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4. 일대종사의 귀환 (2)
반사적으로 포스 필드를 전개해보려 했지만 그보다 설공의 동작이 훨씬 빨랐다.
설공의 발이 내 턱을 가볍게 걷어찼고,
뿌아아아아악!
나는 목이 뽑혀나가는 느낌과 함께 하염없이 날아갔다.
그러다가 거대한 바위에 처박히는 느낌에 정신을 차렸는데, 걱정스러운 얼굴의 폭암도인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은가, 소교주?”
“커헉. 아뇨. 염라대왕의 수염색깔은 붉은색인 거 알고 계셨습니까.”
“농을 건네는 걸 보니 아직 살만한가 보군. 일어나게.”
폭암도인의 양발 앞에 기나긴 고랑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가 중간에 받아내지 않았더라면 나는 귀혼산장까지 날아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선배님은 제대로 보셨습니까?”
“자신할 수가 없네. 체중에 구애받지 않는 보법으로 미루어보아 부공삼매(浮空三昧)의 경지로 보였네만.”
그렇다면 그림자로 내려왔는데도 불구하고 설공의 내공은 가공할만한 수준을 자랑한다는 뜻이다.
[HP: 6,242/9,999]
대단한 초식도 아니고 간단한 박투술 한 방으로 내 체력을 이만큼이나 깎아먹었다.
‘내 상대가 아니야.’
발길질 한 번에 나를 수백 미터나 날려 보낸 설공은 여전히 포탈 앞에 고고히 서 있었다.
나는 입가에 묻은 피를 닦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역시 안 되겠네요. 최대한 사냥감의 움직임을 가까이서 느껴보며 덫을 놓을 방법을 궁리해보려고 했는데.”
저 사냥감을 묶어놓을 도구가 나에겐 없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백묘탑의 형제자매들이여! 막내도련님을 지켜라!”
쩌렁쩌렁한 외침과 함께 삼월초원이 일순간 밝아졌다. 섬광탄 수백 개를 터트린 것처럼.
하지만 그 빛을 뿜어내고 있는 것은 섬광탄이 아니라 도합 오백 개의 마법진이었다.
탑이라는 거대한 구조물을 날아오르게 만들었던 강력한 힘의 응집이 이번에는 전혀 다른 용도로 쓰일 준비를 마쳤다.
“그래, 이 초원에는 마법사들도 있었더랬지.”
중얼거리는 설공의 얼굴이 형형색색으로 물들었다. 그의 주변에 반구를 그리며 빽빽이 들어찬 마법진들이 드리운 빛깔이었다.
마법사들의 선두에 서 있는 참월의 마녀 일레인 쿠디슈가 노성을 터트렸다.
“마탑의 수호자들이여! 초원의 적을 격멸하라!”
오백 개의 영창이 웅장한 화음을 이루며 저마다 최강의 술식들을 전개했다.
오백 개의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자비한 공격마법.
설공은 통나무만 한 전격이 뱀처럼 자신의 코앞에서 아가리를 벌릴 때까지 가만히 서 있다가,
다음 순간 묵빛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내가 이 초원에 있을 때도…….”
그는 벼락을 가르고,
“지팡이를 든 자들이 나를 노렸으나…….”
화염을 꺼트리고,
“지금의 그대들에게 그것이 전해지지 않는 이유는…….”
바람을 질식시킨 다음,
“본좌의 손에 모두 참수되었기 때문이다.”
공간 자체를 잘라내었다.
설공은 서 있던 자세 그대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에 떠다니게 놔두었던 검을 쥔 채 모든 방위에서의 마법 공격을 상쇄시켜 버렸다.
검풍이나 검기로는 해낼 수 없는 위업.
나는 묵빛 검을 감싸고 있는 붉은 기운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삼월초원의 초고수들이 사용하는 검기보다 한층 더 짙게 응축된 검강(劍罡).
분명 저것을 사용하면 내공이 급속도로 소진된다고 배웠는데, 설공의 안색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역시 모자라는구나.”
마녀가 통탄해하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쥔 지팡이가 파르라니 떨리고 있었다.
본인이 가진 9서클의 중력 마법을 최대치로 구사한다면 설공에게 유의미한 제약을 가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마법을 쓰면 뱃속의 아스티나가 잘못되겠지.’
그라비타스 도미누스의 마력 회로는 자궁과 연결돼 있다.
생애 처음으로 전쟁터에서 배제된 생체병기. 결국 그녀는 신속하게 미련을 버리고 작전대로 손짓했다.
“물러나서 마법장을 펼쳐라!”
순간 마법진으로 이뤄진 반구가 서너 배 크기로 확장되었다. 물론 그러면서 밀도가 낮아져 사람 한 명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헐거워지게 됐다.
“어이하여 공격을 멈춘 것이지? 아직 그대들의 전력을 받아내지도 않은 것 같은데.”
의아해하던 설공은 마법진으로 만들어진 돔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한 사내를 발견했다.
그 역시 자신과 같은 검은 무복을 입은 채 눈빛에선 형형한 안광을 발하고 있었다.
무림의 8대 천마이자 귀혼산장의 일인자.
천마 류운학이 설공 앞에 섰다.
“그런가. 좀 전의 사내가 층장의 열쇠를 갖고 있기에 의아했거늘…… 그대야말로 현재 이 초원의 최고수로군.”
이 모든 것이 내가 짜낸 계획의 순서를 따르고 있었다.
대화의 물꼬를 튼 내가 설공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마법사들이 원거리 공격을 퍼부어 설공으로 하여금 무기를 쥐게 만든다.
그다음 바통을 넘겨받은 류운학의 몫은 설공의 모든 힘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마녀 일레인 쿠디슈는 임신 중이었기에 최후방에서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니 당신이 해 줘야만 해.’
나는 주먹을 불끈 쥔 채 내가 짜놓은 장기판의 최강 말을 바라보았다.
아직 내 힘으로는 이 판에서 졸을 벗어날 수 없다. 장군을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차(車)가 왕(王)을 잡아주기를 기대하며 지켜봐야 한다.
류운학이 목검을 뽑았다.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지, 설공.”
“그렇다. 본좌와 연이 있었던 자인가?”
“그래. 하지만 한쪽만 기억하고 있는 악연 따위 의미는 없겠지. 나는 당신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에 유감을 갖지 않겠다.”
내 옆에 서 있던 만검패웅이 무언가를 깨닫고 입을 쩍 벌렸다.
“소교주, 본인이 들은 것이 맞는지 확인해주겠소? 방금 교주님께서 스스로를 가리켜…… 본좌란 호칭을 쓰지 않으셨소. 그것도 여러 번.”
그제야 두 고수의 문답에서 이상함을 깨달은 마라혈귀와 귀검신녀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천마신교의 교주가 본좌라는 단어를 버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스스로 하늘에서 걸어 내려왔다는 것이다.
“네. 지금 저분은…… 천마신교의 교주가 아니라 한 명의 무인으로서 저 자리에 서 계신 겁니다.”
“소교주의 뜻이오? 어찌하여 그런 조언을…….”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리 언질을 듣긴 했으나 이 상황은 내가 제안한 발상이 아니라 류운학이 먼저 선언한 것이었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지금부터 드러날 것이다.
류운학이 무복의 자락을 뜯어내 하늘로 던졌다. 그가 오랫동안 입고 있던 검은 무복이 나풀거리다 바닥에 떨어졌다.
그 검은 무복 안에 있었던 것은 청빛의 도복.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저 사내가 잊고 있었던 본래의 색깔이기도 했다.
“나는 청성파의 무인 류운학! 언젠가 일대종사를 이루겠다는 꿈을 품은 채 살아왔으나 그대에게 모든 것을 잃은 사내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자신도 호피를 뒤집어썼다.
그런 세월이 너무도 길었던 나머지 스스로도 호랑이가 된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늘그막에 얻게 된 제자가 알려주었다.
그의 진정한 모습은 호랑이가 아닌 늑대라고.
“그대와 생사결을 치러 청성파의 일대종사가 이곳에 있었음을 알리겠다!”
류운학의 목검에서 이전과는 다른 맑고 청명한 검기가 맺혔다. 그에게서 발출되는 기세가 멀찍이 떨어진 마교도들에게도 전달되었다.
삼월초원의 모두가 처음 보는 모습.
잠자코 듣고 있던 설공이 기수식을 취해주었다.
아마도 자신의 목을 노리는 자에 대한 예우를 잊지 않는 것이 그에게 남아 있는 희미한 인간의 흔적 같은 것이 아닐까.
“본좌는 설공이다. 본좌를 이긴다면 그대의 이름을 기억할 테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몇 초 후.
마도의 극에 올랐으나 마를 벗어던진 사내와,
마도를 정복해 탈마를 이뤄낸 사내가,
삼월초원의 중앙에서 격돌해 청홍(靑紅)의 개벽을 만들어냈다.
*
‘아들아, 수심이 깊어 보이는구나.’
‘설공이란 자를 꺾고 이 삼월초원을 지켜낼 방도를 생각 중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묘안을 떠올려보아도 종국에는 패배하고 말아요.’
‘그래. 너는 영특하지. 하지만 과한 짐을 어깨에 올려놓으면 상단전이 막히게 되는 법.’
‘상단전이요?’
‘머리만 굴린다고 대업을 이뤄내는 게 아니란 뜻이다. 그럴 땐 발상을 뒤집어볼 필요가 있지.’
‘어떻게 말입니까?’
*
[청성파 비전 구하천풍식(九河天風式)]
[만상귀일검(萬象歸一劍)]
뛰어난 무인은 바람을 읽는다.
그러나 절정의 고수는 바람을 이끌어낸다.
류운학의 목검이 뿜어내는 유려한 검세가 설공의 급소를 희롱하기 위해 발톱을 드러냈다.
만상귀일.
만 개의 검이 이뤄낸 형상이 곧 일점으로 귀결된다는 이치.
그 이치를 담아낸 검이 설공을 몰아세웠다.
삼월초원의 낭창낭창한 수풀들이 류운학의 초식에 따라 군무를 추는 그 모습은 압도적이었다.
바람으로 만들어진 용들이 세차게 용트림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장관.
“감탄이 나올만한 성취군. 하지만 화려무비한 검법의 극의는 상대를 현혹시키는 데 있는 법. 본좌는 허초에 현혹되지 않는다.”
류운학의 검격을 받아내던 설공의 자세가 달라졌다.
둘의 이동 범위에 따라 흔들리던 달밤의 수풀들 움직임이 일제히 멎었다.
정중동(靜中動).
만물이 숨을 죽인 가운데 설공의 검 또한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그러나 분명 그 검은 어떤 움직임을 빚어내려고 맥동하고 있었다.
샤아아아아.
어느새 단 한 줌의 바람도 두 사내의 간격 안으로 파고들지 못했다. 청성파의 일대종사가 만들어낸 천풍식이 무효화된 것이다.
바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기압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자연현상이다. 분명 구하천풍식 역시 그런 원리를 이용하는 초식일 것이다.
그렇다면 기압은 무엇인가.
중력에 의해서 기체에 가해지는 압력이다.
“원리를 깨부수면…….”
지금 설공의 검은 ‘무극파천공’의 공간장악력을 초원 전체에 펼쳐 동일한 기압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묘리는 남아날 수 없는 법이라네.”
초식 대결을 훌쩍 뛰어넘은 기상천외한 대응이었다.
그 순간 류운학의 평정심이 흔들렸는지 그의 왼쪽 어깨에서 피가 솟구쳤다.
물러난 쪽의 얼굴은 담담했으나 오히려 베어내는 데 성공한 쪽의 얼굴엔 이채가 감돌았다.
“한쪽 팔을 받아낼 생각이었는데, 얕았군.”
류운학의 푸른 무복에 붉은 화초가 피어났다. 마치 설공의 마기가 상대의 목을 조여가고 있다는 걸 상징이라도 하듯.
그 후에도 류운학은 펼칠 수 있는 모든 초식을 상대에게 쏟아냈다.
[칠십육로무형참(七十六路無形斬)]
하지만 칠십육 개의 참격도 소용없었고,
[송서초상비(松鼠草上飛)]
풀잎을 꺾지 않고 비상하는 경공은 격파되었으며,
[대라굉폭뢰(大羅宏爆雷)]
암기술에 가까운 기공 폭발 또한 무력화되었다.
그러는 사이 류운학의 내공은 빠른 속도로 소진되어가는 반면, 상대인 설공은 여전히 무저갱에 가까운 크기의 공력을 지켜내고 있었다.
류운학의 공세가 멈추었다.
그의 등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아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설공이 반격하지 않고 지켜보기로 한 것은 상대의 유언을 들어주기 위함으로 보였다.
“본좌에게 아직 고할 것이 남았는가.”
그러나 설공의 추리는 빗나갔다. 류운학이 남길 말을 들을 상대는 그가 아니었다.
바로 나였다.
- 아들아, 보고 있느냐.
나는 그에게 ‘귓속말’의 기능을 알려준 적이 없다. 그러니 이것은 파천황의 권능으로 이뤄지는 귓속말이 아니다.
전음.
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류운학은 내게 무언갈 보여주려 하고 있다. 자신의 내공을 낭비해가면서까지.
-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명심하거라.