거야. 어쩌면 엄마와 다른 죄수들은 살 수 있을지도 모르는 거라고. 더 늦기 전에 블랙홀을…….”
“그걸 만들어서 다음 세계로 달아나면? 이 싸움의 끝이 어떻게 될지 죽는 순간까지 궁금해 하며 괴로워하게 될 거다. 그러지 않을 수 있겠나?”
“아빠의 죽음이 확정된 이 상황에서…… 희망을 잃지 말라고?”
그에 대한 대꾸를 생각하면서 제르비어스는 운명의 짓궂은 아이러니를 느꼈다.
불과 45일전만 하더라도 자신은 화룡도의 폭군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왕성을 쳐들어온 용사들에게서 희망을 빼앗았던 것처럼, 이 감옥 안에서도 절망의 현신이 되려고 애를 썼다.
“그래, 아직 희망을 놓을 때가 아니다.”
그런 그가 이제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이 죽였던 용사들의 숫자보다 수십 배는 많은 회귀를 반복해온 한 여인 앞에서.
아스티나는 단탈리온의 표지를 붙잡은 채 아직 넘기지 않고 있었다.
갈등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전장을 뒤에서 지휘하고 있는 녀석은 뒤바뀐 상황에 맞춰 또 작전을 수정하고 있을 거다.”
“네 친구에 대한 믿음을 내게도 강요하지 마.”
“강요하지 않겠다. 다만 사실을 일러주는 거야. 저 녀석은 네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죽음에 가까운 저주를 몇 십 번이나 받아들였어. 마족보다 지독한 놈이라 할 수 있지. 숨이 끊어질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을 놈이다.”
제르비어스가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말을 맺었다.
“그러니 지켜봐 줬으면 한다. 나는 녀석이 네 아버지가 죽는 꼴을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거라는 데 한 표 던지고 싶거든.”
아스티나의 이마 위에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는 백묘탑 최강자인 마녀의 딸이었다. 뜀박질을 할 수 있게 된 세 살배기 시절부터 마탑주에게 시간선과 좌표에 대해서 배워왔다.
아스티나는 천마와 마녀가 전쟁을 멈추고 연정을 확인한 시간선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선 용사와 마왕이 자신의 삶과 놀랄 만치 흡사한 이야기를 꾸며내 둘을 맺어주었다고 한다.
그 어떤 마법도 거역할 수 없는 유일한 법칙, 인과율.
‘어쩌면 나는 결과이고 이 세계가 원인이었다면…….’
그랬더라면 아스티나의 존재 확률은 수많은 가능성 중의 하나에 불과했을 것이다. 마녀의 언어에 따르면 ‘좌표’를 얻지 못했을 허수.
슈바인 스트링거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스티나를 소환한 것이라면?
그 기나긴 여정의 종착지가 이곳일지도 모른다.
*
“받아보아라! 이것은 오직 너에게 닿기 위해 살아온 한 사내의 일검이다.”
류운학의 맹공은 직선적이었다. 회광파단술을 쓰기 전의 유려한 초식에 비하면 질박하게 느껴질 만큼 단순한 연격.
‘사부님은 지금 단순한 힘 대결로 밀어붙이고 있다.’
내가 둘의 맞대결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시야를 왜곡시키는 중력 마법 덕분이었다.
그래서 망원경을 갖다 댄 것처럼 공방전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류운학이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검로는 내겐 잔상으로 흐릿하게만 보일만큼 뛰어난 속도를 자랑했다. 무극파천공을 택하지 않고 생사결에 나선 판단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만큼.
‘일시적인 공력의 증가로 전력을 쏟아내고 있으시지만…… 상대가 지치질 않아.’
설공은 자신의 묵빛 검으로 맹격을 받아치면서 중간중간 몇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이 대결로 상대의 삶을 유추해내려는 듯.
“그대가 검으로 말을 걸어오니 본좌도 응수해야 예의겠지.”
류운학이 설공의 검을 받아내지 못하고 뒤로 날아갔다. 설공은 상대가 낙법을 취하기 전에 짓쳐 들어가 파상공세를 퍼부었다.
후우우우웅!
[천마회풍일섬]
내가 알고 있는 무극파천검의 정수는 공격 하나하나에 묵직한 파괴력을 담은 패도적인 묘리.
그런데 설공의 연속 동작은 마치 뛰어난 무용수의 그것처럼 아름다웠다.
“이 정도로는 내 목을 가져갈 수 없다!”
류운학이 한층 더 진기를 뽑아내어 설공의 검을 받아냈다.
카작!
얼핏 류운학이 대등하게 버티는 것처럼 보이나, 둘의 상반된 표정이 누가 우위인지 보여주고 있었다.
악귀의 얼굴을 하고 단전의 폭류에서 오는 고통을 참아내는 류운학.
반면 표정의 변화 없이 여유로운 설공. 심지어 담소를 나누듯 말까지 걸어온다.
“그대의 무학은 인상적이다. 아마도 동급의 적수와 지고의 시간을 견뎌내며 상대에게 틈을 주지 않는 전법을 발전시켜온 모양이로군. 그것은 분명 행운. 본좌는 솔직히 그대가 부럽다.”
“……부럽다고?”
“이 감옥 바깥에서 본좌는 본좌와 동급의 적수를 만나본 적이 없다. 본좌의 모든 것을 이끌어내어 싸워야만 했던 적이 없어. 그 경험의 차이가 지금 그대를 내 파상공세에서 살려두고 있지 않은가.”
정글의 지배자인 수사자가,
뒷골목에서 매일 전쟁을 치러온 승냥이를 부러워하고 있다.
“실로 인상적이군. 그대가 보여준 고강함은 분명 이 감옥의 더 높은 층을 노릴 수 있을 만큼 뛰어남을 인정하겠다. 하지만 본좌 앞을 막아선 것이 그대의 불운.”
나는 왜인지 설공의 다음 말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슬프구나. 그대의 살신성인이…….”
그것은 류운학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 살신성인이! 무위로 돌아감이 슬프다고 하려느냐! 쿨럭. 오너라. 나는 아직 두 다리로 서 있다. 그날 그곳의 굴욕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노라.”
귀환한 일대종사의 검이 시리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